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여행(3)
펜션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멤버들이 크래프트를 환영해 주었다.
“오~ 안녕하세요~ 크래프트 여러분~”
정요셉이 크래프트 멤버들을 한 명씩 안으면서 인사했다.
“학 형~ 이런 공간에서 보니까 색다르네~”
“어, 그러게… 색다르긴 하네.”
“그런데 왜 온 거야?”
“너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거든.”
“그게 왜 궁금한데?”
“너희들이 너무 멀끔하잖아.”
멀끔하다고? 뭐가 멀끔하다는 거지.
“씹고 뜯을 걸 찾는다는 거지.”
…그걸 찾고 싶어서 왔다고? 홍학이 여기로 온 이유가 따로 있었군. 정요셉은 기겁하며 홍학의 어깨를 때렸다.
“이 형은 맨날 이래.”
“뭐가?”
“그냥 놀러 왔다고 그래.”
정요셉이 우리를 보면서 홍학의 말투를 해명했다.
“학 형이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거든. 그래서 가끔씩 저런 말투가 톡톡 튀어나오고는 해~”
“내가 언제.”
“형은 원래 그렇잖아.”
펜션 안으로 들어가자 화목현이 일어서더니 자리에 앉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 뭐 하나. 정요셉을 제외하면 나머지 멤버들은 낯을 아주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크래프트가 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잘 풀기 위해서인지 정요셉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 어색한 분위기도 풀 겸~ 서로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볼까?”
그러더니 정요셉은 노래방 기계 마이크를 가져와 입을 열었다.
“자, 누구부터 불러볼까요?”
“저요.”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는다. 박채민도 정요셉과 비슷한 부류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정요셉이 자연스럽게 박채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부터 베스트 프렌드였다고?
“우리 채민이,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안녕하세요. 박채민이라고 합니다.”
“채민이라고 불러도 되지?”
박채민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한 살 어려서 괜찮습니다.”
“그럼 요셉 형이라고 불러.”
낯을 안 가리니까… 어떤 사람이든 친하게 지내는구나. 신기한 생명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 저는 이 자리에 나온 계기가 있습니다.”
“뭔데?”
박채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왜 나를 쳐다봐?’
나는 와락 인상을 구기면서 박채민의 시선을 받아쳤다.
“저는 앞으로 범나비 씨랑 좀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우리 막내랑 왜?”
“범나비 씨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기도 하고, 지금이 기회 같아서요”
나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고?
“그래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 우리 막내랑 대화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딱히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제가 싫다면요……?”
“그건 상관이 없는데요.”
“왜 상관이 없어요?”
그러자 정요셉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이 대화는 나중에 둘이 따로 할까요?”
정요셉은 말리지도 않고 화목현이 있는 데로 도망가 버렸다. 그대로 마이크를 내려놓은 박채민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뭘 묻고 싶은데요?”
나는 박채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얼굴 없는 가수엔 왜 나갔어요?”
“…예? 나갈 수도 있죠.”
“뭐랄까… 범나비 씨는 은둔 고수처럼 있을 줄 알았거든요.”
은둔 고수? 내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박채민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해 못 한 나를 보며 박채민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이돌들 사이에서 범나비 씨 노래 잘하는 건 소문이 났거든요.”
“…그런 소문이 났다고요?”
“예, 몰랐어요?”
“그런 소문이 제 귀에 들어온 적은 없는데요.”
박채민은 손을 휘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런 소문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ᄋᆞᆫ 노래 예능이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얼굴 없는 가수에서 노래를 부르니까.”
“…아하.”
“열등감이 생기더라고요.”
…열등감까지 생겨? 이건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왜 열등감이 생겼어요?”
“…그걸 꼭 물어봐야지 알아요?”
“예.”
도대체 열등감이 생기는 이유가…….
“노래를 너무 잘 부르잖아요.”
어?
“…감사합니다?”
그러자 박채민이 부끄럽다는 듯이 입에 김밥을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얼굴 없는 가수에 나가려고 했는데… 범나비 씨가 아이돌의 이미지를 올려놔서 못 나가겠더라고요.”
“아이돌의 이미지요?”
“아이돌도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미지요.”
그 정도야?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박채민 씨는 자신감이 없네요.”
“어?”
“저는 그래도 나갔을 것 같은데요.”
“…왜?”
“제가 잘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내가 잘하면 그만이잖아. 뭐가 힘들다는 거지.
“와, 어이없어.”
나도 어이가 없다. 박채민도 그 정도면 노래를 잘하는 편 아닌가. 나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에 못 나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나한테 조언도 해줬잖아요.”
“제가요?”
“돌연프 때 기억 안 나요……?”
“어, 예?”
“저한테 그랬잖아요.”
나는 힐끗 이남주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남주랑 같이 있지 말라고?”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박채민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기억 안 나요? 저한테 앞담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이윤도는 눈만 껌뻑였다. 나는 이윤도의 귀를 살짝 막으며 박채민을 째려보았다.
“아… 그건!”
그 심정도 이해가 간다. 당시 이남주의 평판이 좋지 않았으니까 나에게 조언을 한 거겠지.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지금은? 뭐가 다릅니까?”
내가 기분 나쁜 투로 말하자 박채민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날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해요.”
“사과는 저한테 하지 말고.”
나는 저 멀리 우리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남주를 쳐다보았다.
“남주 형한테 말하세요, 직접.”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면 무엇 하나.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계속 생각을 해봤거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박채민 씨가 나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에 못 나가겠다는 말은 좀 어이가 없어서.”
“…….”
“그동안 노래 잘 부른다고 느꼈는데, 아니었나요?”
“…….”
“제 핑계는 그만 대시죠?”
박채민이 고개를 숙인 채로 양손을 들어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범나비 씨 문제가 아니긴 한데…….”
“그러면 됐어요. 당신의 문제에 제 핑계는 대지 말란 겁니다.”
자신의 문제를 알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채민이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남주랑 친구인 이유를 알겠네.”
‘왜 친구인데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박채민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반말해도 되지?”
“네, 반말하셔도 돼요.”
“우리 남주, 잘 부탁한다.”
박채민은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른 멤버가 있는 데로 가버렸다. 옆에서 계속 듣고만 있던 이윤도가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우리 채민 형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이윤도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상체를 한껏 수그렸다.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계속 남 탓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은 거지.”
“그, 그랬어요? 다행이다!”
방방 뛰는 이윤도를 보면서 씩 웃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잘 지냈어?”
“…어, 네! 저도 형 무대를 잘 봤어요!”
“그래? 어땠어?”
이윤도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일단 나비 형의 당당한 태도가 좋았습니다.”
“내가 당당했어?”
“아주 당당했죠! 저였으면 엄청 긴장했을 텐데. 형은 잘 받아쳤잖아요!”
“또?”
나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노래 실력이 탁월했습니다.”
“탁월했다?”
“진짜 반했거든요!”
반, 반했어?
“남자가 봐도 멋있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윤도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홍학이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요리 실력이 꽝이라서 밥을 먹으려고 나왔다가 우연히 정진이랑 나비를 만나서 여기로 오게 되었네요.”
우리가 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자, 이제 술부터 깝시다.”
홍학이 소주를 들고 손목에 스냅을 주었다. 그러자 소주병 안에서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잠깐!”
그때 정요셉이 손을 들었다.
“우리 아이돌이니까, 다 같이 핸드폰은 끄자.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정요셉의 말에 크래프트 멤버들도 수긍했다.
“정요셉, 대단한데.”
“내가 좀.”
다시 소주를 흔들어서 깐 홍학은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소주 오랜만에 마시네…….”
“…학 형? 괜찮은 거예요?”
“어, 괜찮겠지.”
이윤도가 말리는 것처럼 굴었지만 홍학의 눈빛을 보니 이미 맛이 가 있었다.
“오늘 죽어보자!”
…원래 저런 사람이 제일 빨리 가지 않나?
* * *
내가 예상했던 대로 홍학은 1시간도 안 돼서 끝났다. 죽어보자더니 제일 먼저 바닥에 뻗은 채로 자고 있다.
“죄송합니다. 우리 학 형이 술을 잘 못 마셔요.”
“…그렇게 보인다.”
소주 한 병을 마신 우리 멤버들과 달리 홍학의 주량은 소주 한 잔이었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자고 하다니…….
이남주가 내 잔에 물을 따라주면서 물었다.
“나비는 안 마셔요?”
“뭐…….”
소주를 받긴 했으나 마시기는 싫었다.
“소주는 쓰잖아요.”
“…흐음.”
“소주는 별로 안 좋아해요. 목이 상하면 안 되니까.”
“철저하게 관리하겠다?”
“그것도 있고. 술로 인생 말아먹기는 싫어서요.”
술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잃는 게 싫다는 뜻이다.
“근데 둘이 왜 존댓말로 대화해?”
주이든은 입에 밥을 한가득 욱여넣으며 물었다.
“아, 나비랑 저요?”
“그래, 둘이 친구라면서 대화는 존댓말로 하길래. 왠지 신기해서!”
이남주와는 반말보다 존댓말이 편했다. 그런데 존댓말은 멤버들한테도 하는데?
“형들한테도 하잖아요.”
“그야 우리는 형이잖아?”
그게 무슨 논리야.
“저는 존댓말이 편해서요.”
“그래? 별거 없잖아? 흥미 잃었어!”
점심시간에 먹고 남은 닭볶음탕에 빠진 주이든을 보다가 이남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반말해도 돼요?”
그때 이남주가 물었다.
“진작부터 해도 됐잖아요?”
“…그거야.”
반말해도 되는데 이남주가 안 하는 거 아니었나? 이남주는 남들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할 때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저보다 형이잖아요?”
“…음?”
“회귀를 많이 했으니까?”
‘회귀’라는 단어가 이남주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물을 뿜을 뻔했다.
“어쩌면 100살 정도일 수도?”
“…100살.”
100살뿐이랴.
“1000살일 수도.”
“…그건 거의 드래곤인데요?”
순수하게 묻는 질문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 불바다로 만들어요?”
“…이야, 진짜인가 보네.”
진짜는 무슨 진짜야… 물을 마시려는 찰나 심장이 또 뻐근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피곤해서 그런가.
“왜 인상을 써요?”
“…심장이 좀 아파서.”
“심장?”
심장이 다시 아파와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남주 형이 술을 깨고 싶다고 해서,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게요.”
“그래, 너무 멀리 가지 말고.”
화목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리둥절한 상태인 이남주를 데리고 펜션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이남주에게 내 재킷을 건네주었다.
“왜 밖에 나왔어요?”
“…심장이 또 아파서.”
“심장이 왜? 설마 아이돌 노트가 그래요?”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아픈 거 같아요.”
왜 아프지?
“…최근에 시스템창이 저보고 빨간색 노트를 확인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요?”
“그래서 빨간색 노트를 확인했더니 모서리에 아이돌 노트를 조심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어요”
그 후로 심장이 조금씩 뻐근하기 시작했다.
“사람 속을 뒤집으려는 목적인지…….”
“조심하라는 뜻은 믿지 말라는 뜻 아닐까요?”
“글쎄. 그랬다면…….”
이남주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서 말해주었다.
“아이돌 노트의 문제를 안 맞혀보는 건 어때요”
시스템창이 떠올라도 문제를 안 맞힌다?
“그러다가 페널티가…….”
“페널티가 작은 걸 안 맞히면 되죠.”
아이돌 노트의 진행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돌 노트를 거스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이돌 노트를 만들었는데요?”
“어쩌면 아이돌 노트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한번 그렇게 해볼게요.”
한 번 정도의 반항은 괜찮겠지.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있으면 연락해요.”
“…….”
“우리 둘밖에 모르잖아요.”
“…….”
“이제 들어갈까요?”
저 멀리 펜션으로 들어가는 이남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쩌면 친하게 지낼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신기하네.’
이남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는데, 유리 벽에 붙어서 나를 쳐다보는 멤버들이 보였다.
“…뭐야?”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유리 벽에 붙은 멤버들에게 다가가다 걸음을 멈췄다. 몽롱한 눈빛부터 시작해서 정신을 놓았는지 다들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 즉, 술에 떡이 됐다는 거다. 좀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겁했다.
“…들어가기 싫다.”
차라리 밖에서 자는 게 나을 수도 있겠는데?
“범나비!”
주이든의 외침에 화목현이 큰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나비야~ 들어와! 그러다가 어? 감기에 걸려서 고열에 시달리지 말고! 어? 우리가 지금 일주일이라는 휴식 시간이 있지만…….”
아… 머리가 아프다.
“범나비! 범나비! 범나비!”
아예 정요셉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나를 불렀다.
“우리 얼굴 없는 가수 조회수 1위! 멋있다!”
주이든의 말에 박채민과 이윤도가 박수로 호응했다. 쪽팔려 뒈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