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15화 (15/200)

[15] 서바이벌(1)

엔넷 <탑아이돌> 표지 촬영 현장.

탁성수 피디는 MC의 전화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의견을 내는 걸까.

"수연 씨, 솔라를 강팀이랑 붙이고 싶다고요?"

-네. 제 생각은 그래요.

"...."

그만큼 솔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

자회사도 가족이라고, 챙겨주려는 거구나.

"큐앤지, 드림 에이전시 산하 레이블이잖아요."

-네? 그렇긴 한데.

"이전 매니저가 정수호 매니저였죠? 지금 솔라 매니저분."

-그, 그건....

"혹시 편애하는 건 아니죠?"

-제가요? 정수호를 편애한다고요!?

"...."

격한 반응에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보통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하지.

-피디님, 그냥 제 생각이에요. 소속사랑 상관없이!

"음, 그래요."

이전 매니저도 식구라고 챙겨주는 모습이 좋아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한 팀만 신경 쓰는 건 조금 곤란하네.

"수연 씨, MC로서 중립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게 다 방송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아시죠?

"아, 네.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뚝.

탁성수 PD는 전화를 끊자마자 꾹꾹 머리를 눌렀다.

그간 실력이 얼마나 늘었길래, 이리 뽐내고 싶을까.

요즘 반응이 뜨거워서 그런지 이런 전화가 부쩍 늘어났다.

방청석에 앉는 패널로 누구를 꽂아달라든지.

어떤 그룹 위주로 편집해 달라고 한다든지.

가끔은 탈락자 선정 방식을 물어보기도 했다.

CP부터 국장님과 사장님까지 조금씩 훈수를 두고 있었다.

"탑아이돌이 핫하긴 한가 봐."

한때는 퇴물 취급을 받았던 음악 프로그램.

신인 한 팀을 섭외하려고 후배에게 부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올해 가장 기대되는 방송으로 성장했으니.

"이건 마치...."

누군가 설계한 체스판 위의 기물이 된 느낌이었다.

동기 중에서 누군가 비슷한 사례가 있기는 했었지.

대형 투자사가 뒤를 봐주는 케이스.

그때랑 현재 상황이 거의 비슷했다.

잠시 후,

국장님께 걸려온 전화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버렸다.

"여보세요. 국장님."

-탁성수, 빨리 튀어와!

"네?"

-지금 텀블 인베스트먼트에서 투자한다고 연락 왔어.

".... 역시!"

-???

한때 친했던 동기의 방송도 지금의 상황이랑 99% 흡사했다.

그 당시, 출연진 중 한 명이 그 투자사 대표의 아들이었던가.

-뭐하는 거야. 빨리 오라니까.

"알겠습니다. 국장님."

-지금 바로 와.

"네."

전화를 끊고 스윽 주변을 둘러봤다.

애초에 자신은 그저 촬영을 해주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이 판을 주도한 사람이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순간, 탁 PD는 슬쩍 시선을 돌려 누군가를 바라봤다.

여신 컨셉 의상을 입고 표지 촬영 중인 솔라 멤버들.

".... 솔라."

현재 제작진, 스탭들 중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DK 뮤직의 아이솔레이션이 <탑아이돌>에 합류하게 된 계기.

솔라에게 무대를 빼앗기고 자존심 때문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이후, 모든 과정이 기름칠을 칠한 듯 부드럽게 흘러갔다.

'설마....'

모든 건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는 저 매니저로부터 시작했다.

후배의 도움으로 솔라를 섭외했을 때부터.

투자사 컨택, 출연진 캐스팅, 사전 준비까지.

어쩌면, 엔넷 뮤직스타 PD와 딜을 하는 것부터 그의 설계였을까.

'그러고 보니....'

일개 로드 매니저 혼자서 솔라를 키웠다던데.

보통 업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 아닌가.

탁 PD는 날카로운 눈으로 수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 * *

대망의 <탑아이돌> 첫 촬영일.

헤메코로 완전무장한 멤버들을 이끌고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오늘처럼 멤버 전원을 맡을 때는 엄지유가 없어도 충분했다.

"얘들아, 너희 표지 촬영 때 별일 없었어?"

"네? 무슨 일이요?"

"아니, 그냥."

피디님이 나만 계속 째려보시더라고.

애들 중에 한 명이 사고 친 게 분명해.

'혹시 나 없을 때 은서가 작가님한테 대들었나.'

괜히 첫 촬영 날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방송 중에 사고 치는 것보다 이게 낫지.

"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네?"

역시,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졸라 수상하다.

"뭐 잘못한 거 있지."

"아우, 걸렸다."

"솔직히 말해."

"어제 편의점 갔어요. 죄송해요."

"응?"

그거 말한 거 아닌데.

"편의점에서 뭐 사먹었어."

"별건 아니고, 초콜렛이랑 과자랑...."

"에휴."

어쩐지, 얼굴이 살짝 부은 것 같기도 하더라.

한창 먹고 싶은 나이에 굶는 것도 고역이지.

"됐어. 배고팠으...."

"소주랑 맥주랑."

"도랐."

"아, 그럼 긴장되는데 어떡해요."

".... 오케."

그래. 다 큰 성인이 소주 한잔할 수도 있는 거지.

편의점 가서 애들한테 술 팔지 말라고 해야겠다.

"왜 그랬어? 어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솔직히 안 걸릴 줄 알았어요."

"···."

존나 솔직하네.

"다음부턴 걸리지 마."

"네에."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엔넷 방송국에 도착했다.

"얘들아, 내리자."

잠시 후,  <탑아이돌> 촬영장.

촬영 전부터 얼마나 투자를 많이 받았는지.

화려한 세트장을 보니 눈이 부실 지경이다.

"오, 안녕하세요!"

이내, 익숙한 얼굴의 막내 작가님이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이미 제작진은 촬영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벌써 촬영을....?"

"아, 그냥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네?"

"그냥 편집하면 되니까요, 하하."

"...."

어떻게 편하게 생각해요.

카메라는 치우고 말하든가.

"그럼 저는 이만 빠질게요."

"아뇨, 매니저분도 그냥 자연스럽게 대기실에 같이 가셔도 괜찮아요."

"아...."

"자연스럽게."

벌써 존나 부자연스럽잖아요.

"이쪽으로 가시죠."

작가님을 따라 멤버들과 함께 대기실에 들었는데.

이미 제작진은 장비를 세팅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솔라 멤버분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저기 테이블 위에 와이어 퍼즐 12개 보이시죠?"

"...."

벌써 시작이라고?

"매니저님도 자유롭게 대화하셔도 괜찮습니다. 편하게, 편하게."

"아, 네."

"솔라 멤버분들은 거기 퍼즐을 푸셔도 되고, 안 푸셔도 됩니다."

"아."

대충 빨리 풀수록 좋다는 뜻이겠지.

굵은 쇠 철사가 제멋대로 꼬여있는 와이어 퍼즐.

내부의 고리를 꺼내면 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오빠, 여기 퍼즐 풀었을 때 혜택도 쓰여있어요."

"우왕, 이거 풀면 무대 세트비 500만 원 지원!"

"이거는 특수장비 추가."

"골─든 티켓이네."

그래도 예능은 예능이구나.

이런 걸로 분량을 뽑으려고.

곧이어, 멤버들은 각자 하나씩 퍼즐을 잡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그중, 의외로 가장 퍼즐을 잘 푸는 사람은 막내 소미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막무가내로 풀지 않고 면밀히 살피더니.

"아싸 하나 끝! 쉽다, 쉬워."

"오, 퍼즐 천재네."

"저 아이큐 160이에요."

"멘사?"

"아뇨, 돈 내면 따는 거 말고. 진짜 영재교육원이요!"

"...."

올림피아드 문제 풀 때부터 알아봤지.

'의외로 뇌섹녀구나.'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양주희는 가장 크고 길죽한 쇠고리를 들고 내게 보여주었다.

"매니저 형님, 이거 좀 봐요!"

"오, 대진 결정권....?"

첫 번째 경연 무대, 모든 대진표 선택권.

그 중요한걸 와이어 퍼즐 풀기로 정하냐.

"너무 복잡하지 않아?"

"에이, 그냥 퍼즐인데요."

"...."

주희는 나쁜 머리로 쇠고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으음, 쉽지 않네."

"주희야, 그냥 소미한테 맡겨."

"왜요!"

원래 사람마다 각자 잘하는 게 있는 법이야.

"설마 저 못 믿어요?"

".... 믿지."

"흥."

순간, 주희는 와이어 퍼즐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이건 크기가 커서 손잡이도 크네."

"???"

끼기기긱─

곧이어, 강한 마찰음과 함께 와이어를 비틀어버리는 근육 돼지.

주희의 전완근과 이두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부풀어 올랐다.

"이런 미친."

잠시 후, 짤랑 소리를 내며 책상에 떨어진 와이어 고리.

지켜보던 제작진은 입을 벌린 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누가 퍼즐 천재지?"

"...."

퍼즐 천재(물리).

"주희야, 너 때문에 조감독님 당황하신 것 같은데."

"이게 왜 저 때문이에요."

양 씨 가문의 딸래미는 내 핀잔을 무시하고 다른 퍼즐을 뒤적거렸다.

"다른 건 크기가 너무 작아서 그립이 불편해요."

"또 풀게?"

"에잉, 힘이 부족해서 더 못 풀겠네."

".... 힘이 아니라 지능."

"예?"

옆에서 지켜보던 조연출은 긴급회의를 위해 급하게 대기실을 벗어났다.

'이게.... 걸그룹?'

* * *

오직 <탑아이돌>을 위해 제작한 세트장.

MC 이수연은 걸그룹 멤버들은 한 팀씩 차례대로 소개했다.

각 그룹은 나름대로 준비한 작은 퍼모먼스와 함께 등장했다.

"태양의 여신, 솔라를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곧이어, 무대가 열리고 솔라 멤버들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만 봐, 나만 봐, 나만 봐."

반주도 없이 들으니까 갑자기 또 거슬리네.

저 후렴구를 들으면 아직도 괜히 민망했다.

"크으, 명곡이네요."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핑키걸스였나, 핑크래빗인가.

그 친구들 담당하는 매니저분.

"이 곡을 정수호 매니저님이 고르셨다면서요?"

"네. 뭐...."

"안목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저기, 오늘 퍼즐은 몇 개 푸셨어요?"

"...."

이분은 볼 때마다 정보를 캐내려는 느낌이야.

"그냥 대충 서너 개 정도요."

"아우, 우리 애들은 하나 풀었는데. 쫌 치시네요? 하하."

"네. 뭐. 운이 좋아서."

"대진표 결정권 퍼즐 푸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네요. 시간만 더 있었으면 풀었을 텐데."

".... 그러시구나."

그거 우리는 풀었어요. 힘으로.

부끄러워서 자랑은 못 하지만.

그때, MC의 장황한 소개와 함께 최고 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순서는.... 아이솔레이션!"

DK 뮤직 출신의 아이돌은 당당하게 등장해서 짧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길쭉한 팔다리와 임팩트 있는 댄스, 여유로운 표정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와아, 역시 대형 기획사구나."

"그러게요."

짧지만 뇌리에 각인되는 무대 매너.

저 실력으로 안 뜨는 게 더 이상하지.

짜릿─

순간, 뒤통수가 얼얼할 만큼 강력한 필승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 똥촉은 아이솔레이션의 엄청난 재능을 알아봤다.

아니, 누구라도 저 실력을 가짜라고 생각할 순 없지.

지금인가.

역배 타이밍.

사실, 대진 결정권이 우리에게 있다면 저쪽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적당히 만만한 핑크 친구들을 고르면 무난하게 1승을 챙길 수 있으니.

"크으, 우리 핑크레몬도 조금만 더 열심히 연습하면 저 정도는 할 텐데."

".... 조금이 아닌 걸요."

"무조건 저 팀이 우승까지 하겠죠?"

"제 생각엔...."

내 촉을 피해서 성공한 사례가 없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으니.

"해볼 만한데요."

"오우."

너무 속마음을 터놓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말을 주워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안녕하세요."

하필, 주변에 있던 아이솔레이션의 매니저가 내 말을 주워들었다.

"정수호 매니저님, 저번에 뮤직스타 때 뵈었죠?"

"아, 네."

이분이 경현식 팀장님이랬나.

그때 명함도 교환했었는데.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군요."

"나쁜 뜻은 없었어요."

"예. 뭐...."

과할 만큼 경계심 섞인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상대.

괜히 멋쩍은 마음에 간지러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진짠데."

아이솔레이션 실력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니까요.

* * *

MC 이수연은 영 못마땅한 눈길로 솔라를 바라봤다.

강팀이랑 붙어서 무참하게 깨지는 그림을 원했는데.

'퍼즐을 누가 힘으로 풀어!?'

아무리 봐도 형평성에 어긋나는 상황이 아닌가.

어쩐 일인지, 제작진은 그냥 진행할 생각이었다.

"자, 그럼 첫 번째 대진표를 공개합니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여덟 개 그룹의 이름표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각자 리메이크한 데뷔곡으로 무대를 꾸미는 첫 경연.

직접 프로듀싱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었다.

"퍼즐을 풀어서 대진표를 결정할 그룹은...."

스윽─

그때, 무대 한쪽에서 아이솔레이션의 리더가 손을 들었다.

"나수린 양, 말씀하세요."

"오직 한 팀만 퍼즐을 풀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런데요?"

"근데 힘으로 풀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

과연, DK 뮤직의 정보력이란.

제작진에 친한 스탭이 있었구나.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수린의 발언과 함께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전 스탭들의 시선은 솔라 멤버들에게 집중되었다.

'장은서랬나? 저 친구는 표정 관리 못 하네.'

그때, 솔라의 리더는 장은서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마이크를 들었다.

"동의합니다."

김예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MC와 대화를 이어갔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다른 게임으로 대진을 결정하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대신 다른 혜택이라도 주시면 더 좋고요."

"그럼요. MC 재량으로 막 퍼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헤헤."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기는 능구렁이 같은 친구.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데 행동은 여우 같다.

'.... 쫌 치네.'

날이 선 어조로 이의를 제기한 아이솔레이션.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권리를 포기한 솔라.

둘 중 어느 쪽이 시청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을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이수연은 작가들이 급하게 제작한 랜덤 게임 박스를 건네받았다.

"그럼 이 중에서 제가 하나를 뽑고...."

현장에서 당장 가볍게 할 수 있는 게임들.

생각해 낼 만한 능지가 너무 부족했나 봐.

[딱밤 참기]

장난하나, 무슨 걸그룹이 이런 게임을.

"오, 이번에도 내 게임이네. 딱 대!"

"???"

양주희는 게임 종목을 보자마자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다들 나와서 일렬로 서세요."

".... 깡패야?"

저 새기 남자 같은데.

아까 형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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