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그놈의 돌연프
혹시 모르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가방을 들었다.
‘필요할 수도 있잖아.’
내가 가방을 메자 정요셉이 가방을 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막내, 또 가방을 들고 가려고?”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어, 그래서 가져간다고?”
“왜요?”
“아니, 아니야. 우리 막내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멤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들도 가려고요?”
이정진이 끄덕였다.
“막내가 가는데 같이 가야지.”
내가 가방을 가지고 나올 때 멤버들도 갈 준비를 끝냈다.
“우리 아침마다 이렇게 준비하면 좋겠다.”
화목현의 말에 멤버들이 헛기침을 뱉었다. 아침마다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준비를 하지만, 아파트에서 나가는 시간은 현저하게 느렸다.
“얘들아, 준비 끝냈지?”
현관문 앞에서 화목현이 오른팔을 위로 들었다.
“가자! 싸우러.”
…아니, 우리 싸우러 가는 건 아닌데.
* * *
AA 엔터에 도착하자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연호를 발견했다. 곧장 김연호가 있는 데로 가는 도중 정요셉이 김연호를 불렀다.
“우리 연호 형~!”
정요셉의 부름에 고개를 뒤로 돌린 김연호가 우리를 발견하더니 눈이 커졌다.
“얘들아? 무슨 일로 회사에 온 거야.”
“저희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이든이 과감하게 우리가 회사에 온 목적을 밝혔다.
“이든아, 어떤 소식?”
“다른 회사 인수한다면서?”
김연호는 우리에게 역으로 물어보았다.
“그걸 어디서 들었어?”
주이든이 주먹을 쥐며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내가 볼일이 있어서 회사에 왔다가 고예찬을 만났거든.”
“아…….”
그제야 김연호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호 형! 고예찬은 어디에 있어?”
“예찬이는 아마… 위층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가 곧장 올라가려고 하자 김연호가 우리를 말렸다.
“얘들아, 왜 가는 거야?”
왜 가는지 말하면 김연호가 필시 가지 말라고 할 텐데. 화목현이 나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나를 보면 답이 나오나?
“…예찬이가 나비 친구예요.”
정말 답이 나왔네. 정말이냐는 듯이 김연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저 예찬이 친구 맞아요.”
“…정말 그렇다는 거지? 무슨 해코지하려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에요. 그럴 일은 없어요.”
그냥 물어보러 가는 거지.
‘이게 해코지인가?’
우리는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김연호의 경계를 풀었다.
“연호 형, 나중에 봐요.”
아무튼 우리는 서둘러 김연호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야, 목현 형! 어떻게 그런 답변이 나온 거야? 역시 순발력 하나는 끝내줘.”
“내가 한 순발력 하잖아?”
“그렇지!”
멤버들의 대화를 들으며 위층으로 올라가자 저 멀리에서 안경 쓴 고예찬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탐색하는 모습을 보니 엔터를 구경하는 모양이다.
“고예찬~”
정요셉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어! 어!”
고예찬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어! 어!”
얼마나 놀랐으면 저렇게 말을 잇지 못할까. 일단 정요셉이 고예찬에게 접근했다.
“예찬이, 우리랑 같은 회사 식구네~”
“어, 네!”
긴장이 빡 들어간 고예찬은 침을 삼켰다.
“예찬아, 끝에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예! 선배님!”
“더 크게~!”
“예!”
고예찬의 긴장을 풀려는 목적인지 정요셉이 장난을 걸었다. 그럴수록 고예찬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뒤늦게 내 눈과 고예찬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고예찬, 오랜만.”
“어! 나비야! 어떻게 온 거야.”
“이제 예찬이가 우리 후배라는 소리를 들어서.”
“진, 진짜?”
“응, 그래서 진짜인지 알고 싶… 어?”
그러자 고예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예찬아, 왜 울어?”
“나비가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로 데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긴 우리가 데뷔하고 있는 동안 아직도 데뷔를 못 했다니. 정말 세상은 불공평하다.
“…울, 울면 안 되는데. 널 보니까.”
고예찬의 눈물에 멤버들이 나를 주목했다.
“제가 안 울렸는데요?”
“우리 막내, 무서운 사람이었네.”
“제가 무섭긴요, 요셉 형.”
우리는 울먹거리는 고예찬을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거기가 사람이 제일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고예찬에게 건네주었다.
“…예찬아, 여기 휴지.”
“고마워, 나비야…….”
고예찬은 눈물 콧물을 닦자 좀 진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운 이유는…….”
“…….”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거든.”
“…….”
“근데 아이돌로 데뷔할 수 있다니까…….”
또다시 눈물이 나오는지 고예찬은 고개를 떨궜다.
“2년 동안 데뷔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계속 무산이 됐거든… 크흡!”
코를 푸는 고예찬은 자신의 마음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 돌연프 개인 연습생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우승조에 들어가면 QTQ 방송국에서 데뷔시켜 준다고 그랬거든.”
그런데 데뷔는 안 시켜줬군.
“그것만 믿고 악바리 근성으로 돌연프에서 살아남았는데…….”
고예찬이 휴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가 우승조에 올라가고 끝났잖아. 그리고 QTQ 방송국에서 정말로 BEC라는 회사를 세웠더라고. 조금만 기다리면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돌 데뷔를 할 줄 알았어.”
“…….”
“근데 BEC에서는 1년 동안 돌연프에 나왔던 곡으로 행사만 돌렸어. 행사란 행사는 다 뛰었는데 우리는 돈도 못 받고…….”
그냥 행사만 뛰게 되었구나.
“그룹명도 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 멤버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어.”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고예찬이 설명을 보충했다.
“…나만 계속 BEC랑 계약을 유지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엔터로 갔어.”
“다른 엔터로?”
“…으응.”
고예찬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기존 멤버들에게 미안해서 어떡하지.”
“왜 미안한데?”
“내게 리더의 자질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게 된 거잖아.”
“네가 기존 멤버들을 잡고 휘둘렀어, 계약 해지하라고 했어? 뭐가 미안해?”
그들의 선택인걸. 고예찬이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라고?”
“너는 멤버들의 선택을 존중해 준 거잖아.”
“…그런가.”
“그러니까 이제 그런 태도는 보이지 마. 그냥 돌연프 시즌 2에 들어가서 잘하면 돼. 너도 살아야지.”
하지만 고예찬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닌 모양이다. 고예찬이 우리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도 돌연프 시즌 2에 나온대.”
순간 놀라서 기침을 여러 번 했다. 나랑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겠는데?
“…그래서 무서워.”
“뭐가 무서운데?”
“멤버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서…….”
멤버들의 흔적을 찾는 고예찬의 모습이 꼭 키오 시절의 나처럼 느껴졌다. 멤버들의 흔적과 좋은 추억이 남은 공간을 벗어날 수 없던 나.
“…예찬아, 멤버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편이 좋을 거야.”
“어?”
“주변에서도 뭐라고 안 할 거야. 그들의 선택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
“물론 욕은 조금 먹겠지만.”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내가 먼저 정적인 분위기를 깨트렸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저는 커피라도 사서 올게요.”
“오~ 역시 우리 막내~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다른 형들은요?”
멤버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했고,
“너는?”
“나, 나도 사주는 거야? 나는… 녹차라떼.”
“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어? 나는 녹차라떼가 먹…….”
정요셉이 고예찬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우리 예찬이, 정말 눈치가 없네~”
“읍!”
고예찬은 입이 막혀도 자기 할 말을 뱉었다.
“녹차라떼!”
이렇게 말이다. 나는 꼼꼼하게 핸드폰에 메모를 하며 밖으로 나왔다. 회사 옆에 카페가 새로 생겼다는데 거기로 가볼까?
“어? 나비야!”
커피를 사러 가는데 예전 팀장님을 만났다.
“팀장님.”
예전 팀장님만 만나면 다행인데.
“안녕하세요, 선배님.”
후배로 추정되는 여자분들이 나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전 팀장님이 나에게 후배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번에 AA 엔터로 들어온 여자 연습생 강해라.”
강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강해라입니다, 선배님.”
강해라는 무심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저는 네스트의 범나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네.”
일반적인 아이돌 선후배 간의 대화였다.
“둘의 대화는 이게 끝이니?”
“더 할 말이 있을까요?”
팀장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랑 강해라를 번갈아 보았다. 강해라의 혀를 차는 소리에 그제야 강해라가 누군지 떠올렸다.
‘베뉴스’로 데뷔하자마자 괴물 신인으로 떠오른 걸 그룹 멤버였다. 거기에 강해라는 막내였고. 이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팀장님은 다시 회사로 돌아오셨네요.”
“너희들은 잘하고 있다며? 그리고 새로운 팀장도 왔고.”
새로운 팀장님을 아시나?
“어떤 분인지 아세요?”
“…어? 좋은 분이라는 사실만 알지.”
“원래 있던 팀장님도 좋은 분이긴 했는데.”
팀장님은 부끄럽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럼 팀장님, 저는 가볼게요.”
“어, 그래. 가봐.”
강해라에게도 인사를 하면서 카페로 향했다.
‘이러다 늦겠다.’
* * *
강해라는 저 멀리 유유히 걸어가는 범나비의 뒷모습을 보았다. 네스트의 막내 범나비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일단 독하다.
노래를 잘 부른다.
잘생겼다.
그리고 입이 거칠다.
강해라는 팀장을 보면서 범나비에 대해 물었다.
“팀장님, 원래 선배님은 어떤 분이세요?”
“어, 나비는… 독하지.”
“얼마나 독해요?”
그가 아직도 기억하는 범나비의 모습이 있었다.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직전에 안무랑 노래를 외워야 했거든.”
“아, 5일 동안요?”
“어, 그때 대단했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물로 대충 때웠지.”
“진짜 독하네요…….”
“나비는 거의 연습실에서 살았어. 그 후로 돌연프에서 춤을 춘 거야.”
강해라는 그저 미쳤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멋져 보였다.
“저도 저렇게 살아야겠네요.”
“해라야?”
“저도 막내잖아요.”
“어……?”
“저도 범나비 선배처럼 언니들을 이끌어야죠.”
독기. 그거 하나는 닮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건 닮지 않아도…….”
“뭐, 어때요.”
순간 팀장의 눈에 강해라의 눈빛은 마치 범나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다짐했다. 강해라랑 범나비를 다시 만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 * *
어쩐지 귀가 간지러웠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기사를 확인했는데,
[AA 엔터,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새로운 회사명 ‘더블에이’로 공식 발표]
‘언제 우리 회사명이 바뀌었지?’
그뿐이랴.
[더블에이,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시즌 2 준비]
[곧 새로운 보이 그룹과 걸 그룹을 선보인다는 더블에이]
벌써 기사가 나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