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오우린 본부장님
회의실에 도착하자 회의실에는 KIN과 팀장님만이 있었다. 아직 오우린 본부장은 오지 않았다. 내 등장에 KIN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서류를 내팽개치듯이 던졌다.
“…본부장님이 안 된다고 했잖아. 근데 왜 모은 거야?”
“제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서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멤버들이 자리에 착석하자 화목현이 KIN에게 질문을 던졌다.
“분명 KIN 프로듀서님은 회의실에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본부장님이 오신다는데 내가 왜 안 가?”
KIN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나한테 물었다.
“그리고 너 말이야, 범나비. 왜 본부장님을 만나려고 그래? 다 끝난 마당에.”
“그래도 제가 열심히 정한 컨셉이라서 한 번 더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대로 런엑스런이 무산되면 팬들이…….”
“내 말이 개같이 들리나.”
뭐? 개같이? KIN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아이돌 노래는 대중적으로 만들어야지. 팬들만 좋아하는 노래를 누가 듣냐?”
“과연 그럴까요. KIN 프로듀서님이 말했던 대중성이 언제나 대중한테 먹히지는 않을 텐데요?”
“그건 네 생각이지.”
내 생각이라고?
“첫 미니 앨범인 플라워 초동 48만 장이면 신인으로서 좋은 출발이에요. 그런데 플라워 다음으로 나온다고 했던 런엑스런이 무산됐다고 하면 어떤 팬이 좋아할까요.”
막힘없이 나오는 내 말에 KIN은 반박 대신 욕설을 뱉었다.
“어린 새끼가…….”
KIN이 성질이 나서 일어나려고 하자, 팀장님이 KIN의 팔을 잡으며 막았다. 그리고 나는 KIN에게 다시 질문했다.
“한 번이라도 제가 보낸 PPT 보신 적 있나요.”
“내가 왜? 어차피 플라워 세계관에서 이어가는 거 아니야?”
역시 읽지도 않았네…….
“그렇다면 본부장님한테 PPT를 넘겨주지 않은 건가요.”
“어.”
그렇구나. 그러면 본부장은 PPT를 본 적이 없겠네. 가만히 있는 나에게 KIN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왜요.”
“너희들은 얼굴이 좋잖아. 얼굴이 좋으면 아무리 컨셉이 구려도 팬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도 그랬는걸.”
…KIN이 속해 있었던 후스트가 망한 이유를 알겠네.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오우린 본부장이 나타났다. 나가려던 KIN도 행동을 멈추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우린 본부장입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본부장의 손에는 내가 건네준 런엑스런 PPT 서류가 있었다. 아마 오는 길에 서류를 확인한 모양이다.
“제가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방금 런엑스런 컨셉을 확인했는데, 이걸 이정진 씨와 범나비 씨가 만들었다고요?”
나와 이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회의를 연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목현이 입을 열었다.
“앨범이 나오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립니다. 그런데 플라워 앨범이 나오고 3개월이 지났는데도 다음 앨범 진행은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컴백에 대해 불안하다는 거군요.”
“네, 그런데 컴백도 언제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KIN 프로듀서님이 말씀하시기를, 오우린 본부장님이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두 번째 미니 앨범인 런엑스런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깐만요. 돈이 없어서?”
돈이 없다는 말에 본부장이 인상을 썼다.
“저희가 돈이 없진 않을 텐데… 팀장님?”
“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습니다.”
…어쩐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번에 네스트가 벌어들인 돈이 적지 않으니 다음 앨범에는 돈을 더 써도 괜찮다고 KIN 프로듀서에게 말했는데, 전달받지 못했나요?”
“…그랬다고요?”
팀장님도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KIN이 엔터에 돈이 없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네.
“그러면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런엑스런 PPT를 확인한 결과, 이대로 진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플라워 앨범과 음원 추이도 좋았고.”
본부장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KIN을 보면서 물었다.
“너, 다음 활동 때 쓸 돈이 부족하다고 했잖아…….”
“아, 팀장님… 그건…….”
간도 크다. 가만히 듣던 본부장이 쐐기를 박았다.
“…KIN 프로듀서가 제 말을 잘못 전달한 것 같습니다.”
…KIN은 고개를 돌리며 모르는 척했다. 그러면서 본부장은 런엑스런 PPT 서류를 꺼냈다.
“근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이 하나 있는데.”
“…….”
“이 런엑스런 PPT 말입니다.”
본부장이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범나비 씨가 만든 PPT가 확실합니까?”
본부장의 질문에 나는 역으로 물었다.
“왜 계속 물어보시는 거죠?”
그러자 본부장이 고개를 돌려 KIN을 쳐다보았다.
“KIN 프로듀서가 저한테 와서 말하길, 플라워 미니 앨범을 만드는 내내 멤버들에게 조언을 해줬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이 PPT도 KIN 프로듀서가 조언해 준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허, 조언을 해줘? 아무것도 안 하고 시비만 털었으면서. 내가 KIN을 쳐다보자 KIN이 내 눈을 피했다.
“KIN 프로듀서는 아무것도 조언해 주지 않았습니다.”
“…….”
“조언은커녕 사사건건 이 앨범이 별로라는 말만 했거든요.”
그러자 본부장이 KIN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요?”
“…본부장님.”
“음…….”
여기서 본부장이 결정타를 날렸다.
“제가 네스트 멤버들을 직접 만났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너무 KIN 프로듀서의 말만 들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KIN 프로듀서가 런엑스런 컨셉에 지분이 있다고 했었거든요.”
그제야 KIN 프로듀서가 하는 일도 없는데 계속 AA 엔터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팀장님도 전혀 몰랐던 사실인지 당황한 눈치였다. 허술한 엔터의 허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가 없네.’
현재 아이돌 사업 본부에 본부장이 없으니까, KIN이 허술한 틈을 노려서 엔터의 한자리를 차지한 거다.
팀장님도 일이 바빠서 KIN을 믿은 거고. 설마 했겠지.
“너…….”
“…팀장님, 그게.”
“내가 널 어떻게 데려왔는데.”
이건 거의 뒤통수를 때린 거나 마찬가지. 회의가 끝나갈 무렵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이번 하반기에는 아이돌 사업 본부에 본부장을 모시려고 합니다.”
“…….”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차라리 오우린 본부장이 아이돌 사업 본부의 본부장이 되면 평화로울 텐데.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KIN 프로듀서는 나랑 따로 보죠.”
“…저는.”
“우린 따로 할 말이 있지 않나요?”
다음 앨범부터 KIN은 안 보이겠네.
“런엑스런 앨범은 이대로 쭉 진행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본부장님은 회의실을 나갔다. 뒤늦게 KIN이 일어나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손 떼세요.”
“…….”
“더 이상 우리한테 피해 주지 말고요.”
“…하, 그래.”
KIN은 교묘하게 내 어깨를 치고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옆에서 이정진이 나쁜 기운을 털어내는 것처럼 내 어깨를 툭툭 쳐냈다.
“…얘들아, 미안하다.”
팀장님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덧붙였다.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
“내가 처음 데리고 왔을 땐 무척 순했거든… 아니다, 이만 나도 가볼게. 남은 일이 있어서.”
“팀장님, 남은 일이라면…….”
“KIN 프로듀서랑 이야기 좀 해보려고.”
팀장님이 일어나자 멤버들은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주이든이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지난주에 연습실에서 후스트 선배들을 만났어.”
“후스트 선배들요?”
“어, 그때 내가 물어봤거든. KIN은 어땠냐고. 그러니까 나에게 살짝 말해줬거든? 멤버들한테 정도 없었고, 아이돌 컨셉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뇌가 없는 것 같았대.”
“이든아, 뇌가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없었던 거겠지.”
옆에서 화목현이 정정해 주었다.
“게다가 자기가 리더면서 멤버들이 의견을 내면 묵살했고, 자기만 직원들과 소통했대.”
“…….”
“더한 건, 멤버들이 뭐만 하면 매니저나 팀장님한테 고자질을 했대. 자기 의견이랑 다르면 그걸로 협박도 하고.”
…와, 나 같아도 싫겠다. 이제 조금 알겠다. 그래서 팀장님이 KIN이 직원들과 친하다고 했던 거구나.
“어쨌든, 뭐… 후스트 선배님들이 망한 이유가 따로 있더라고.”
생각할수록 KIN의 만행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우리 이든이, 정보도 빼 올 줄 알고 기특해~”
“…나야 뭐, 우리 그룹을 위해서 정보를 얻어 온 것뿐이지.”
주이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요셉이 그런 주이든을 보며 쌍엄지를 들었다.
“웃기는 사람이네.”
이정진도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니까! 생각할수록 열받지 않아? 자기 그룹도 망하게 했으면서 우리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한 거지!”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자기 잘난 줄 아는 사람들.”
“범나비, 그나저나 너도 고생이 많다.”
“네?”
주이든이 책상에 턱을 괴면서 말을 이어갔다.
“예능 촬영하고 이 일 때문에 잠도 못 잤잖아.”
“…아.”
주이든의 말을 들으니까 피곤이 확 몰려왔다. 계속 일을 했더니 눈이 침침하고 목이 뻐근했다. 스트레스가 쌓인 건가.
“형들, 이제 숙소로 가면 안 될까요…….”
피곤해서 죽을 것 같거든요…….
***
런엑스런 활동 준비가 시작되고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 그런데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인데 팀장님이 우리를 회의실로 불렀다.
“팀장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정요셉이 하품을 하며 팀장님한테 물었다.
“오늘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생겼어.”
“…무슨 스케줄인데요?”
그러자 팀장님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며 조용히 말했다.
“마늘 축제.”
난 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이런 행사는 언제나 환영이지.
“팀장님, 마늘 축제에 간다는 거죠?”
“응, 마늘을 홍보하는 축제인데 어르신들이 많을 거야.”
어쩌다 어르신들이 많은 축제에 가게 되었다. 문득 행사를 잡은 팀장님이 존경스러웠다. 신인은 확 뜨지 않은 이상 행사가 잘 들어오지 않는데 말이다.
“얘들아, 내가 힘들게 잡은 행사거든? 그러니까 잘해야 한다! 특별한 실수 없이!”
팀장님의 인맥으로 잡은 행사라서 더 잘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마늘 축제에 임해야겠네.”
화목현은 이미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나저나 마늘 축제에서 플라워를 부를 수 있을까? 우리 팬들도 어느 정도는 오긴 하겠지만.
“그런데 그, 스태프분이…….”
“네?”
“트로트를 하나 불러달라고 했거든.”
갑자가 트로트?
“나비가 트로트를 부른 적이 있잖아.”
“…예, 방송 사고로 트로트를 부른 적이 있죠.”
“그걸 불러달라네.”
아… 설마 그 무대를 보고 섭외가 된 건가?
“나비야, 잘 부를 수 있지?”
트로트는 잘 부를 수 있다. 그건 그거고… 마늘 축제면 마늘을 잘 홍보해야 할 텐데. 나는 김연호를 보면서 물었다.
“요새 마늘 비싸지 않아요?”
“물가가 올라서 마늘이 비싸긴 해.”
“그러면 저희도 마늘 살 수 있어요?”
“…어?”
“마늘 축제에서 파는 마늘은 품질도 좋을 거 아니에요.”
마늘을 팬들한테 선물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