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예능 살아남아라!(5)
미안하지만… 박정후의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는 심히 듣기 거북했다.
‘왜 저래?’
나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토해냈다.
“나비야, 이동하자.”
“…네.”
디아 선배님을 따라서 우거진 잡초 뒤에 숨었다. 그러면서 나는 쉴 틈도 없이 박정후에 대해 분석했다.
이번에 아이돌을 그만둔다고 하더니 작정하고 예능을 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아이돌을 그만두기도 한 데다 파급력이 없으면 연예계 생활을 쭉 못 할 테니까.
‘…그래서 악역을 자처한 건가.’
돌연프 때도 나를 따라 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데… 이건 멘탈이 강한 건지 뭔지.
“뭐야.”
박정후가 이서혁과 이남주를 보면서 눈을 껌뻑였다.
“남주랑 서혁 형?”
박정후가 껄렁한 자세를 취하며 나타났다. 어두운 밤인데도 표정이 이렇게 잘 보이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거 푸셨네요?”
“내가 힘이 좀 세서.”
“남주가 풀었구나.”
이서혁의 말은 무참히 씹혔다. 그걸 알면서도 이서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휘파람을 불었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손바닥 안이거든.”
“어쩌라는 건지.”
“야, 이거 방송이야.”
“서혁 형, 저 그룹에서 퇴출당했어요.”
“…너만?”
“네, 제가 그룹의 이미지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요.”
…오, 박정후만? 그룹의 리더였으면서 퇴출이라. 심적 타격이 크겠네. 그러더니 박정후는 말을 이어가면서 의지를 표출했다.
“그래서 저는 1억이 꼭 필요해요.”
“1억은 왜?”
“돌연프에서 돈도 못 받았거든요. 연예계 생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해서요.”
하긴… 연습생한테 돈이 어디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박정후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싫었다. 나한테 했던 행동 때문인지.
“짜증 나네요.”
이남주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짜증? 남주야?”
“그래도 정후 형은 총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형이 저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지금은 박정후를 죽이면 안 된다. 박정후는 보물 지도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이남주는 그걸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하나만 말해줘요. 보물 지도는 왜 불태웠어요?”
“간단해. 나만 알고 싶어서?”
그러자 이남주는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남주… 화난 것 같은데.’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디아 선배님이 조심스럽게 나한테 속삭였다.
“나비야, 남주 화난 것 같다?”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쟤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 순간, 이서혁이 뛰어와 박정후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야, 잡아!”
서고운은 조끼 패딩에 넣어놨던 총을 꺼내서 박정후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박정후는 발버둥을 치다가 옆으로 다가온 이남주의 뺨을 때렸다.
쫘악!
살이 찢어진 것만 같은 소리의 파동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거기다가 박정후의 손톱 때문에 이남주의 뺨에 생채기가 생겼다.
‘…이건.’
쉴드 불가다.
“아….”
이남주는 뺨에 손을 대지 않고 박정후의 멱살을 꽉 잡았다.
“제 얼굴이 마음에 들면 말하지 그랬어요.”
“…이, 이건 실수, 실수인데.”
“하하.”
박정후가 당황해서 가만히 있는 사이 서고운은 박정후의 뒤쪽으로 가더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노끈으로 박정후의 손목을 묶었다.
“이제 나가도 되겠지?”
“네.”
그리고 나와 디아 선배님은 박정후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을 보던 박정후의 시선이 나한테 닿으면서 눈이 커졌다.
“뭐야?”
“뭐긴요. 범나비죠.”
“분명… 죽었잖아.”
이걸 다시 설명해? 그건 시청자도 싫을 것이다. 뭐, 내가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고.
“방송으로 확인하세요.”
디아 선배님도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박정후를 애써 외면했다. 박정후는 최대한 공손하게 디아 선배님께 말했다.
“선배님, 저 풀어주세요.”
“못 풀어줘.”
“아! 디아 누나!”
“필요할 때는 선배고, 신경질 부릴 땐 누나야?”
“…아니.”
박정후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디아 선배님을 구슬렸으나…….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잖아요.”
“우리한테 무슨 정이 있다고? 응, 안 돼.”
소용이 없었다.
박정후를 죽이기보다는 어떻게든 박정후를 회유해서 찢어진 보물 지도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우리 텐트로 가자.”
***
박정후가 있던 텐트에 도착해서 모닥불을 피웠다. 노을이 저물어 밤이 되었기 때문에 모닥불이 필요했다. 디아 선배님이 모닥불을 관리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박정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박정후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게 박정후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찰나,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왔다.
[주택에 음식이 생성되었습니다.]
아까 설거지했던 주택을 말하는 건가. 디아 선배님이 방송을 듣고는 물었다.
“…누가 갔다 올래?”
내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갔다 올게요.”
“혼자?”
“저 혼자 갔다 올게요.”
“나비야, 갔다 올 수 있겠어?”
“네.”
나는 곧바로 가방에서 손전등을 꺼내 주택으로 향했다.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
텐트에서 일직선으로 걸어가자 주택이 바로 보였다. 그리고 주택 현관문 앞에 있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의 지퍼를 열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떡볶이 재료잖아.’
거기다가 각종 튀김까지. 나는 기분 좋게 가방을 메고 다시 텐트 쪽으로 걸어갔다. 근처에 다다르자 먼저 반겨준 사람은 이서혁이었다.
“나비야, 무슨 음식이야?”
“떡볶이요.”
“떡볶이?!”
“튀김까지 있어요.”
나는 디아 선배님께 불을 맡기고 가방을 열어서 떡볶이 재료를 꺼냈다.
“와!”
디아 선배님이 떡볶이 재료를 보면서 감탄했다.
“떡볶이 할 줄 아시는 분?”
그러나 내 질문에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네.’
하는 수 없이 모닥불 위에 냄비를 올린 뒤 생수를 부었다.
“떡볶이 할 줄 알아?”
“…어느 정도는요?”
떡볶이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간단한 음식이다. 일단 끓지 않는 물에 고추장을 풀었다. 그리고 조금씩 숟가락으로 저어주면서 고운 고춧가루를 넣은 다음, 설탕과 물엿을 풀었다.
“맛있겠다…….”
저 멀리에 있었던 서고운이 어느새 가까이에 다가왔다.
“숙소에서 자주 요리해요?”
“아니요. 저는 안 하고 멤버 형들이 요리를 자주 해요.”
“능숙하길래 요리 자주 하는 줄 알았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다시마로 육수를 내면 더 좋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그 대신 미리 숙소에서 가져온 소고기 다시다를 가방에서 꺼내서 냄비에 풀었다.
“도와줄 거 있어?”
“대파랑 양파 좀 썰어주셔야 하는데…….”
칼이 없네.
“가위는 있던데.”
“어디에 있어요?”
“텐트에서 봤어.”
서고운이 텐트에서 가위를 꺼냈다. 부엌 가위네.
“남주 형, 부엌 가위로 대파랑 양파를 잘라주세요.”
“응.”
계속 이남주의 뺨이 거슬렸다. 떡볶이를 먹고 밴드라도 줘야겠다. 상처 연고도 가져왔던가? 그 뒤로 물이 끓자 떡과 어묵을 넣었다.
‘이제 간을 보면 되겠는데.’
“숟가락 있는 분?”
“나!”
이서혁이 숟가락으로 간을 봤다.
“음, 뭔가 부족해.”
“간은요?”
“맞긴 한 것 같은데…….”
간은 맞는데 뭔가 부족하다… 나는 떡볶이에 고추장을 조금 더 넣었다. 이러면 간이 맞겠지? 그래도 한 번 더 보는 게 안전하니까. 나는 이서혁한테 슬쩍 말했다.
“서혁 형, 한 번 더 간 좀…….”
숟가락을 가져와 신중하게 간을 본 이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캬… 딱 맞아.”
“맞다니 다행이네요.”
“진짜 맛있어.”
그제야 마음이 놓여 미소를 지었다.
“몇 분만 더 끓이면 떡볶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면 사리도 넣을까요?”
“어!”
“지금 라면 사리를 넣어야 좋거든요.”
근처에서 이서혁이 소리쳤다.
“네스트 애들은 좋겠다. 이런 떡볶이 맨날 먹겠네.”
“한 번도 안 해줬는데요?”
“그래? 그러면 요셉이 놀려줘야겠다.”
“아, 그건…….”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정요셉한테는 안 된다. 정요셉의 질투는 약간 무섭단 말이지.
“왜 안 돼?”
“…아니요. 마음대로 하세요.”
나중에 해주면 되겠지. 라면 사리를 떡볶이에 넣자 국물이 라면 사리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나는 종이컵에 떡볶이를 넣어서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정후 형, 떡볶이 먹을래요?”
“내가 왜!”
“진짜죠?”
“안 먹어.”
박정후에게도 물어봤지만 안 먹는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네.
“맛있어!”
먼저 한 입을 먹은 디아 선배님이 감탄을 터트렸다.
“어렸을 적 초등학교 앞에서 먹던 그 맛이야!”
“감사합니다.”
“이 떡볶이는 계속 생각나겠다.”
디아 선배님이 드셨으니까 나도 떡볶이를 한 입 먹었다. 밀떡에 고추장이 잘 배었다. 특히 밀떡이 쫀득해서 좋았다.
“정후 형, 진짜 안 드세요?”
“진짜 안 먹어.”
이번에는 튀김을 꺼내 냄비에 하나씩 놓았다. 고추튀김, 고구마튀김, 오징어튀김, 김말이. 그리고 대망의 치즈를 넣었다.
“정후 형 치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남주가 슬쩍 말하자 박정후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그래? 나는 박정후를 보면서 떡볶이 국물에 스며든 치즈를 보여주었다.
“자… 정후 형, 보물은 어디에 있어요?”
“야, 범나비… 지금 고문하냐?”
“고문이 아니라 그냥 떡볶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요.”
내가 치즈 떡볶이를 한 입 먹자 박정후의 목덜미가 움직였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로 치즈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치즈가 부드럽게 씹혀서 고소한 게, 매콤한 떡볶이랑 잘 어울리네요.”
“…어?”
“원래 잘 알고 있는 맛이 최고라고.”
이번에는 박정후의 귓가에 튀김을 씹으면서 친히 ASMR을 해주었다.
“야! 꺼져!”
꺼지라는 박정후한테 말했다.
“정후 형?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면 떡볶이 드릴게요.”
“차라리 나를 죽여. 어디에 있는지는 절대 안 말해줘.”
옆에서 듣던 디아 선배님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말했다.
“그건 안 돼. 살려놔야지. 계속 떡볶이로 고문해.”
“어떻게 고문할까요?”
“뭐, 죽지 않을 만큼만 고문하자.”
졸지에 보물 지도를 위한 ASMR 대결이 펄쳐졌다. 박정후는 괴롭다는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빽 질렀으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살려두길 잘했네.’
돌연프에서 품게 되었던 박정후에 대한 악감정을 이렇게 풀다니. 역시 사람의 업보는 돌아오기 마련이네.
“떡볶이 재료 아직 남아 있는데 더 만들까요?”
“응!”
서고운이 입에 떡을 한가득 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만들게요.”
***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참가자들을 확인했다. 디아 선배님과 서고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다음으로 박정후의 상태를 확인했다.
배가 고픈지 힘이 없는 박정후는 나를 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박정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왜.”
내가 아침에 박정후를 보러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닌.
“정후 형, 저 싫어했죠?”
“…어?”
돌연프 때부터 왜 나를 싫어했는지 궁금했으니까.
“왜 싫어했어요?”
“…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이유가 있겠죠.”
박정후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꼴불견이라서.”
“…꼴불견?”
“갑자기 AA 연습생들 사이에 들어가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짜증 났으니까…….”
“그래서 사람 괴롭히고 그랬어요?”
“…그래.”
“뒷동산에서 날 밀치고 날 따라 하고?”
“야! 따라 한 건 다 이유가 있었어. 본부장님이 너 따라 하라고 했단 말이야.”
나를 따라 하라고 했다고?
“네 컨셉 지독했잖아. 보부상 컨셉, 막내 컨셉, 착한 컨셉.”
“…허.”
“나도 역겨워서 너 따라 하기 싫었거든? 그런데 아이돌 데뷔하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아, 데뷔를 위해서 따라 하고 괴롭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정후의 정강이를 깠다.
“악!”
“아프죠?”
“…그래서 뭐! 왜!”
정강이를 더 때릴까. 당당한 박정후를 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형이 싫었어요.”
“…….”
“뜬금없이 사람 괴롭히고, 어리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
그래도 염치는 있는 모양이네.
“지금 더 때리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
“보물 어디에 있는지 말해요.”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건가? 내가 빤히 쳐다보자 지레 놀란 박정후가 소리를 질렀다.
“…왜, 왜 쳐다봐!”
…어쩌면 그냥 바보일 수도 있겠네. 나는 박정후를 보면서 웃었다.
“저는 지금 정후 형을 죽여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방송상 힘들게 보물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면 재밌잖아요?”
“…너.”
“정후 형도 분량이라도 챙겨야 연예계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
“정후 형.”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박정후가 이를 갈았다.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어디에 있어요?”
“주택.”
…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