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힐링은 개뿔
“정진 형, 제가 그릇을 씻을게요.”
“어, 그래.”
“그러면 형이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역할 분담하죠?”
그렇게 나는 그릇이 들어오면 씻고, 씻은 그릇은 이정진에게로 넘겼다. 그런데 설거지가 무슨 끝도 없이 들어왔다.
‘이건 나태 지옥이다.’
옆에 계신 이모님이 우리를 보며 손이 빠르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우리가 잘하긴 하지. 이윽고 한차례 폭풍 같은 설거지가 끝나자 나랑 이정진은 녹초가 된 상태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님, 안 힘드세요?”
“힘들지.”
“그렇죠?”
하지만 이모님은 익숙하다는 듯이 다시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시 하자.”
이모님보다 우리가 젊은데 뒤떨어지면 안 되지. 눈코 뜰 새 없는 사이 자정이 되어가자 그나마 손님 수가 줄어서 그릇의 수도 현저히 떨어졌다.
“와…….”
“…와.”
나랑 이정진은 대화는커녕 그저 그릇을 보며 탄식만 쏟아냈다. 그러다가 새벽 1시가 되자 설거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녹초…….”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서 멍하니 앞만 응시했다. 이정진의 부모님은 익숙하셔서 그런지 아직 괜찮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이제 일당을 줘야겠지? 자, 대표로 누가 받을래?”
“제가 받겠습니다.”
정요셉이 손을 들면서 가슴을 활짝 편 상태에서 이정진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요셉아, 오늘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악수를 청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이로써 알바가 끝났다. 그런데 PD가 오더니 우리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일당은 저한테 맡기셔야죠?”
“예? 왜 맡겨요?”
당황한 정요셉이 일당을 품에 꼭 안은 채 PD를 경계했다.
“진짜로 일당을 PD님한테 줘야 하는 거예요~?”
“주는 건 아니고, 맡기는 거죠.”
일당을 맡기라는 말에 화목현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처럼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일당 얼마나 받았는지 확인 좀 할게요.”
화목현이 일당이 얼마인지 확인하려고 하자 정요셉과 주이든이 소심하게 응원했다.
“역시 우리 리더~”
“멋지다, 우리 형!”
일당을 다 셌는지 화목현이 고개를 들었다.
“총 55만 원이네요.”
한 번 더 돈을 센 뒤에 화목현은 돈을 PD에게 건네주었다.
“이 돈은 공동 돈이기 때문에 이 카드에 집어넣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카드인데요?”
어떤 카드인가 했더니,
“내 카드인데?”
화목현의 카드였다.
“이거 PD님이랑 목현 형, 둘이 짜고 치는 판 아니야?”
“이든아.”
“장난이지~ 설마 그렇겠어.”
주이든은 어깨를 으쓱일 뿐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가 얼추 끝날 기미가 보이자 이정진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이거 받으렴.”
어머니가 우리에게 포장된 갈비를 주셨다.
“이거 안 주셔도 되는데!”
화목현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어머니가 웃었다.
“아니야, 받아. 어쩌다가 너튜브로 너희들이 갈비 먹는 모습을 봤거든.”
갈비 먹는 모습? 이정진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날인가?”
예전에 라이브 방송을 할 때 갈비를 구워서 팬들을 농락했던 날이 있었다. 그걸 보신 건가.
“이건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주는 선물이니까 괜찮지?”
“당연하죠! 맛있게 먹겠습니다!”
정요셉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정진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뭔가 아들이 네 명이나 더 생긴 기분이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정요셉이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야말로 어머니가 한 분 더 생긴 기분입니다.”
“하하! 고맙구나.”
이정진의 어머니가 정요셉의 등을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PD가 오더니 말했다.
“이제 이정진 씨 본가로 갑시다.”
본가로 간다고?
* * *
그렇게 우리는 이정진의 본가로 향했다.
“우리 때문에 부모님이 본가에서 안 주무시는 거 아니야?”
주이든이 미안하다는 듯이 이정진에게 말했다.
“자주 식당 2층에서 주무셔. 일이 늦게 끝나기도 하고, 아버지가 갈비 준비한다고 새벽에 일어나시거든.”
“와, 부지런하시다.”
“원래 자영업이 부지런해야 살아남아.”
“역시 갈비 수저.”
갈비 수저라는 말에 이정진이 크게 웃었다.
“갈비 수저라니.”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이정진이 말하자 주이든이 정색하며 말했다.
“정진 형, 갈비 수저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 어릴 때 치킨 수저 친구도 얼마나 부러웠는데!”
“이든이, 그랬어?”
주이든은 정말 부러운지 이정진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근데 형은 무려 갈비잖아.”
“…갈비가 맛있긴 하지.”
본가로 향하는데 24시간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형들, 편의점에서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 먹자고 하려는 찰나였다.
“안 됩니다.”
방송작가가 안 된다면서 나를 말렸다.
“예?”
방송작가가 단호하게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일당은 다른 곳에 써야 합니다.”
“왜, 왜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건 본가에 가시면 알게 됩니다.”
“아이스크림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거의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비굴하게 울상을 지었다.
“하나만, 아이스크림 하나만…….”
진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힘들어서 단 음식이 땡기는데. 내가 우울하게 있자 주이든이 나에게 사탕을 들이댔다.
“범나비, 사탕이라도 먹을래?”
“이든 형, 웬 사탕이에요?”
“정진이네 식당에서 훔쳤지.”
“역시 도둑.”
“뭔 도둑이야!”
카운터에 있는 사탕을 가져왔다면서 주이든이 나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 이건 괜찮은가?
“이건 먹어도 되죠?”
“그건 공짜니까 드셔도 됩니다.”
아니, 근데 이번 콘텐츠 주제가 힐링이라면서 왜 아이스크림 하나를 못 사게 하는 걸까. 도통 모르겠네.
나는 아이스크림이 더 먹고 싶지만 주이든의 사탕으로 만족했다. 입에 단 게 들어가니까 울적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본가 도착.”
“몇 층이에요?”
“1층.”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서 이정진 집의 문을 열자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뭐야?”
우리는 신발을 벗으면서 거실로 향했다. 벽면에 이정진의 사진이 가득해서 구경하고 싶었으나 PD가 입을 열었다.
“자, 네스트 여러분.”
우리는 일단 소파에 앉았다.
“일명.”
“…….”
“뭐든지 돈으로 합시다.”
뭐든지 돈으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우리에게 PD가 코팅된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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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시기 – 3,000원
TV 보기 – 3,000원
화장실 1시간 쓰기 –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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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비며 다시 메뉴판을 보는데 이게 맞나 싶었다. 그래서 방송작가가 편의점에 가려는 걸 막았던 거였나…….
“이제부터 네스트의 모든 행동은 돈으로 책정됩니다.”
돈으로 책정이 된다고요?
“뭐요?!”
주이든의 외침에 PD가 웃으면서 일어났다.
“자, 이제 제작진은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테이블에 퀘스트도 올려놨습니다.”
아니, 철수가 아니라.
“아니, 형!”
방송이고 나발이고 정요셉이 놀라서 PD를 형이라고 불러 버렸다. PD는 꿋꿋하게 우리 마이크를 떼기 시작했다.
“와, 힐링은 개뿔…….”
주이든의 말이 맞았다. 힐링이라고 했으면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잠깐만, 한 가지를 잊었다.
“그러면 PD님, 저 질문이 있어요.”
“뭔데요?”
PD가 현관문에서 나가려고 했으나 내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그럼 어떤 돈으로 차감이 되나요?”
그 질문에 PD가 정말 모르겠냐는 듯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설마 우리가 일하고 받은 돈으로?”
“잘 아시네요.”
“아니, 그건 아니죠!”
내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거 아시나요?”
“예?”
“소리 지르면 그것 또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아니!”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으나 PD는 자기 귀를 막으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이정진의 본가에 남은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잘까?”
일단은 자야지. 자고 나서 생각하자. 이정진을 따라가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려는데 얇은 종이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뭔가 했더니,
“와……! 이불 쓰는 것도 만 원을 지불해야 된대.”
이건 아니지. 그럼 어떻게 자요?
“얘들아,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따라서 소파에 앉아봐.”
일단은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화목현을 따라서 소파에 앉은 우리는 화목현이 말하는 대로 행동했다.
“아까 내가 일당이 얼마 있는지 확인했잖아.”
“55만 원 아니었어?”
“요셉이 말대로 55만 원이지.”
55만 원이라면… 아무리 우리가 망나니처럼 돌아다닌들 55만 원까지는 안 되지 않을까. 형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돈이 충분하긴 하네. 55만 원이면…….”
“하지만 55만 원이라고 해도 우리의 행동이 돈으로 책정되니까…….”
화목현과 이정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작정하고 적게 쓸 수는 없는 걸까?”
“없을 것 같아요.”
“나비야, 왜?”
왜냐, 제작진들이 메뉴판만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까 PD님이 퀘스트도 테이블에 놔뒀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맞네!”
주이든은 빨리 가져와 보라는 듯이 양손으로 손짓했다.
“제가 가져올게요.”
나는 테이블에 있는 퀘스트 종이를 가져와서 형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요.”
퀘스트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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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1. 주이든 부모님께 선물 드리기
2. 내일 자정까지 55만 원 넘기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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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든의 부모님? 주이든은 마치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부모님이라는 단어에 눈이 커졌다.
“아니, 우리 부모님 선물? 그건 내가 챙기면 되는 거 아니야?”
“이든아, 무슨 말 안 들었어?”
“어!”
주이든이 크게 대답하자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3,000원이 빠져나갔습니다.]
어? 지금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건가.
“왜 3천 원이 빠져나가?”
“아까 PD님이 그랬잖아요. 소리 질러도 빠져나간다고.”
“와! 이렇게까지 해?”
주이든이 크게 감탄하자.
[3,000원이 빠져나갔습니다.]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어디서 띵, 띵 하는 소리가 나지 않아?”
이정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정진의 방이었다.
“내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오래된 책상 위에 플라스틱 상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핸드폰이 하나 있었데,
“이거 목현이 핸드폰 아니야?”
이정진이 핸드폰을 꺼내서 화목현에게 줬다.
“내 핸드폰이 왜?”
화목현은 넋이 나간 듯이 핸드폰을 응시했다. 뭐길래 저래?
“목현 형, 왜 그래?”
“핸드폰의 용도는…….”
용도는?
“우리가 쓴 돈이 얼마인지 알아보는 용도인 것 같은데?”
…와, 투두 네스트 시즌 마무리라고 재미를 뽑아먹을 계획이구나.
“그러면 이불은 어떡해? 요셉이는 이불 없으면 못 자는데?”
“요셉아, 이건 이불이 문제가 아니야.”
이정진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는지 옷장을 열어서 뒤지기 시작했다.
“정진 형, 왜 그렇게 옷장을 뒤지고 있어?”
“이든아, 우리가 이불만 생각하고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어.”
“뭔데?”
“이불만 쓰는 게 아니잖아.”
“아.”
하긴, 잘 때는 이불만 쓰지 않는다.
확인해 보니 베개와 이불 매트에도 가격이 붙어 있었다. 정요셉이 카메라를 들고 오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막내, 네가 ‘나쁜’이라고 말하면.”
“예.”
“내가 ‘제작진’이라고 말할게.”
그 정도야. 정요셉의 눈짓에 내가 말했다.
“나쁜.”
그러자 정요셉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우리 막내, 제작진이 아무리 나빠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또 속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