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영혼 체인
눈을 뜨고 일어나자 침대 위. 멤버들이 나를 옮겨놓았나?
‘…뭐지, 이 괴리감.’
나는 눈을 감으며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 녀석을 만난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내가 쓰러지고 멤버들과 만났나?’
그 사실을 알고 싶어서 이정진을 불렀다.
“…정진 형.”
이정진을 불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어디 나갔나……? 아직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인상을 찌푸리며 한 번 더 불렀다.
“정진 형……?”
그래도 대답이 없다. 간신히 눈을 뜨고 흐릿한 방 안을 둘러보는데, 분명 있어야 할 침대가 사라졌다.
아니, 없다고 해야 맞는 건가.
이정진이 있었던 침대 자리에는 바닥에 하얀 먼지가 소복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원래 없었던 자리라는 것처럼.
“뭐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숙소를 확인했다. 그런데,
없다.
없어…….
주이든의 침대가, 정요셉의 침대가, 화목현의 침대가.
‘설마… 꿈은 아니겠지.’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는 소파에 앉았다. 이 상황을 정리할 무언가가 필요할 때였다. 붉은색 시스템창이 나를 반기는 것처럼 나타났다.
【영혼이 바뀌었습니다.】
정말로.
‘…영혼이 바뀌었다고?’
그 회귀자를 만났을 때부터 위험하다는 기운은 느꼈지만. 걔랑 나랑?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이돌 노트는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아이돌 노트의 1군 가이드 기능을 중단합니다.】
더군다나 1군 가이드 기능을 중단한다고? 그러면 지금 당장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욕설을 지껄였다.
“…씨발.”
내가 이렇게 욕하는 이유가 있다. 이번 주 주말부터 런엑스런 컴백 음악 방송, 라디오, 예능이 있다. 팬들의 반응이 올 텐데… 그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는데.
‘…작은 팬미팅에서 인화한 사진도 줘야 하고.
상실된 미래를 향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생각하자. 또 생각하자. 이대로 안주할 수는 없고.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 뇌리를 스치는 단어.
“그 새끼.”
그 새끼가 나긴 하지만. 나는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서 여기로 온 거잖아? 걔를 만나야 돌아갈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운이 빠졌다.
“아…….”
그렇다면 기다려야 하잖아. 걔가 언제 올 줄 알고. 그래도 무작정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고, 그다음 날이 되어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기다려도 돌아갈 수가 없잖아. 왜?”
‘왜’라는 질문에 뚜렷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했다. 이러다가 아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씻고 밥을 먹었다.
이 몸이 상하면 안 되니까.
‘하…….’
처음엔 분노했다. 누구라도 분노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럴수록 기운이 빠지는 사람은 나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불안함이 잠식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내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억지로 밥을 입에 욱여넣으면서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를 여기로 데려온 목적이 무엇이고.
걔는 왜 내 몸을 탐냈던 걸까.
‘그것’부터 찾아야 한다…….
‘목적.’
그 새끼가 나랑 영혼을 바꾸려고 했던 목적. 방을 뒤지고 뒤지자 책장에서 아이돌 노트와 비슷한 빨간색 노트를 찾았다.
“이거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빨간색 노트를 펼쳤다.
[100회 차.
나는 모든 걸 해봤다.
HI 엔터에서 나가기도 하고,
연습생 시절에 난동도 피워보고,
AA 엔터로 옮겨보기도 하고.
그러나 이제 남은 건 죽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나를 죽이기로 했다.]
…이게 무슨.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120회 차.
또 실패했다.
왜 나는 아이돌로 성공할 수 없을까.
성공의 끝자락에 도달하면
멤버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주변 사람들이 죽었다.
웃기다.
꼭 대상을 타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멤버들과 함께 받겠다고 다짐했던 대상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엔…….
[131회 차.
오랜만에 마주한 이남주가 나한테 말하길,
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자 불행의 끝이라고 했다.
정말로?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아니다.
이남주는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거기에는 몇 회 차라고 적혀 있진 않았다.
[그래서 여러 번 생각한 끝에
내가 스스로 아이돌 노트를 만들었다.
내가 실패했던 이유를 적기 위해서.]
아이돌 노트를 만들었다고……?
처음부터 아이돌 노트가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인가. 순식간에 아이돌 노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돌 노트가 그랬지. 너는 나고, 나는 너다.
[204회 차.
아이돌 노트를 만들고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돌 노트가 생긴 뒤
멤버들이 죽는 확률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에 나가게 되면서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아이돌 노트를 만든 셈인데.
‘내가 만들어서 조잡했던 거고.’
소설도, 게임도 아닌 내가 자처해서 만든 아이돌 노트. 이상하게 시스템이 엉성하고 이상하더라. 다음 페이지를 확인하는데 눈이 커졌다.
[312회 차.
이번 회차에는 멤버들이 없다.
그래서 나 혼자, 솔로 가수가 되었다.
아이돌이 아니라서 아이돌 노트도 없고.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팬들은 나를 좋아했다.
역시 나에게 남은 건,
팬밖에 없다고 느꼈다.]
‘남은 건, 팬.’
당연히 팬만 남았겠지.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조금은 얘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영혼으로. 나를 통해서 멤버들을 만나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내 몸을 탐냈던 건가. 근데…….
“다시 돌아갈 방법은 어떻게 찾아?”
여기엔 내가 돌아갈 방법이 적혀 있지 않았다.
“허…….”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드러누울 때였다. 침대 위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진동?’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핸드폰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핸드폰 화면에 크래프트 이남주가 떠 있었다.
“이남주?”
내가 생각하는 그 이남주가 맞겠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남주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문 앞이에요. 열어줘요.”
나는 방에서 빠져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방금 무대를 하고 왔는지 무대 의상으로 나를 찾아온 이남주가 서 있었다.
“이남주?”
“…흐음.”
말투는 이남주인데, 내가 알던 이남주는 아니다. 너무 호의적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이남주가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오더니 소파에 앉았다. 마치 일상인 것처럼.
“하여간… 사람이 미칠 거면 곱게 미치든가.”
“…뭐라고?”
“아, 당신 말고. 그 몸의 원래 주인.”
얘, 뭘 알고 있다.
“도대체 왜 몸을 빌려준 거예요.”
“어떻게 알아요……?”
“그 몸의 주인이 저한테 말해줬거든요.”
얘랑 친하게 지냈다는 거네.
“잘 알아요?”
“…누굴?”
“이 몸의 범나비요.”
“잘 알죠.”
…응? 저 말에 소름이 끼쳤다. 이남주의 태도가 너무나도 호의적이라서.
“혹시 머리 다쳤어요?”
“네?”
“머리 다쳤냐고요.”
“아니요.”
그게 아니면서 저런 말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고. 내가 아는 이남주라면 벌써부터 눈웃음을 쳤을 것이다.
“돌아갈 방법은 알아요?”
“돌아갈 방법이라…….”
이남주가 뜸을 들이면서 씩 웃었다. 왜 씩 웃어.
“그럼 나랑 같이 가요. 제가 방법을 알아서.”
“방법을 알아요?”
의심의 싹이 돋을 때.
“시스템창이 알려줬어요.”
저 말에 의심의 싹을 거뒀다.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크래프트 숙소요.”
“…예? 크래프트 숙소요?”
“괜찮아요. 크래프트 막내가 범나비 씨를 좋아했으니까.”
“잠깐만요. 챙기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나는 방에 들어가 가방에 아이돌 노트랑 몇 가지 옷을 챙겼다. 혹시 오래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가방은 챙기네요?”
“…네, 제 가방.”
“그 가방 애지중지하던데.”
애지중지한다고?
“이정진이 쓰던 가방이라고 좋아하던데.”
“예?”
이건 내 가방인데.
“모르나 봐요?”
“…네.”
“이정진이라는 사람이 보부상이었던 것 같아요.”
…뭐?
“그 이정진을 따라 하면서 생긴 습관이래요.”
나는 가방을 침대에 놓고 이남주를 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그 습관도 몸에 흡수가 되잖아요.”
이남주의 말에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오늘은 초콜릿 안 챙겨요?”
“…초콜릿이 없어서요.”
“아, 그러면 그것도 모르겠다.”
뭘 모른다는 거지.
“원래 주이든이 챙겨 먹는 건데 이제 당신이 먹는다면서요. 주이든이 자주 주다 보니까 초콜릿에 정이 들었다면서.”
“…그건.”
내가 힘들 때마다 주이든이 초콜릿을 주긴 했으니까.
“맞죠?”
“네.”
허… 머리 한 대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 쾅 소리가 났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머리가 복잡해서.”
이남주가 부엌으로 가더니 생수를 한 병 줬다.
“차가운 물 먹으면 정신이 맑아진대요.”
“고마워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야죠.”
그렇지. 시간을 질질 끌수록 나한테는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남주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그럼 당신은 나 때문에 왔어요?”
이남주가 가방을 챙기면서 뒤를 돌았다.
“그럼 왜 왔겠어요?”
***
크래프트 숙소에는 이남주랑 막내가 산다고 그랬다. 나머지 멤버들은 독립해서 나갔다고. 이남주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막내가 당신 좋아해요. 그러니까 행동 잘해요.”
“팬이라서?”
“잘 알잖아요. 팬의 마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남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경건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내민 인사에 크래프트 막내가 벌떡 일어났다.
“크래프트의 막내인 이윤도입니다! 안녕하세요!”
“…어, 저는.”
“범나비, 솔로 가수, 29살! 정규 앨범 3개, 미니 앨범 4개. 군대도 갔다 오셨습니다.”
군대도 갔다 왔구나. 열심히 살았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런엑스런입니다. 가끔 고속도로에서 런엑스런을 틀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런엑스런을 들었다고?
“…아,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셔서 얼마나…….”
“예?”
“아! 그게 아니라! 이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이윤도가 말을 이어가다가 이남주가 대화를 끊었다.
“윤도야, 우리 아직도 현관문에 있거든?”
“아! 죄송합니다!”
이윤도는 누가 봐도 앳된 모습이었다. 주이든과 비슷한 작은 동물에 속하는 느낌. 막내긴 막내구나. 나도 네스트의 막내인데.
“가방 주세요!”
“…안 그래도.”
“제가 들고 싶어요!”
주이든과 비슷하다는 말, 취소다. 주이든은 함부로 남의 가방을 들 사람은 아니라서.
“밥은 드셨어요?”
“…아직.”
“뭐라도 해드릴까요?”
“아니요. 그냥 제 돈으로.”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이 몸의 지갑이지 않은가. 내가 지갑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 돈 넣어놔요. 제가 찜닭 시킬게요. 저도 배고파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남주가 찜닭을 시킨다고 말했다.
“…감사해요.”
“뭘요. 옷은 제 방에서 갈아입어요.”
아까 집에서 가져온 가벼운 옷가지를 들고서 이남주의 방에 가려는데 이윤도가 계속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이윤도가 생쥐처럼 깜짝 놀라 저 멀리 구석으로 도망간다.
“저기.”
나는 그냥 불렀을 뿐인데 왜 저렇게 도망가.
“아! 죄송합니다!”
뭐가 또 죄송하다는 건지. 이윤도의 속은 정요셉처럼 예측하기 어렵네. 그렇게 다시 이남주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크래프트가 받은 상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예능도 나왔는지 신인상도 있고…….
‘골고루 상을 받았네.’
부럽다는 생각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렇게 상을 받으려면 몸을 갈아야 하니까. 방 구경은 끝냈으니 반팔과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가자 이윤도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언 일로 오셨어요?”
어언 일?
“…아, 그게.”
내가 당황하자 이남주가 대신 말해주었다.
“아, 그거 나랑 콘텐츠 하나 찍기로 해서.”
“콘텐츠?”
“응, 너튜브 콘텐츠로.”
너튜브 콘텐츠? 나도 모르는 말이 이남주의 입에서 계속 나왔다.
“이남주 매니저 체험기. 범나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