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섬 예능 - 하루 이틀(1)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인사를 대충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흠.’
하지만 주이든은 반응이 없었다. 스태프의 뒷담화를 직접 들었는데?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자기를 욕했던 스태프 옆에 다가가 친근하게 대했다.
“스태프분들, 과자 드세요.”
“어? 예?”
“아! 사양하지 말고. 우리 막내가 가져온 과자인데 많이 드시라고요.”
심지어 내가 가져온 과자를 스태프에게 퍼주고 있었다.
‘싸울 것 같았는데…….’
주이든은 싸움보다는 평화를 택한 모양이었다.
“우리 이든이, 많이 컸네.”
“…그러게요.”
신인일 땐 욕하는 소리가 들리면 주이든은 참지 않고 물었다.
‘왜 욕해요?’
이렇게 말이다.
그만큼 주이든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공포의 주둥아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눈치도 없었다. 그러니 주이든이 입을 다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주이든이 성장했다.
“형, 괜찮아요?”
괜찮냐는 물음에 주이든이 나에게 되물었다.
“뭐가 괜찮은데?”
“아니, 방금.”
“아, 욕?”
주이든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나도 컸어.”
“…예?”
“눈치 없이 다시 물어보고 그러지는 않아.”
하지만 그렇게 말한 주이든의 손가락은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는데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넘어가는 줄 알았더니.
“…형이 괜찮다면 다행이네요.”
주이든이 괜찮으면 다행이지. 섬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시스템창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문제 30, 완벽하게 하루 이틀 촬영 끝내기! (0/3)
페널티:주이든 억까 영상 100개
정답 풀이:랜덤 박스 1개」
‘…흠?’
하루 이틀 촬영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거네. 페널티가 주이든 억까 영상 100개라고?
주이든의 인성에 대한 건가. 일단 주이든의 상태에 대해 물어봐야 한다.
“형.”
“어, 왜?”
나는 주이든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지금 화가 많이 났죠?”
당연하다는 듯 주이든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어, 굉장히. 그런데 분노 조절을 잘하고 있어.”
게다가 주이든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화가 단단히 났군.
“…내가 왜 화가 났냐면.”
주이든은 주변 눈치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목현 형의 귀에 이 뒷담화 내용이 들어갔을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다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정요셉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든이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는 거네~?”
“물론이지.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해.”
안 하지 않나? 정요셉은 입술을 삐죽대며 말했다.
“나의 이든이 캐릭터 해석이 틀렸어.”
“뭔 캐릭터 해석까지!”
주이든이 주먹으로 정요셉의 팔뚝을 때렸다.
“그리고!”
무슨 중대한 사안을 말하는 것처럼 주이든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의 주둥아리로 네스트가 망하는 꼴은 못 봐.”
…허? 마치 ‘우리 이든이가 성장했어요’를 찍는 느낌이다.
“그 스태프분이랑 자주 마주칠 텐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범나비, 나는 말이야.”
주이든이 대뜸 나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세 번의 기회를 줘.”
세 번?
“한 번은 봐주고, 두 번도 봐주고. 그런데 세 번째에 선을 넘는다? 그러면 뒈지는 거지. 인간은 실수할 수 있어. 나도 실수하니까.”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를 준다고? 주이든은 씩 웃으면서 엄지를 접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한 번의 기회를 잃어버린 거지.”
주이든의 미소가 무섭게 느껴졌다.
“형. 사고 치면 안 돼요.”
“당연하지.”
“저희 목현 형 대신 온 거예요.”
“알아! 내가 바보 같아?”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형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슬쩍 눈동자를 굴려 뒷담화했던 스태프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을 못 믿어서.”
“…나는 믿는다는 거네?”
“우리가 함께한 지 얼마인데 형을 못 믿어요?”
누가 형들에게 욕하는 건 나도 싫으니까.
“이든 형은 날 못 믿어요?”
역으로 질문하자 주이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지.”
“아, 형!”
“그런데 범나비가 믿는다고 하니까.”
주이든은 바로 바닥에 누워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믿어야지.”
그러고는 주이든은 3초 만에 잠에 빠졌다.
“이든이가 저래도 속은 깊다니까~”
정요셉도 팔을 위로 들더니 잠을 청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이정진이 슬그머니 문을 닫고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뭐 하는지 들었어.”
“진짜요?”
몰래 스태프들의 대화를 듣고 온 이정진이 말해주었다.
“오늘 방송 컨셉이 섬 주민들에게서 호감 쿠폰을 받는 거래.”
“호감 쿠폰이요?”
“호감 쿠폰 세 개를 받으면 섬을 탈출할 수 있대.”
세 개를 못 받으면 탈출을 못 하는 건가.
“다른 것도 들었거든?”
이정진이 다가오라며 손짓하더니 속닥거렸다.
“…호감 쿠폰 세 개를 못 모으면 탈출은커녕 나가지도 못하고 3일 뒤에 간다는데?”
…3일 뒤?
* * *
섬에 도착하자 배에서 내려 주변 풍경을 살펴보았다. 높은 능선을 그리는 산은 없었지만 다채로운 주택 지붕이 눈에 띄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하루 이틀 임생운 PD의 목소리에 우리는 일렬로 서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카메라가 켜지자 임생운 PD가 우리에게 질문했다.
“먼저 그룹 소개부터 할까요?”
화목현이 없는데 누구부터 해야 할까.
“내가 할게.”
이정진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저희는 네스트라는 아이돌입니다. 쉽게 가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얘들아!”
그룹 소개가 끝나자 이정진이 우리에게 눈짓했다.
“하나둘 하면 알지?”
구호를 외치겠다는 이정진의 신호에 맞춰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둘!”
멤버들이 입을 열었다.
“ONLY ONE 네스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늘 하루! 화목현 씨를 대신해서 네스트 멤버들이 와주셨습니다! 하루 이틀에 오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이번 질문은 주이든이 맡았다.
“하루 이틀이라는 프로그램이 엄청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설마 화목현 씨에게?”
임생운 PD의 질문에 주이든이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요! 목현 형은 하루 이틀 촬영 갔다 오면 즐겁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요?”
“네!”
처음 듣는다는 듯이 임생운 PD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말은 우리한테 직접 해주지.”
“목현 형이 하루 이틀 제작진분들도 무척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나는 임생운 PD의 말에 거들어서 말했다.
‘진짜로 화목현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제작진들의 낯빛이 좋아진 걸 보니 말은 잘했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하루 이틀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네!”
철저하게 예습했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들어가든 예습은 필수.
“어떤 편을 제일 재밌게 보셨나요?”
“저는 멸치잡이!”
정요셉이 냉큼 손을 들어 답했다.
“다른 분들은?”
“저는 고추를 따다가 바닥에 넘어진 목현 형이 기억나요.”
주이든은 진지하게 말하며 넘어지는 시늉까지 했다.
“그 장면 너튜브에서 조회수 100만 회 돌파했잖아요?”
“나비 씨, 그것까지 아세요?”
“제가 하루 이틀에 욕심이 있거든요.”
임생운 PD가 웃음을 터트렸다.
“막내야, 정말이야?”
이정진은 진심인 줄 알았는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진심이죠.”
나는 진심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임생운 PD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하루 이틀의 규칙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임생운 PD가 ‘하루 이틀 일지’를 건네줬다. 하루 이틀 일지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일을 받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름 옆에 별이 그려져 있는데?
‘…설마 난이도는 아니겠지.’
…일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 섬에는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가시는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는데요? 그분들께 일거리를 받은 뒤 호감 쿠폰을 받으면 섬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아까 이정진이 들은 그대로였다.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질문을 받겠습니다.”
“저요~”
정요셉이 앞으로 나와서 공손하게 임생운 PD에게 질문했다.
“호감 쿠폰을 받지 못하면 일당이 없나요~?”
“예, 없습니다.”
임생운 PD의 답변을 들은 정요셉이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거, 힐링이 아닌데?”
“힐링은 맞아요.”
편집은 제대로 할 테니까. 고통은 우리들의 몫이고.
“그럼 섬마을의 지도를 보러 가볼까요?”
옆으로 이동하자 섬마을 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지를 펼쳐서 먼저 갈 집을 정하자고 말했다.
“여기 섬마을 지도를 보니까 한정숙 할머니 댁이 제일 가깝네! 여기로 가자!”
한정숙 할머니 댁은 별 두 개가 색칠되어 있었다.
“그런데 형들.”
“응?”
“이 별이요.”
나는 일지에 그려진 별을 형들에게 보여주었다.
“난이도는 아니겠죠? 게임에서 보면 난이도를 이렇게 표시하잖아요.”
형들은 내 말에 행동을 멈췄다.
“…나비의 말이 일리가 있는데?”
“정진 형, 그렇죠?”
“그렇다면 일거리가 많을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나……?”
“…한번 일해보면 알 것 같지 않아요?”
“그러네.”
일단은 한정숙 할머니 댁에서 일을 해보고 난이도를 살펴봐야겠다. 별 두 개인데 어려울 리는 없겠지.
섬마을 지도를 중심으로 위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니 한정숙 할머니 댁의 보라색 지붕이 보였다. 작은 주택 쪽으로 다가가자 한정숙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왔어?”
한정숙 할머니는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오셨다.
“안녕하세요!”
“오늘 일하러 온 청년들이지?”
“예!”
한정숙 할머니는 우리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정진이 종이와 펜을 받았다.
“여기 일은 쉬울 거야. 다른 곳은 빡세겠지만.”
“얼마나요?”
“그건 저놈들이 알려주지 말라고 하던데?”
저놈들은 제작진을 말하는 거였다.
‘철저하네…….’
일의 강도를 알고 싶은데 말이지.
“자, 이제 내가 부르는 대로 적으면 된다.”
“네.”
“부엌 전등 갈기, 닭들에게 모이 주기, 배에서 오는 짐들 옮기기, 슈퍼에서 물건 가져오기, 그리고.”
또 있다.
“내가 부르는 대로 편지를 대신 써주면 돼.”
일거리가 꽤 많았다. 왜 종이와 펜을 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와.”
빼곡하게 적은 글자를 보면서 형들은 눈을 껌뻑였다.
“일을 끝낸 다음 이걸 주면 된다고 하던데?”
한정숙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호감 쿠폰을 보면서 형들이 고개를 주억댔다.
“일을 빠릿빠릿하게 하면 좋은 걸 주마.”
“좋은 거요?”
주이든이 눈을 반짝였다.
“좋은 게 뭔데요?”
“일단 일을 끝내.”
한정숙 할머니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우리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일 두 개를 하죠.”
형들은 군말도 없이 손을 들었다.
“가위바위보!”
주이든이 운을 떼자마자 나 빼고 세 명이 가위를 냈다.
“어라.”
나는 보자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