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아이돌 노트란?
빨간색 노트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이돌 노트를 믿냐고?”
…이게 무슨.
평안하게 대상 받고 시스템을 없애려고 했는데… 그다음으로 빨간색 노트 모서리에 적힌 부분을 확인했다.
【아이돌 노트를 조심해.】
나랑 대화하는 놈을 말하는 건가. 나는 시스템이 복구되기 전에 이 페이지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잡념에서 빠져나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정진이 있었다.
“막내야?”
“어, 형?”
작업실에 돌아온 이정진이 내 방문을 열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막내야, 떡볶이 먹자.”
“어.”
“숙취에 좋은 어묵 국물도 가져왔고.”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이정진을 보니 마음이 좋긴 한데. 이정진의 웃음이 예사롭지 않다. 분명히 내가 취한 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아.’
왜 술을 마셔서.
“막내야, 나와. 같이 먹자.”
“…어, 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이정진은 먹기 좋게 떡볶이와 순대의 비닐을 벗겼다.
“막내야, 먹어.”
“…네.”
“어묵 국물부터 마실래? 속이 안 좋잖아.”
“그럴게요.”
속이 더부룩해서 우선 뜨끈한 어묵 국물을 마셨다.
“…와.”
“속이 풀려?”
“네…….”
어묵 국물로 속을 풀고 떡볶이와 순대를 하나씩 먹었다. 옛날 떡볶이네. 김밥 튀김도 맛있었다.
“속은?”
“속은 괜찮아요. 이제 아프지도 않고.”
“다음부터 술은 적당히 마시자.”
“…그래야죠. 그런데 왜요?”
내가 이상한 말을 지껄인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이정진을 바라보았다. 이정진은 나한테 물을 주면서 대꾸했다.
“막내가 나한테 반말하던데?”
“예? 제가요?”
“막 정진아! 이정진! 이러면서.”
나를 따라 하는 이정진의 태도에 놀랐다. 내가… 그랬다고? 충격이긴 하네.
“어, 형… 죄송해요…….”
“아니야. 웃겼어.”
“죄송해요. 제가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막내야, 사과하지 않아도 돼.”
사과해야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요. 살살 이정진의 눈치를 보면서 떡볶이를 먹었다. 입을 막을 수 있는 떡볶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막내 덕분에 멤버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눠서 좋았어.”
“…어, 그랬어요?”
이정진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비밀인데… 네가 아플 때 말이야.”
“어, 네…….”
“이상하게 아이돌을 그만두고 싶더라고…….”
시스템창이 말했던 대로인가.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글쎄… 회의감이 든 것 같기도 하고.”
회의감?
“설마 이번 도둑 GAME 활동 때도 회의감을 느꼈어요?”
“응, 회의감도 회의감인데… 그냥 아이돌 활동 자체가 하기 싫었어.”
이정진의 눈빛을 보니 이건 진심이었다.
“억지로 아이돌 활동을 하는 느낌을 받았었어. 돌연프 때도 너희들이 있어서 한 거지, 아니었으면 도중에 그만뒀을걸?”
“…그만큼 아이돌 활동이 하기 싫었어요?”
“그건 아닌데…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이 컸어.”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정진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예?”
그게 무슨 소리지?
“이든이처럼 예능적 감각도 없고, 요셉이처럼 연기적 감각도 없고, 목현이처럼 얼굴이 잘난 것도 아니고.”
이정진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막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형은 작곡을 잘하잖아요.”
“그걸…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잘하는 게 아니라면 뭐야? 나는 기가 차서 헛숨을 뱉었다.
“막내야, 나 그렇게 작곡을 잘하는 편은 아닌데.”
“무슨 소리예요. 잘하는 편인데요?”
이정진이 고갤 저었다.
“내 노래는 멤버들이 잘 불렀기에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해.”
“…어, 아니에요.”
오히려 노래가 잘 나와서 우리가 연예계에서 살아남은 게 아닌가.
“…그런데 있잖아. 네스트의 인기가 날로 올라가면서 작업실에서 한참이나 생각했다?”
“뭘요?”
“내가 아이돌인지, 작곡가인지…….”
그저 작곡이 좋아서 작곡을 하는 줄 알았더니.
“아이돌은 특정적인 부분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으면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
“그래서 멤버들이 부러웠던 것도 있어.”
이정진의 검은색 눈동자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멤버들이 아이돌로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하는 모습도 부럽더라. 나는 그런 마음도 없었거든.”
“…….”
“언제였지? 팬 싸인회에서 팬들이 그러더라. 뭐든 욕심 좀 내보라고.”
“…….”
“그래서 욕심을 내며 노력하는 너희들이 부러웠어…….”
이정진은 한 번도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예능도, 센터도, 앨범도. 이정진은 한 번 숨을 모았다가 말했다.
“하지만 멤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
“내 한계를 알아버렸거든.”
이정진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멤버들과 같이 지내면 당연히 불편한 구석이 있지 않겠는가.
‘…열등감.’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마음이 드는데, 같은 멤버라도 섭섭하고 쓸쓸한 마음은 생기는 법이다.
“잘나가는 너희들을 보면서 나는 혼자 고립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
“그런데 마침, 어제 막내가 술을 먹자고 해서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어.”
시스템이 이정진의 우울함을 낮추라고 하긴 했지만. 이런 사정이 있었군…….
“시작은 저였지만.”
“…….”
“형이 직접 말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덕이 아니죠.”
“…….”
이 말을 끝으로 순대를 떡볶이 소스에 찍어 먹었다. 순대가 부드럽게 넘어가네.
나는 젓가락으로 순대를 가리키며 이정진에게 말했다.
“정진 형, 순대 맛있네요.”
“맛있어?”
“네, 엄청 맛있는데요? 정진 형이 사주셔서 맛있는 건가.”
억지로 톤을 높이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정진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보니 울 것 같았으니까.
“저는 형이 있어서 좋아요.”
“…….”
“목현 형만 우리 팀에 있었으면 멤버 밸런스가 좀 안 맞았을 것 같아요. 우리 형들 성격이 불같잖아요. 욱하는 성격도 많고.”
“그렇지…….”
“그에 비해 정진 형은 물처럼 잔잔해서 좋아요. 그러니까…….”
나는 어묵 국물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어디 갈 생각 하지 말고 옆에 있어요.”
“그래…….”
왜 이렇게 싱거운 듯한 말투지?
“그리고! 정진 형은 작곡 실력이 좋거든요?”
“…어, 어?”
“언젠간 형의 작곡 실력이 널리 알려질 거예요. 네스트라는 존재가 더 커지면?”
싱긋 웃는 나를 보면서 이정진이 못 말린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칭찬해 줘서 고마워.”
서서히 올라가는 이정진의 입꼬리를 보면서 칭찬을 계속했다.
“형은 노래도 잘 부르거든요? 춤도 잘 추고요. 이든 형도 그렇고, 정진 형도 그렇고. 왜 자기가 가진 실력을 깎아내려요?”
나는 예의 없이 젓가락을 들어서 이정진을 가리켰다.
“언젠간 팬들은 알아줄 거예요.”
“…….”
“네스트의 이정진이 대단하다는 걸.”
오글거리지만 맞는 말이니까. 눈에 띄지 않고 한결같이 노력하는 사람이 대단한 거다. 자신의 실력을 조용히 숨기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 잘된다니까.
“그리고 형은 돈을 잘 벌잖아요?”
“…막내야, 뭐라고?”
“아니에요?”
이정진이 쓰지 않은 숟가락으로 내 이마를 쳤다. 진짜 아프네.
“왜 때려요?”
“…웃겨서.”
“웃기면 웃어야죠.”
“기가 차서.”
맞는 말을 했을 뿐인데.
“어설프지만 위로가 됐거든.”
“…어설픈 위로 아니었는데.”
“뭐?”
“아니에요. 또 맞기 싫어서.”
다시 떡볶이 먹기에 돌입하며 나는 이번 주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뮤비 나오죠? 이번 주에.”
“어, 이번 주에 나와.”
“그리고 우리 카운트다운 라이브도 하고.”
“응.”
이번 주에 우리가 찍었던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드디어 도둑 GAME을 팬들한테 선보이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오늘 회사에 가서 확인해 봤는데 뮤비 괜찮더라.”
“진짜요?”
“어, 보면 놀랄걸.”
이정진이 놀랄 정도면 괜찮은 건데. 일주일 동안 도둑 GAME 뮤직비디오를 찍느라 힘들었다.
“CG는요?”
“그것도 괜찮아. 네가 걱정했던 대로는 안 나오더라.”
“형의 눈은 정직하니까.”
“믿어주는 거야?”
“네, 당연히 믿죠.”
정요셉과 주이든의 눈은 믿지 않지만. 마지막 떡을 입에 넣을 차례가 다가오자,
【아이돌 노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합니다.】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창이 돌아왔네…….’
* * *
이백수는 허겁지겁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노트북을 켰다. 큰 화면으로 네스트의 카운트다운 라이브를 즐겨야 했으니까.
《네스트 NEST ‘도둑 GAME’ 카운트다운 라이브》
아직 시작하기 전인지 채팅창이 난리가 나 있었다.
-이번 착장 미쳤던데
-홍보가 기가 막힘
제일 중요한 건 오늘 나비가 목줄을 찼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막내가 목줄을 찼다.
-ㅅㅂㅅㅂㅅㅂㅅㅂ 사람 죽어요
-목줄은 누구 아이디어?
“…나비야.”
이백수는 죽을 것 같았다.
‘…우리 막내가 커서 목줄도 해요.’
어쩐지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좋으니까. 그런데 이번 카운트다운 라이브 착장이 미치긴 했다. 사실 이백수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드디어 회사가 덕후 죽이려고 난리를 치는 것인가?
-이든이 고글!!!!!
-리더 선생님 목현이 흰색으로 탈색했어 돌았나 미치겠다 빨리 보여주세요…
-우리 요셉이 얼굴이 미쳤어요…
-정진아 정진아 우리 앓아 죽을 정진이 반바지 입음ㅠㅠㅠㅠㅠ
이번 정규 앨범에 돈을 퍼부었는지 코디가 미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곧 카운트다운 라이브가 시작되면서 멤버들이 등장했다.
[화목현 : 안녕하세요! ONLY ONE 네스트입니다!]
애들이 박물관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곧바로 이백수는 기도를 했다.
‘우리 애들 아이돌 길만 걷게 해주세요.’
오늘따라 외모가 미쳤으니까.
[화목현 : 이번 라이브 방송 장소는 박물관입니다.]
카운트다운 라이브 장소는 박물관이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환한 조명이 멤버들을 비추고 있었다.
[정요셉 : 지난번 라이브 방송에서 봤던 청룡자기도 있답니다.]
하얀색 도자기에 청룡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청룡자기.
-그거 국보야?
-국보겠냐?
화목현이 사실을 정정했다.
[화목현 : 이건 저희 쪽에서 만든 가짜 자기입니다. 보물이 아니에요. 저번에 보니까 우리나라 보물을 훔쳐 가지 말라는 댓글이 있었거든요?]
어느 외국 팬이 청룡자기가 대한민국 자기냐고 물었다가 와전이 되면서 생긴 헛소문이었다.
[주이든 : 저희가 진짜 보물을 훔쳤다면 이곳이 아니라 감옥에 있겠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ㅋㅋㅋㅋ
-초반부터 해명하는 방송 흔하지 않다
이번엔 나비가 입을 열어 진행을 했다.
[범나비 : 정진 형, 그거 알아요? 사실 오늘 네스트가 라이브 방송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죠?]
[이정진 : 당연히 알지. 오늘 저희는 네스트의 정규 앨범인 도둑 GAME을 소개하기 위해 왔습니다. 와! 박수!]
정진이가 박수를 치자 나비도 얼렁뚱땅 박수를 쳤다.
-정진이 옆에 꼬옥 붙은 나비ㅋㅋㅋㅋㅋㅋ
-둘이 합 좋네ㅋㅋㅋㅋㅋㅋㅋ
-나비야 목줄은 왜 한 거야?
정진이가 채팅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나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범나비 : 아, 목줄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말할까요?]
나비가 목줄 에피소드를 말하려고 하자 요셉이가 먼저 말했다.
[정요셉 : 제가 말할게요. 코디 선생님이 딱 한 명만 목줄을 할 수 있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멤버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진 사람이 한 거예요.]
[주이든 : 맞아, 맞아.]
[정요셉 :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 막내라죠~]
-나비가 졌구나?
-저런…
-아이고…
안쓰럽다는 댓글이 올라오자 나비가 헛웃음을 지었다.
[범나비 : 라이브 방송 켜니까 목줄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있더라고요? 안쓰럽다고 하면서 좋아할 거 다 알아요.]
-다들 입가를 가린 손 빼자
-그래도 안쓰럽다고 해야 다음에도 해줄 거잖아
-우리 나비는 목줄 절대 안 뺄 거지? 믿을게.
역시 팬들은 나비를 잘 알고 있었다.
[범나비 : 네온들이 좋아하는데 왜 빼요. 불편해도 쭉 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비가 고개를 들어서 목줄을 원 없이 보여주었다.
[화목현 : 자, 이제 목줄 이야기는 나중에 할게요?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네~ 목현 선생님!
-우리 선생님 말 잘한다
[화목현 : 오늘은 노래도 소개하고! 도둑 GAME이 어떻게 정규 앨범으로 나왔는지도 소개하고! 거기에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생긴 에피소드까지! 따끈따끈한 소식들 우리 네온들에게 알려줄 거니까, 차근차근 라이브 방송을 진행해 볼까요?]
목현의 인사에 멤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화목현 : 먼저 멤버들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정요셉 : 에이, 목현 형! 다들 우리를 알고 들어온 게 아닐까?]
요셉이의 태클에 목현이가 꿋꿋하게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화목현 : 안녕하세요. 네스트의 리더 화목현이라고 합니다.]
목현이가 정직하게 인사하자 옆에서 요셉이가 웃으면서 인사했다.
[정요셉 : 안녕하세요~ 저는 네스트에서 셋째인 정요셉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중심에 앉은 이든이가 말했다.
[주이든 : 안녕하세요! 저는 네스트에서 넷째인 주이든이라고 합니다. 이번 도둑 GAME에서 센터를 맡았죠.]
속전속결로 나비와 정진이의 인사가 이어졌다.
[범나비 : 네스트에서 언제나 막내인 범나비라고 합니다. 목줄로 각인되었겠죠?]
[이정진 : 안녕하세요. 네스트에서 둘째인 이정진이라고 합니다. 이번 도둑 GAME 작곡을 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둥! 소리를 내면서 목현이가 카드를 하나씩 꺼냈다.
[화목현 : 저희 스태프분들이 네온들에게 미리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코너는! ‘도둑에게 물어봐!’입니다!]
-어? 도둑?
-도둑이요?
-이게 맞아……?
-도둑이라고 하니까 좀 웃기다ㅋㅋㅋ
목현이가 카드를 섞더니 독수리가 그려진 카드를 뽑았다.
[화목현 : 하나를 뽑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