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지극정성
정말 약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범나비! 피곤하면 소파에 앉아!”
“…예.”
하지만 피곤해서 왜 잘해주는 건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TV를 쳐다보는데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거기에다가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피곤해.’
피곤해서 모든 행동이 귀찮다는 거였다.
‘…하기 싫네.’
오늘 연습실에 가서 안무도 맞춰봐야 하는데… 피곤에 잠식된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비야,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잠깐만.”
화목현이 체온계를 가져오더니 내 귀에 꽂아서 온도를 쟀다. 삑, 소리와 함께 체온을 확인한 화목현의 미간이 찌푸렸다.
“…37.5도.”
37.5도라고? 왠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더라.
“몸이 안 좋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올라간 줄 몰랐어?”
“네… 가벼운 몸살감기라고 생각했어요.”
“기다려.”
화목현이 기다리라고 하더니 부엌에서 비닐봉지에 얼음을 넣고 수건으로 감싸서 가져왔다.
“나비야, 이걸 머리 위에 올려놓자. 열이 많이 나면 식히는 게 중요해.”
“…감사해요.”
이마에 비닐봉지를 올리자마자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낮아집니다. (60%)】
열을 식히니까 20%나 줄었네. 소파에서 버티고 있는데 문득 정요셉이 떠올랐다.
‘잠깐만, 내가 아픈 건 괜찮은데…….’
내 룸메이트가 정요셉이다. 아직 정요셉의 드라마 촬영이 안 끝났잖아. 자칫 잘못하다가 정요셉한테 몸살감기를 옮길 수도 있었다.
“저, 목현 형…….”
“왜.”
“감기인 것 같은데 저 형이랑 침대 바꿔도 될까요? 제 감기가 요셉 형한테 옮을까 싶어서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럴래?”
멤버들한테도 옮길 것 같아서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내가 마스크를 끼자 주이든이 게임을 하다가 인상을 썼다.
“야, 범나비.”
“왜요…….”
“진짜 많이 아프냐?”
“…예.”
“조금 떨어져도 되냐.”
어제였다면 주이든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을 텐데.
“형…….”
“왜.”
“귀찮아요. 말 시키지 마세요.”
나는 주이든에게 말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랬더니 주이든이 진지하게 물었다.
“오늘 오후에 라디오 방송이 있는데 못 가는 거 아니야?”
“…그럴 것 같아요.”
“투두 네스트 PD님이 저녁에 보자고 하셨는데.”
아… 맞다. 다음 촬영 기획을 알려준다고 하셨지.
“…어쩔 수 없죠.”
이 상태로 라디오 방송을 하다가는 큰 사고가 일어날 것 같았다. 이정진이 미리 김연호에게 알린다면서 전화를 했다.
“네, 연호 형. 막내가 너무 아파서 오후에 있는 라디오 방송은 못 할 것 같아서요. 투두 네스트 제작진분들한테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 네. 네.”
옆에서 들려오는 이정진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포근해서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런 나를 보면서 주이든은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야, 범나비. 너 진짜 괜찮아?”
“…죽을 것 같진 않아요.”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화목현이 침구 정리를 끝내자 나랑 침대를 바꾸자고 말했다.
“나비야, 소파에 있지 말고 침대에 누워.”
“…감사합니다.”
“전기장판도 올려놨어. 더우면 끄면 돼.”
화목현의 배려로 거실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뜨끈하게 몸을 지졌다. 그러자 피로도가 낮아졌다는 시스템창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낮아집니다. (40%)】
어느새 지끈거리던 두통도 사라졌다. 이제 감기약을 먹고 자면 될 것 같은데,
“이든 형?”
왜 주이든이 침대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거지.
“너 괜찮지?”
“괜찮아요. 오늘 하루 푹 자면 될 것 같은데요.”
“진짜로?”
“예,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다. 내 단호한 말에 주이든은 부엌으로 뛰어가더니 나한테 감기약을 줬다. 왜 이렇게 잘해줘?
“여기 감기약.”
“…종합 감기약이에요?”
“어, 종합 감기약.”
나는 상체를 일으켜 종합 감기약을 먹은 뒤에 다시 누웠다.
“범나비, 너 아프지 마라.”
“…왜요?”
“아프니까… 약간 까칠해.”
“예민해져서 그래요.”
“…그냥 내가 싫어서 까칠한 건 아니지.”
“잘 아네요.”
“야!”
“하하.”
주이든의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진짜 아픈가 본데?”
“하하.”
문득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중 주이든이 아프지 말라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실실 웃자 주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예전 생각이 나서요.”
“무슨 생각.”
“돌연프 때 이든 형이 저 아프지 말라고 이불 산처럼 쌓아줬잖아요.”
“아, 그때.”
주이든도 기억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어린데 아프다고 하니 걱정이 되니까.”
“왜 걱정했어요?”
“사람이 아픈데 당연히 걱정하지, 안 해?”
“그땐 형이랑 저 친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래도 걱정했거든!”
마음은 아플 때 꼬이기 쉽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때 주이든의 손바닥이 내 이마를 찰싹 때리고 떨어졌다. 찰진 주이든의 손바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어안이 벙벙했다.
“나쁜 생각 하는 거 같길래.”
“…그냥 때리고 싶었죠?”
“그것도 맞아.”
내가 이불 속에 고이 감췄던 팔을 꺼내 주이든을 잡으려고 휘저었다. 휘저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로 끝나기는 했지만.
“나비야.”
그때 부엌에 있던 화목현과 이정진이 내 앞에 왔다.
“…네?”
“죽 끓여놨으니까 배고프면 죽 먹고.”
“어, 감사해요…….”
“감사하긴. 너도 우리 아플 때 해줬잖아.”
화목현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내 이마에 손을 댔다.
“아직도 펄펄 끓네. 너무 심하면 연호 형한테 전화해.”
“…예.”
“안 아프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옆에서 이정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지극정성이에요?”
내 질문에 이정진이 답했다.
“너도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잖아.”
“…….”
내가 그랬다고… 화목현은 나를 보며 당부했다.
“우리가 올 때까지 푹 자.”
감기약이 점점 약효를 내는지 눈이 감겼다.
“네, 잘 거예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면서 배웅도 못 하고 잠들어 버렸다.
‘…좀 자는 것도 좋겠지.’
* * *
잠에서 깨 눈을 뜨자 컴컴한 거실이 나를 반겼다. 귓가가 조용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지금 몇 시지.”
종합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지 몸이 가뿐했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낮아집니다. (30%)】
역시나 피로도가 낮아졌네. 협탁 위에 있는 핸드폰을 켰더니 벌써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 6시네.”
배고프다.
아까 화목현과 이정진이 만든 죽이 있다고 했지. 상체를 일으키고 부엌에 갔더니 비닐로 꽁꽁 싸인 죽 그릇이 보였다.
《나비야, 죽 꼭 먹어.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리면 될 거야. –목현-》
비닐을 벗겨 전자레인지에 죽을 돌렸다. 다시 식탁 의자에 앉으면서 쪽지를 쳐다보았다.
“…신기하네.”
내가 이렇게 챙김을 받은 적은 드물다. 아니, 일부러 챙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인지 화목현과 이정진이 만든 죽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울렁거리는 속을 차가운 생수로 가라앉힌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컴컴한 집 안에서는 오로지 전자레인지만 빛났다.
“조용하다.”
원래는 시끄러운 공간보다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공간을 선호했었다. 그랬는데 말이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 사무치도록 외롭게 느껴졌다.
키오 시절에는 죽 같은 걸 만들어주는 사람도,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
언제나 내가 희생하는 포지션이었으니까.
띵.
전자레인지가 다 돌아갔나 보다.
“어.”
전자레인지가 완전히 돌아가고 데워진 죽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숟가락을 꺼내서 죽을 입에 넣었는데,
“…짜.”
짜다… 이건 너무 짠데? 하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다 먹어야 하는데.
‘이러다가 내가 소금이 되겠네.’
하지만 슬쩍 튀어나오는 웃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낮아집니다. (20%)】
죽을 먹으니 확연하게 피로도가 낮아졌다. 죽을 다 먹은 뒤에 설거지까지 해놓고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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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라디오 방송 오늘 나비 불참ㅠ
어제 포카 나눠주다가 코피 터졌다는 후기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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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이 나비 없으니까 썰렁하다고 하더라
└빈자리가 크긴 했어 라이브하는데
-범나비 라이브하기 싫어서 라디오 방송 안 간 거 아니고?ㅋㅋ
└응 아니야 아프대
└꾀병 같은데?ㅋㅋ
-라이브 무서워서 라디오 방송 안 했다는 건 진짜 나비를 몰라서 하는 말
└ㅇㅈ
└ㅋㅋㅋㅋㄹㅇ
└댓글 다 받음
라디오 방송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보컬 예능이 있으면 출연해야겠네. 립싱크라는 오명을 벗을 필요성을 느꼈다.
(정요셉) (ノ・∀・)ノ우리 막내 일어났어?
(주이든) 우웩
(정요셉) 힝ㅠ
(이정진) 일어나지 않았을까
(화목현) 나비야 일어나면 죽 먹어 약도 먹고
(주이든) 범나비! 약 안 먹으면 또 때리러 간다?
(정요셉) ✧\(>o<)ノ✧ 요셉이 무서워
(주이든) 욕 쓸 뻔…
(화목현) 욕 안 돼 습관 된다.
그 뒤로는 톡이 없었다. 거실이 어두워서 거실 불을 켰는데 웬 상자가 있었다.
“뭐지?”
누가 택배를 시킨 모양이다. 그런데… 받는 이가 정요셉?
“…근데 웬 복분자.”
왠지 정요셉의 부모님이 보낸 것 같았다. 문득 이걸 이대로 놔두면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대한 걸 거실에 놔두면 누군가 지나가다가 부딪힐 수도 있고. 좋은 일도 할 겸 복분자를 들고 일어서는데,
“…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 몸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툭.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복분자를 떨어트렸다. 와장창, 깨진 유리 조각과 함께 허무하게 흐르는 복분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무슨 살인 사건을 저지른 사람처럼 온몸에 복분자가 묻었다. 입가에 묻어 있는 복분자를 혀로 핥아보니 맛있긴 했는데… 이걸 언제 치우지?
게다가 옷까지 전부 복분자로 젖어서 큰일 났다. 옷은 새로 사는 편이 났겠네.
바닥을 안 쓰는 수건으로 닦고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했는데…….
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범나비, 뭐 하냐?”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사람은 주이든이었고.
“우리 숙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걸까~? 왜 이렇게 피가 잔뜩 묻어 있어.”
뒤이어 이정진이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면서 눈이 커졌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내가 해명하려는 찰나,
“와우~ 우리 막내가 살인 사건 저지른 장면을 내가 찍어놔야겠네.”
그 와중에 정요셉은 사건 현장을 찍는 것처럼 핸드폰을 꺼내서 나를 마구 찍었다. 하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이 복분자가 정요셉의 것이었기에.
복분자로 범벅이 된 나를 보면서 화목현이 다가왔다.
“나비야, 어디 다친 곳은?”
“…다친 곳은 없는데 거실 바닥이…….”
“거실 바닥은 닦으면 돼.”
이미 이정진과 주이든이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유리를 담고 있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정요셉이 보는 앞에서 두 팔을 위로 들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요셉 형, 죄송해요. 이 복분자, 요셉 형의 부모님이 보낸…….”
“어?”
“그러니까 죄송해요.”
“우리 막내, 괜찮아.”
“예?”
“왜 이딴 걸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복분자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 깼어.”
오히려 정요셉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해 줬다. 다음은 고마움의 표시다.
“목현 형, 정진 형. 죽 잘 먹었어요.”
“약은 먹었고?”
“약은 아직 안 먹었어요.”
이정진이 유리를 치우다가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한테 종합 감기약을 건네주었다.
“이거 먹고 내일 투두 네스트 촬영하러 가야지.”
“…내일 무슨 콘텐츠로 진행하는데요?”
“별거 없어. 그냥 게임만 한다고 하던데?”
“그래요?”
“그리고 팬들이 걱정 많이 하더라.”
“아, 나중에 괜찮다고 SNS에 올릴게요.”
핸드폰으로 팬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남기고 있는 사이 일사천리로 거실은 정리가 되었다.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엉망인 걸 치워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이상하게 안심이 되네.’
그랬더니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주이든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야, 범나비. 웃음이 나와?”
“…어, 제가 웃었어요?”
“어, 너 웃었어.”
내가 웃고 있었구나. 왜 웃음이 나지…….
“얘 쪼갠다!”
“안 쪼개요.”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는데? 어?”
그 말에 나는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주이든의 말처럼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범나비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오다가 어이없게도…….
“하하.”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동안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매번 계산적이고 계획적으로 살아와서 그런가.
그런데 엉망이 된 공간을 보니 왠지 마음이 후련했다.
‘…아, 이상해.’
이상한데도 재밌다.
“에취!”
순간 한기가 올라와 기침이 자동으로 튀어나오자 멤버들이 다가와 휴지를 건넸다. 이런 상황조차도 웃겼다.
“애가 맛이 갔나?”
아짜먄 그럴 수도 있겠다.
“범나비, 빨리 같이 치워! 웃지 말고!”
“네, 가요.”
나도 휴지를 가져와 복분자를 닦는데 눈앞에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낮아집니다. (0%)】
피로도가 확 낮아지자 몸이 한층 가벼워졌다.
【범나비의 피로도가 다 낮아졌습니다.】
【정규 앨범 활동이 끝날 때까지 범나비의 피로도가 높아지지 않습니다.】
【범나비의 상태:ƪ( ˘ ⌣˘ )ʃ 우쭐 모드 ON】
우쭐 모드?
【무슨 일을 하든지 잘 풀리는 모드입니다.】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