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섬 예능 – 하루 이틀(5)
눈을 뜨자 화목현이 눈앞에 있었다.
“나비야, 안녕?”
화목현이 왜?
“이게 꿈인가.”
진짜 꿈인 것만 같았다.
“꿈이 아닌데?”
화목현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자기 전에 화목현과 전화를 해서 꿈에 나타난 것일까.
“다시 자야겠다.”
꿈이네. 어떻게 화목현이 이 섬에 와.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뭐야?”
정요셉이 인기척에 눈을 떴다.
“요셉아, 안녕.”
“…꿈이네.”
정요셉도 다시 눈을 감았다. 화목현이 여기 올 리가 없지. 지금 화목현은 숙소에 있을 텐데 말이다.
‘잠깐만…….’
그제야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 목현 형이에요?”
화목현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겠어?”
“형이 어떻게 왔어요?”
슬슬 형들도 눈가를 비비며 일어나 나와 화목현을 응시했다. 중간에 낀 주이든만 깨어나지 않는 상황.
“목현아,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아침에 배 타고 왔는데?”
“배를 타고?”
섬으로 출항하는 아침 배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오려고 했어요?”
“어제?”
“어제요?”
화목현이 자리를 잡으며 볼을 긁적였다.
“나비랑 통화하기 전에 임생운 PD님이랑 연락을 했었거든. 영상 통화 때문에.”
“아.”
“그런데 영상 통화를 하니까 너희들이 보고 싶더라고.”
묵묵히 흘러나오는 화목현의 목소리에 잠이 확 깼다. 정요셉이 스트레칭을 하더니 옆으로 누워 눈썹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아~ 우리 목현 형이 우리가 보고 싶었나 보네.”
“음?”
“안 그러면 오지도 않았을 거잖아. 우리 사랑이 너무 진득해서 미치겠어.”
정요셉의 말에도 화목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화목현이 그대로 인정했다.
“뭐야?”
“이든아, 일어났어?”
주이든은 화목현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왜 형이 있어?”
주이든은 화목현을 보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쳤다.
“…너희들이 보고 싶어서 왔어.”
“우리가?”
“응.”
“맨날 보는 사이인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왔을까!”
“보고 싶었지.”
“어?”
화목현이 바로 인정하자 주이든은 재미없다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럼 형도 같이 고추 따러 가는 거예요?”
“그렇겠지?”
이제 호감 쿠폰은 하나만 남은 시점. 이왕 이렇게 된 거 완벽하게 수행해야지. 모두가 잠에서 깼으니 텐트에서 나가서 임자유 할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할 때였다.
임생운 PD가 진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주이든 씨?”
“예?”
“그… 주이든 씨 담당 카메라 PD한테…….”
“아, 네.”
“일이 생겼거든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지.
“그래서 다른 스태프로 교체가 될 것 같아서요.”
주이든도 괜찮다는 듯이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누구로 교체가 되는데요?”
“잠깐만요.”
임생운 PD가 저 멀리에 있는 스태프에게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누군지 보자마자 헛기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박서진 스태프가 주이든 씨 카메라맨입니다.”
박서진 스태프. 어제 주이든을 욕하다가 들킨 사람이 아닌가. 화목현을 제외하고 남은 형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서진 씨, 잘 부탁드립니다.”
화목현이 박서진 스태프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야말로.”
박서진 스태프가 화목현의 손을 잡았다. 꺼림칙하지만 주이든도 대놓고 싫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박서진 스태프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텐트 안에 있는 이불이랑 베개 밖으로 빼고 텐트 정리하자.”
이정진이 이불을 개고 베개와 이불을 정요셉에게 건네주었다. 정요셉이 집 안에 베개와 이불을 넣을 동안 나랑 주이든, 그리고 화목현이 텐트를 분리했다.
일이 착착 진행되자 부엌에 있던 임자유 할머니가 나왔다.
“밥 먹어.”
임자유 할머니의 손짓에 우리는 부엌으로 들어갔고, 곧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차린 게 별로 없지?”
나는 한 상 차림을 보면서 임자유 할머니에게 말했다.
“반찬이 너무 많은데요?”
“내가 손이 좀 크거든.”
임자유 할머니는 자기 손을 보여주시더니 맛있게 먹으라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주셨다.
“어서 먹어. 어차피 많이 움직여야 하니까.”
그러면서 임자유 할머니는 먼저 밭에 가 있겠다며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화목현이 숟가락을 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밖에 나간 임자유 할머니에게도 들리도록.
* * *
밥을 다 먹은 우리는 설거지까지 해놓은 다음에 고추밭에 가기 위해 위로 올라갔다. 정말로 산 전체가 고추밭이었다.
“…와.”
저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근처에 있던 임자유 할머니가 하얀 목장갑과 포대 자루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고추를 딴 다음에 포대 자루에 넣으면 된다.”
“예!”
우렁찬 함성에 임자유 할머니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서 무슨 쿠폰? 그걸 받고 싶다면 포대 자루 두 개에 고추를 가득 담으면 된단다. 아, 그리고.”
임자유 할머니가 뒷짐을 진 상태에서 이어 말했다.
“그, PD가 너희한테 트럭을 보라고 하던데.”
트럭? 그때였다.
“저기 트럭!”
주이든의 외침에 우리는 고개를 돌려 트럭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작진이 트럭에 실려 있는 우리의 짐을 보여주었다.
“우리 짐!”
언제 우리 짐을 트럭에 옮겨둔 거지? 우리가 트럭에 다가가자 임생운 PD가 트럭에서 내려와 우리를 막았다.
“포대 자루 두 개를 채우지 못하면 저녁 배를 못 타게 됩니다.”
“예?”
이런 법이 어디에 있는가. 임생운 PD의 말에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때 임생운 PD가 외쳤다.
“시작!”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각자 알아서 밭에 들어가 고추를 땄다. 일단 화목현, 이정진, 주이든이 위쪽을 따고, 나랑 정요셉은 아래쪽을 따기로 정했다.
“이것도 가져가라.”
임자유 할머니가 우리에게 농사 방석을 건네주셨다. 고추를 앉아서 따려고 농사 방석을 가랑이 사이로 넣었는데.
이런, 농사 방석을 몸 앞으로 맸다.
형들이 볼까 싶어서 빨리 농사 방석을 벗으려는데 정요셉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아.’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흐흐흣!”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 정요셉이 배를 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요셉 형, 웃지 마시죠?”
“아! 웃겨~”
내가 봐도 웃기긴 했다. 다시 농사 방석을 몸 뒤로 맨 다음에 앉아서 고추를 따려고 했는데.
‘어떻게 따지?’
대충 따면 되려나. 내가 망설이고 있자 임자유 할머니가 다가왔다.
“어떻게 따는지 몰라?”
“어, 네.”
“쉬워.”
임자유 할머니가 고추 따는 방법을 직접 가르쳐 주었다.
“고추 꼭지까지 따지 말고 고추 꼭지 밑을 따면 좋아.”
“아.”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간단하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열심히 딸게요.”
빨리 포대 자루에 고추를 넣어야 오늘 저녁에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요셉 형, 우리 많이 따야 해요.”
“당연하지~”
“안 그러면 우리 섬에 갇혀요.”
갇힌다는 말에 정요셉의 손이 무척이나 빨라졌다. 고추 따는 속도 무슨 빛처럼 빠르다. 나는 게처럼 옆으로 이동하며 바구니에 고추를 넣었다.
“제가 포대 자루 가져올게요.”
“어.”
포대 자루를 가져오려고 일어서는데 사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박서진 스태프가 발이 꼬여 넘어지려는 찰나, 주이든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잡아주다가 두 사람이 같이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고추밭에 넘어져서 주이든은 엉망이 되었다.
‘이건 내가 나서면 안 되겠지.’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포대 자루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주이든과 박서진 스태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박서진 씨, 괜찮아요?”
주이든이 일어서면서 박서진 스태프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 괜찮습니다…….”
그런데 박서진 스태프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왜 그런지 보니까 넘어지면서 밭에 꽂는 꼬챙이에 팔을 부딪힌 모양이었다.
“카메라 못 들겠어요?”
“…아니요. 들 수 있습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면서 주이든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카메라 한 대 주세요. 제가 찍을게요.”
“예?”
“제가 찍을 동안 팔에 난 상처 확인하고 오세요.”
그러면서 주이든은 박서진 스태프의 카메라를 들고 고추를 따러 가버렸다. 박서진 스태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는 듯이 상처를 치료하러 떠났다.
‘…오.’
박서진 스태프의 얼굴을 보니 약간의 미안함이 엿보였다.
‘억까 영상은 안 나오겠군.’
주이든과 박서진 스태프의 사이가 조금은 풀어진 것 같았다.
“우리 막내, 언제 와~!”
멍하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정요셉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포대 자루를 들고 가자 정요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의심했다.
“잠깐 쉬다 왔지?”
“아닌데요?”
“우리 막내, 쉬다 왔네. 얼굴빛이 좋아 보여.”
“예?”
말이 되는 소리를. 다시 고추를 따려고 하는데 정요셉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왜요.”
고추 빨리 따야 한다니까. 내가 고개를 돌리자 정요셉이 고추 두 개를 눈썹 위에 올리며 화난 표정을 표현했다.
“요셉이 화났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위로 올라가 있던 고추 두 개를 내리면서 울상을 지었다.
“요셉이 운다.”
“…….”
“어때?”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러나 정요셉의 행동을 곱씹어보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웃으면 안 되는데. 이러면 정요셉이 좋아한단 말이지.
“어? 웃는다.”
웃는다는 소리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참나.’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정요셉을 노려보았다.
“…빨리 따죠?”
“어~”
* * *
섬에 배가 들어오기 30분 전에 포대 자루 두 개를 완성했다. 형들의 얼굴에 흙이 묻어 있긴 했지만.
“자.”
임자유 할머니가 화목현에게 호감 쿠폰을 건네셨다. 그러자 시스템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완벽하게 하루 이틀 촬영 끝내기! (3/3)】
“어제오늘 고맙구나.”
우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희야말로 밥도 해주시고, 잠도 재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주이든이 두 손으로 주먹을 쥐며 말했다.
“다음에 또 와. 그땐 더 재밌게 놀다 가고.”
“네!”
“빨리 가. 배 떠날라.”
배가 떠난다는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트럭에 실린 짐을 들고 허겁지겁 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으아아악!”
지나가는데 오지창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주셨다.
“잘 가.”
“할아버지도 잘 지내세요~”
정요셉이 양손을 흔들며 꾸벅 인사했다. 제일 처음에 만났던 한정숙 할머니도 손을 흔들어주셨다.
“다음에 또 와.”
나는 형들이 뛰어가는 틈을 타서 한정숙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언젠가 또 만나요. 그동안 잘 지내시고요.”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오라는 형들의 말에 나는 한정숙 할머니의 품에서 떨어졌다.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는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곧 출항한다는 선장의 말에 나는 더욱 빨리 뛰었다.
“나비야!”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스스로 올라탈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형들은 내 팔을 잡아당겨 주었다. 그렇게 배에 올라타자 배에 시동이 켜졌다. 이제 마지막 엔딩 촬영을 남겨둔 상황. 그때 박서진 스태프가 다가왔다.
“그…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