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회귀’라는 단어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공간. 나는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시스템 속인가.’
내 몸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몸은 멀쩡하니까. 그런데 내가 쓰러진 후의 이정진이 걱정이 되었다.
하필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이정진이 봤으니까. 아마 감정이 풍부한 이정진은 울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정요셉이나 주이든이었으면 멘탈적인 부분을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거리고. 아이돌 노트가 점검을 끝내고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뭘까.
“…아이돌 노트.”
아이돌 노트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왜 피를 흘리며 쓰러진 건지 이유라도 알아야지. 그때,
【…….】
아이돌 노트가 내 앞에 나타났다.
“…너,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뭐야.”
그러자 나랑 똑같이 생긴 아이돌 노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스템이 멋대로 행동해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돌 노트가 한 발짝 다가오더니 눈동자를 굴렸다.
【시스템이 멋대로 널 불렀다는 거야. 내가 아니라.】
“왜?”
【아마도 너에게 뭔가를 알려주려는 거겠지.】
무엇을 알려주려고? 주변을 살펴보아도 어둠밖에 없는데. 아이돌 노트는 조금씩 나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가 어딘 거 같아?】
“잘 모르겠는데?”
【모를 리가 없을걸. 네가 전에 와봤던 공간이거든.】
내가 와봤던 공간이라면 한 곳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왔던 아이돌 노트 속은 아니겠지?”
책이 한가득 쌓여 있던 그곳?
【그곳이 맞아.】
“그런 곳이 왜 이렇게 되었는데?”
【네가 아이돌 노트를 찢었잖아.】
그러니까 나랑 아이돌 노트의 영혼이 바뀌었을 때 아이돌 노트를 찢어서 망가졌다고? 이렇게?
【이번 회귀는 이상해.】
아이돌 노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변하려고 하거든.】
“그게 뭔데.”
【너.】
아이돌 노트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번 회귀는 조금 달라.】
“어떤 부분이?”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아이돌 노트가 고민 끝에 나를 쳐다보았다.
【네 회귀는 한 번뿐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 회귀를 계속하면서 마냥 똑같은 일상이 일어났을까?】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아이돌 노트를 바라보았다. 아이돌 노트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를 하면 할수록 계속 이상한 일이 발생했어.】
“어떤 일?”
나는 아이돌 노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남주와 페널티 공유가 가능해졌다는 거야.】
“…잠깐만, 가능해졌다?”
【그래, 이남주도 회귀자니까.】
잠깐만,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 녀석이 회귀자라고?”
【그래, 빙의자가 아니라 회귀자.】
“전혀 회귀자답지 않던데.”
아이돌 노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갤 끄덕였다.
【이남주가 회귀자라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네가 기억을 없애달라고 부탁했거든.】
“왜……?”
아이돌 노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눈앞에 나랑 이남주가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슬픈 표정을 하고서 이남주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날 죽이면 안 될까?”
“…….”
“괴로워. 회귀를 하면 할수록 멤버들이 죽어.”
멤버들이 죽는다… 저 영상 속의 나는 무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엔 회귀하는 상황을 믿을 수 없어서 그냥 얼떨떨했는데… 지금은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괴로워하던 이남주가 나에게 손을 뻗었다. 눈앞의 나는 이남주의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의자에서 일어나 사라져 버렸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나면서 다시 아이돌 노트가 나타났다.
【너의 회귀가 계속되자 새로운 회귀자가 생겼어.】
“그게 이남주라는 건가.”
【그래.】
이남주는 나로 인해 만들어진 회귀자.
【그리고 네 첫 살인은 이남주였어.】
“…….”
…첫 살인이라는 말에 실소가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니면 내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로 인해 회귀하게 된 이남주도 회귀에 무너져 내렸다는 거잖아.
“…그래서 이남주의 기억을 바꾼 건가.”
【그래, 이남주가 널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거든.】
계속 반복되는 기억은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남주의 기억을 조작한 거야. 소설 속 빙의자라고.】
그래서 돌연프 때 봤던 이남주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던 거군. 그제야 이남주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그러면 이정진 앞에서 피는 왜 토한 거야?”
【슬슬 이정진의 트라우마가 바뀔 때가 됐거든. 순서가 그래.】
“트라우마가 바뀐다고? 설마.”
【이정진의 트라우마는 너야.】
…허.
【어차피 이정진의 트라우마가 바뀔 때였는데 하필 네가 된 거고.】
“그걸 나로 바꿀 필요는 없었잖아.”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나를 트라우마로 만들면.”
나를… 싫어할 수도 있잖아. 나는 고개를 떨구며 바닥을 응시했다.
【이정진이 널 싫어하진 않아. 오히려 자신을 싫어할걸. 어쩌면 자기혐오에 빠질 수도.】
“자기혐오는…….”
좋지 않다.
“아이돌 노트를 멈추는 방법은?”
아이돌 노트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없애는 방법은 딱 하나.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으면 돼.】
“대상을 받으면 된다?”
【아이돌 노트에는 대상 이후의 흔적이 없거든.】
대상을 받기 전에 회귀를 해버렸다는 거군.
“그때마다 내가 죽었나?”
【그건 내가 말해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예, 아니오로 대답하던 아이돌 노트가 대답을 회피하는 걸 보면 역시 죽었던 건가.
‘…무슨 일이 있긴 했던 거고.’
그 죽음만 피하면 되겠네.
“…알려줘서.”
이 녀석도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고맙다.”
이제야 깨달았네.
【아, 근데.】
“…….”
【100번째 문제가 나오기 전에 대상을 받아야 한다는 거.】
“…뭐?”
【까먹고 안 말할 뻔했네. 잘 가라.】
…저 말을 끝으로 나는 눈을 떴다.
‘…고맙다는 말 취소다.’
* * *
이정진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비를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절대 119에 전화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나비의 말이 생각나 이마를 긁적였다.
‘어떡하지…….’
하필 아무도 없는 날이었다. 이정진은 머릿속으로 천천히 생각했다.
첫 번째, 나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는다.
두 번째, 목현이한테 연락해 둔다.
세 번째,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119를 항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자. 이렇게 생각하자. 이정진은 수없이 대처 상황을 떠올리면서 나비의 손을 꽉 잡았다.
처음 본 나비는 독한 애라고 생각했다. 독한 애. 갑작스러운 멤버 변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나비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될수록 놀라웠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조금도 자신을 위하는 애가 아니었다. 그룹을 위하는 애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비의 행동이 달라지면 이정진은 나비를 감시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진 형.’
‘응?’
‘형은 네스트가 좋아요?’
‘당연히 좋지.’
‘저도 네스트가 좋아요.’
이상하리만큼 네스트가 좋다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그때 이정진은 얘가 자다가 일어나서 그냥 뱉는 말이구나 싶었다.
이정진은 속이 타들어갔다. 요즘 나비가 사진 보정과 동영상 편집을 한다고 바빠서 코피를 여러 번 흘리긴 했었다. 그럼에도 나비는 괜찮다면서 오히려 이정진을 다독여 주었다.
“나비야…….”
이정진은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나비야, 죽으면 안 돼.”
잡고 있던 나비의 손을 놓고 휴지로 눈물을 닦은 이정진은 나비의 움직임에 하던 행동을 멈췄다.
“…형?”
이정진은 고개를 돌려서 나비를 쳐다보았다.
“울어요?”
“…막내가 아프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펑펑 울 필요는 없는데.”
“다행이다.”
나비가 상체를 일으키며 엉망인 티셔츠를 확인했다.
“피를 많이 흘렸어요?”
“응, 네가 죽는 줄 알았어.”
“…괜찮아요. 그렇게 아픈 곳은 없어서.”
“밥을 안 먹어서 그래?”
“예… 아마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요새 피곤했잖아요. 코피도 많이 흘리고.”
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이정진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뒤로 넘어갔다. 어디 아픈 곳이 없으니 다행인 건가.
“속이 아픈 건 아니고?”
“오히려 속이 편안해졌어요.”
“…병원에 안 가도 돼? 밖에 나갔다가 약을 사 오긴 했는데.”
나비가 잠깐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이정진은 약국에 가서 위를 편안하게 하는 약을 사 왔다.
“…형, 고마워요.”
“밥 안 먹어도 이 약은 먹을 수 있대. 막내야, 먹어.”
저 작은 애가. 이정진의 눈에는 범나비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형?”
“이제 막내 밥 먹는 거 지켜볼 거야.”
“저 밥은 잘 먹는데요.”
“무리하게 일하지도 말고.”
“그건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
“나는 막내처럼 안 먹진 않아.”
“…알았어요.”
나비가 약을 받아먹고 눕자 이정진은 그제야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비가 이대로 정말 사라지면 어쩌나 싶었다.
“정진 형, 손을 막 떠는데요?”
“…그게.”
그리고 결국 자신의 속마음을 말했다.
“…막내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제가요?”
“어쩐지 기분이 그랬어, 기분이.”
정말이었다. 나비를 안아서 침대에 옮기는 순간에도 뭔가 마음이 불안정했다. 그리고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닦으면서 계속 옆에 있었다.
“…제가 언제 쓰러졌어요?”
“1시간도 안 됐어.”
“그렇구나.”
나비가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저 안 사라져요.”
“알아. 어떻게 네가 사라져.”
“그러니까요. 제가 어떻게 사라져요.”
나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정진은 잡고 있던 나비의 손을 놓아주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은 거겠지.’
* * *
곧바로 이정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가 썩 좋지는 않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방울이 턱에 매달려 있었다.
“많이 울었어요?”
“…아니야.”
많이 울었네.
“저 안 죽어요, 형.”
“알아.”
딱히 슬프지 않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이정진은 잘 울었다. 혼자서 자다가도 우는 사람인데 얼마나 놀랐을까.
“형,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몸 건강 철저하게 지킬게요.”
“응!”
이정진을 안심시키고 고개를 돌리자 핸드폰에 톡이 와 있었다.
(김연호) 오늘 아이돌산업본부에 새로운 본부장님이 오셨다는데
(김연호) 추석 끝나고 너희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거든
(정요셉) 헐~
(주이든) 오…
화목현은 아직도 예능 촬영 중인지 확인을 안 하고 있었다.
“어… 형.”
“응?”
“우리 새로운 본부장님이 오셨다는데요?”
새로운 본부장이 왔다는데 내가 아팠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진 형, 이거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막내 피 흘린 거?”
“네.”
“뭐… 그럴게.”
썩 안 내키는지 이정진의 표정이 별로였다.
“저를 위해서라도.”
“어, 그래…….”
근데 김연호가 다시 보낸 톡이 어쩐지 수상쩍었다.
(주이든) 본부장님은 어때요?
(김연호) 의욕이 좀 넘치셔
(주이든) 네?
의욕이 넘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