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연말 무대
키오 시절, 도라임과 친한 금금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그 선배랑 어떻게 그렇게 친하게 지내?”
“라임 선배? 그냥 져주면 되던데.”
“져준다고?”
“나를 우습게 보는 인간은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돼.”
간단하고 쉬운 방법.
“음방 1위를 못 했다니. 돌연프 1위도 별건 아니다.”
“선배님 말처럼 별거 아니긴 하죠.”
“…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선배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나를 쳐다보는 도라임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넌 누구야?”
“네스트의 막내 범나비라고 합니다.”
“막내가 말을 참 잘하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온 도라임은 키가 작아 뒤꿈치를 들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애가 있네. 나는 이런 녀석들이 좋더라.”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평생 현실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 알았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복도에 나오자 뒤이어 다이아몬드 멤버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이아몬드 멤버들은 우리를 비웃더니 주이든의 어깨를 치고 트렌디 대기실로 들어갔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이럴 때 선배가 있으면 좋긴 하지.
“…참았다, 참았어.”
주이든은 복장이 터진다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연예계에서는 빵 뜨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범나비, 너는 그러고 싶어?”
“뭘요.”
“그러고 살면 안 돼. 사람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자존심은 있어봤자 무의미했다. 그래도 멤버 중 한 명쯤은 있는 게 낫겠지. 나는 주이든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다음엔 그렇게 할게요.”
“그래, 이번엔 착한 말을 하네.”
그러고는 화목현이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비야, 고맙다. 잠시 정신이 멍해져서 말을 못 했거든.”
“아.”
어떻게 보면 화목현은 사회생활 첫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런 막말을 들었으니…….
“다음엔 내가 나설게.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제가 해도 괜찮은데.”
“넌 어리잖아.”
어리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화목현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목현 형 말처럼 나서지 마. 그러다가 한 대 맞으면 어떻게 해?”
“우리 이든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정요셉! 요즘 세상은 무섭다고!”
“어제 조폭 영화 보더니~”
이정진이 주이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티격태격하면서 싸우다가 텐트에 도착하자 이남주가 손을 흔들었다.
“형들!”
“남주야, 어쩐 일이야?”
“형들도 보고, 목현 형한테 이것도 가져다주러 왔지.”
이남주의 손에 들린 건 핫팩과 히터기였다.
“어, 나 추위 많이 타는 거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우리 대기실에서!”
그러나 화목현은 양손을 저으면서 핫팩과 히터기를 거부했다.
“아니, 너희 대기실에 있던 건데 이걸 우리한테 주면 안 되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 대기실은 건물 내부에 있어서 따뜻하거든.”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맞다. 그랬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목현은 핫팩과 히터기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이남주 씨, 우리 대기실에 온 진짜 목적이 뭘까~?”
정요셉이 이남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 최애 만나러 왔어요.”
최애? 곧바로 멤버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사실 제 최애가 나비거든요.”
“…저요?”
웬 최애를 들먹여? 그때 이남주가 입모양으로 나한테 ‘시스템’이라고 말해주었다. 시스템이 그러라고 했군. 어쩔 수 없지.
“예전에 나비도 제가 최애라고 했거든요.”
저 말의 파장은 컸다. 주이든은 눈이 커지더니 나와 이남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랑? 남주랑?”
“아, 예전에…….”
“그래서 너 남주한테 얻어먹고 그런 거야?”
뜻밖이라는 듯 주이든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 나를 보면서.
“제가 사준 거죠. 최애라서.”
“…네, 그렇대요.”
이남주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주이든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저런 말을 하면 넌 닥치라는 듯한 표정을 짓잖아!”
“제가 언제요.”
“또, 또! 지금 표정이 이상하거든!”
…어떻게 알았지. 전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으나 주이든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 멤버로 데뷔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은연중에 이남주가 한 말이 귀에 들려왔다. 크래프트 멤버들이랑 트러블이 심한가? 나만 들은 말이 아니었는지 화목현이 히터기 앞에서 말해주었다.
“다음 생이 있으면, 그때 같이 팀 하면 되지.”
“…하하, 다음 생에는 꼭 그러면 좋겠네요.”
곧 연말 무대가 시작될 거라는 스태프의 말을 듣자마자 이남주는 텐트에서 벗어났다. 그제야 정요셉이 화목현을 보며 말했다.
“…크래프트 멤버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거겠지?”
“요셉아, 그런 말은 나중에.”
“예, 목현 형~”
돌연프에서 크래프트랑 만난 적이 있었지. 그때도 이남주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뭔가가 있는 거겠지.
“어! 연말 무대 시작한다!”
패드를 확인한 주이든이 신호를 보냈다. 멤버들은 옹기종기 의자에 앉아 한 개의 패드로 연말 무대를 시청했다.
“연호 형, 우리 순서가 언제죠?”
“키오 다음.”
키오 다음이라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연말 무대의 첫 순서는 신인 아이돌이었다. 그 무대를 장식한 건 HOR 엔터의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 존나 못생겼다
-네스트랑 크래프트가 잘생긴 편임
-남주 언제 나와?
-이남주!!!!!!
-ㅋㅋㅋ또 남주 찾네
-크래프트에서 이남주가 제일 잘생겼잖아
-이남주가 아이돌이었구나 사진만 봤는데
크래프트의 인기보다 이남주의 인기가 높나 보군…….
“얘들아, 우리도 무대 준비해야지.”
패딩을 벗자마자 확 들어오는 추위에 몸이 떨렸다. 영하 11도라더니.
“눈이 내리고 있어서 바닥이 조금 미끄럽거든. 구두에 흙 묻히고 가.”
김연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바닥에 흙을 뿌렸다.
“우리는 연호 형 없으면 큰일이겠다~”
“뭘, 다른 매니저 오면 다를 거야.”
“연호 형! 계속 우리 매니저 해줘야지, 어딜 가려고~”
정요셉이 어디 가지 말라며 김연호를 붙잡았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는데 김연호의 섬세한 배려가 고마웠다.
“네스트 올라갈게요!”
그렇게 김연호의 대답을 듣지도 못한 채 우리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아악!”
팬들의 환호에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런데 무대 바닥을 구두로 문질러 보자 몸이 휘청거렸다. 이러다가 슬라이딩하면서 바닥에 엉덩방아 찧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AR이 켜졌다.
‘어?’
***
김올팬은 연말 무대를 보다가 네스트의 무대를 보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뭐야?”
누가 봐도 바닥이 미끄러워서 몸이 휘청거리는 멤버들이 보였다. 거기다가,
-시작한 거야?
-우당탕탕 연말 무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뭐야…
-왜 AR이 켜짐?ㅋㅋㅋㅋ
멤버들이 당황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데 뭔가 이상했다.
-ㅋㅋㅋㅋㅋAR은 아니겠지
-??????
-왜 AR이 켜졌지
노래보다 멤버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 김올팬은 AR이 켜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AR까지 꺼지는 바람에 방송 사고에 이르렀다.
-반주가 왜 없어
-이게 무슨
-공중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냥 생라이브인데?
범나비가 웃으면서 인이어를 벗었다. 반주가 필요 없다는 듯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유혹에
너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
나는 미쳐가나 봐 WO WO~
세게 올라가는 고음을 들으며 생라이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으니까.
-이야 범나비 독기
-라이브는 못 까겠다 ㄷㄷ
-이게 아이돌 실력?
-쟤 누구
-네스트 막내 범나비
-우리 나비 노래 잘해~
김올팬은 범나비를 따라올 신인 아이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허.”
후반으로 흘러가자 눈바람이 거칠게 쳤다. 멤버들도 눈을 뜰 수 없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무대를 이어갔다.
-이 정도면 안쓰러운데? ㄹㅇ
-공중파야 ㅅㅂ
-네스트가 밖에서 무대를 해? 이상함 신인들도 안에서 하던데
-다이아몬드는 안에서 무대 했잖아
그러나 네스트는 그런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완벽하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어?
-무대 끝난 거 아니었어?
-노래가 다시 나오는데
그렇게 네스트의 무대가 끝난 줄 알았건만,
“…뭐야?”
김올팬은 팔짱을 풀면서 TV에 얼굴을 박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방청객들도 엉뚱한 노래가 나오자 당황한 듯했다.
-공중파 뭐 하냐?
-이게 무슨 곡임?
-트로트 같은데
그러면서 채팅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멤버들도 당황했는지 서로의 눈을 보면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걱정과 다르게 범나비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들었다. 이 노래는 트로트인데 과연 잘 부를 수 있을지.
-나는 나는 나는
기다릴 수 없어! (없어!)
너는 너는 너는
사랑할 수 있어! (있어!)
범나비는 손가락으로 팬들을 가리키면서 노래를 맛깔나게 불렀다. 어디 대학교 축제라도 온 것처럼 앞에 앉은 팬들이 가사를 따라 불렀다.
-ㅋㅋㅋㅋ신인이ㅋㅋㅋㅋㅋㅋ
-다른 멤버들은 뒤에서 춤추네ㅋㅋㅋㅋ
-저기 재밌겠다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겨웠던 연말 무대가 한순간에 화려하게 바뀌었다.
-너도 날 좋아해! (좋아해!)
나는 널 사랑해! (사랑해!)
이대로 우리는 끝까지
가는 거야~ (가는 거야~)
서서히 김올팬도 그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
“네스트, 고마워요!”
무대에서 내려오자 방송작가가 고맙다며 인사했다. 다음 노래를 불러야 할 가수가 오지 않아서 방송 사고가 난 것이다.
“진짜 고마워요…….”
어쩐지 MR도 없더라. 방송작가는 내 손까지 잡으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내년엔 대기실을 안으로 정해주겠지…….’
그나마 이번 기회로 나는 네스트의 메인보컬이라고 각인이 됐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대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연호 형이 챙겨준 흙 덕분에 무대 잘했어!”
주이든이 김연호를 보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래? 난 너희들이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했어.”
“조마조마하긴!”
앙칼진 주이든의 목소리에 김연호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나 더,
“형들, SNS에 올릴 사진 찍고 싶은데.”
방송 사고가 났지만 우리는 괜찮다는 모습을 팬들한테 보여주면 좋을 테니까.
나의 제안에 멤버들은 좋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SNS~? 좋지. 단체 사진?”
“요셉 형 말대로 단체 사진으로 가죠.”
그 말에 모두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그렇게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나는 의자에 앉아 형들이 보는 앞에서 SNS에 글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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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언제나 사랑하는 #네온
연말 무대는 재밌었나요?
(단체_하트_jpg)
(개인_셀카_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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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석연치 않았다. 그 이유는,
└ 얘들아 공식 색은 언제 발표하는 거야!!!
└ 응원봉도 좀…
└ 응원하는 맛이 안 난다
공식 색과 응원봉이 없어서 응원하기 힘들었다고.
이것도 나중에 팀장님한테 물어봐야겠다. 응원봉은 언제 생기냐고.
“방송작가가 그러는데, 이제 우리 무대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야 한대.”
슬슬 의자에 앉아 있던 선배님들이 빠질 시기니 신인이 앉아야 한다는 거군. 그러다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려는 찰나, 시스템창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힌트:연말 무대에 올라갈 때 제일 마지막으로 가기.】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핑계 댈 겸 가방이라도 가져오자.
“형들, 저 가방 좀 가져올게요.”
나는 뒤늦게 가방 가져오는 척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나비야, 빨리 나와.”
김연호의 재촉에 멤버들의 뒤를 따라가려는 그 순간, 건물 안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나를 덮치더니 피할 수도 없이 내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죽어, 이정진.”
“……?”
나는 칼에 찌른 그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들었다.
“…오한준.”
“범, 범나비?”
“…너.”
이 새끼가 왜? 나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오한준의 멱살을 꽉 잡았다.
“이 개새끼가.”
…왜 칼로 사람을 찔러. 칼에 찔린 옆구리가 아팠지만 오한준을 놓칠 수는 없었다. 끝까지 오한준을 잡고 있다가 나를 부르는 멤버들의 목소리에 손을 놔버렸다.
“나비야!”
“…형.”
화목현의 얼굴을 보고 나는 오한준에 대해서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회귀하게 된 첫 번째 이유 : 이정진의 죽음.】
망할 시스템창이 이상한 말을 지껄였기 때문에.
‘…이정진의 죽음?’
설마… 원래는 이정진이 죽었어야 했던 건가… 그렇게 나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