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첫 팬 싸인회
팬 싸인회장으로 향하는 길에 김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팬들이 좋아하겠다.”
이렇게 김연호의 허락도 받았다.
“나는 스티커를 찾아볼게.”
“왜요?”
“일명 얼굴 꾸미기.”
화목현은 진지한 태도로 여러 가지 스티커를 찾아보았다. 어차피 서점에서 열리는 팬 싸인회니 근처에서 스티커를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얼굴 꾸미기를 좋아할까?”
“좋아할 거예요. 첫 팬싸고.”
나도 팬들과 만나는 자리라서 기대가 됐다. 창밖을 보면서 여유를 즐기는데 시스템창이 반짝였다.
「문제 17, 싸인하기! (0/100)
페널티:팬 싸인회의 나쁜 소문」
뭔가 의심쩍었다. 팬 싸인회에서는 어차피 싸인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쉬운 문제를 준다고?
‘그래도 즐겁게 생각하자.’
아직 한참이나 남은 거리를 보면서 아직 3개나 남아 있는 랜덤 박스를 생각해 냈다.
한번 까볼까. 좋은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랜덤 박스.’
【랜덤 박스 OPEN】
【미래를 예측하기(1회성):단어로 나옴! [1번]
나를 주목해(24시간):나를 싫어해도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아이템. [1번]
체력 200%(1회성):미래의 체력을 가져온다. [1번]】
나를 주목해? 이 아이템을 써볼까.
【나를 주목해를 사용합니다.】
***
네스트의 첫 팬 싸인회. 첫 주 앨범 판매량만 15만 장을 돌파했다. 그만큼 팬 싸인회에 당첨될 확률이 낮다. 그런데 그 확률을 이백수가 뚫었다. 고작 53장을 사서. 팬 싸인회 컷을 공개하는 건 좋지 않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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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대면 팬싸 컷 알려 드립니다^^
몇 장 사서 네스트 팬싸 컷했는지 알고 싶은 분들은
가격 1.0
쪽지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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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나비 장미 침대 셀카 구합니다ㅠㅠ
가격은 #선제시 #네스트 #범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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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포토 카드도 중복 없이 최애인 나비가 나왔다. 특히 나비의 장미 침대 셀카와 입에 문 장미 셀카는 이미 포카 앨범에 넣어둔 상태였다. 평생 쓸 운을 여기에 다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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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 시발 AA 엔터 미쳤냐?
포토 카드에 장미 카드를 왜 처넣고ㅡㅡ
애들 포카인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장미 카드인 거 ㄹㅈ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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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망한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백수의 싸인 순서는 50번. 시간이 없다면서 쫓기지 않는 중간이다.
“하…….”
네스트도 떨리겠지? 이백수는 떨리는 마음으로 앨범을 펼쳤다. ‘나비야,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줘’라고 포스트잇에 미리 적어놨다.
‘해줄까…….’
나비가 팬들한테 잘해주긴 하는데. 으아, 팬들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ONLY ONE 네스트입니다!”
헉… 이백수는 숨을 멈출 뻔했다. 네스트가 집사처럼 댄디한 정장에 팔뚝에 수건을 걸고 인사를 했다.
“오늘은 네스트가 네온을 모신다는 생각으로 입어봤는데 어때요?”
요셉이 빙그르르 몸을 돌며 옷을 보여주었다. 미쳤다면서 사진을 찍는 네온의 소리와 함성이 뒤섞였다.
“이거 우리 막내가 낸 아이디어예요.”
목현이 나비를 보면서 말했다. 오늘따라 나비의 얼굴이 더 빛나는데 착각일까? 아니다. 착각은 무슨! 오늘따라 유독 잘생겼네…….
‘살이 빠져서 그런가?’
이백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 더 준비한 게 있습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비는 주머니에서 하트와 별 스티커를 꺼냈다.
“이 스티커를 저희 얼굴이나 손등에 붙여주세요.”
아예 대놓고 스티커를 얼굴에 붙이라니. 이게 무슨 횡재인지.
‘시발, 미쳤어!’
욕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팬싸 시작합니다!”
기분 좋은 팬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50번째 순서인 이백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스티커를 어떻게 붙이냐고.
“팬 싸인회 끝나고 나서는 스케줄이 없으니까, 우리 네온과 오래 있을 거예요. 좋죠?”
간간이 정요셉과 주이든이 팬들에게 말을 걸면서 재미를 더해주었다. 어떻게 이런 혜자 팬 싸인회가 다 있지? 이건 미쳤어, 미쳤다고!
드디어 이백수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목현이 말투를 따라 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와씨, 푸른색 머리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역시 공작새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니까.
“저, 저… 공작새라는 별명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멤버들한테 공작 형이라는 말도 듣거든요.”
내가 말을 못 하고 있자 목현이 내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물어봐도 돼요.”
“…그, 어제 뭐 먹었어요?”
목현은 나비를 보면서 말했다.
“어제 치킨 먹었어요. 근데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 드릴까요?”
“뭔데요?”
“나비가 자기는 팬들한테 잘 보이겠다면서 치킨을 안 먹는 거 있죠.”
나비가? 목현의 생뚱맞은 답변에 이백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손의 떨림이 사라지면서 이백수는 홀로그램 하트 스티커를 목현의 손등에 붙였다.
“예쁘죠?”
“네!”
“이거 이든이랑 나비가 골랐어요.”
그리고 목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싸인을 했다.
“다음에 또 봬요.”
“네! 꼭 또 올게요!”
서서히 긴장이 풀린 이백수는 그 순간 정진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목현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정진의 눈웃음은 참 예뻤다.
“정진이는 예뻐! 눈웃음이…….”
“눈웃음이 예쁘다니, 고맙습니다.”
역시 이정진은 실물이 최고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오히려 방송용 카메라가 별로라는 편견이 생겼다.
“진짜 잘생겼어요.”
“…와, 감사합니다.”
정진이가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데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귀여워! 놀리고 싶어! 이런 감정, 오랜만이다.
“스티커 어디에다 붙이실래요?”
“입꼬리에 붙일래요!”
순서가 순서인지라 스티커를 붙일 공간이 없긴 했는데…….
“아, 저 눈 감을게요.”
“어, 어? 이거 위험한 발언 아니야?”
그래도 정진이는 눈을 감으며 스티커를 붙일 때까지 기다렸다.
‘왜 심장이 떨리냐… 진짜로.’
입꼬리에 스티커를 살짝 붙이자 정진의 속눈썹이 움직였다.
“와, 속눈썹 길다…….”
“어머니 속눈썹이 길거든요.”
정진이 어머니의 속눈썹이 길다… 나중에 팬 싸인회 후기에 적어야지. 이백수는 꼼꼼하게 머릿속에 저장해 놨다. 정진의 싸인을 받고 옆으로 넘어가는데 요셉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어? 많이 안 했는데.”
“우리 네온이 많이 기다렸는데.”
‘우리 네온이’라는 말에 이백수는 눈앞이 아찔했다. 얘네들, 팬 싸인회 처음 맞지?
“궁금한 거 없어요?”
“요셉이는 숙소 룸메이트가 누구예요?”
“목현 형이요! 근데 다음 룸메이트 정하면 나비랑 하려고요.”
“어, 왜요?”
“목현 형이랑 있으니까 팬싸에 풀 에피소드가 없어서.”
요셉은 능숙하게 손등을 보여주면서 스티커를 붙이라는 듯이 굴었다. 진짜 팬 다루는 솜씨가 남다르네. 나는 중지에 하트 스티커를 붙였다.
“이거 의미가?”
별다른 의미는 없는데!
“어! 아니! 그냥 절 기억해 달라고…….”
“기억할게요~”
다음으로 넘어가자 이든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안녕하세요!”
“요셉이랑 옆에서 무슨 대화를 했길래 웃음이 여기까지 들릴까요? 저 질투 심한데!”
진짜 참새 같다. 어제 미니 팬미팅 후기에서도 이든은 참새랑 비슷하다는 말이 많았다. 생긴 게 참새 같아서 그런가. 이백수는 이든이 귀엽다고 느꼈다. 막내보다 귀엽다니.
“나는 이든이도 좋아.”
“저도 좋아해요? 그럼 다행인데… 궁금한 점은 없어요?”
궁금한 점… 이백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곱씹었다.
“팬들이 참새라고 부르는데, 어때요?”
“저는 참새도 좋긴 한데, 독수리랑 더 닮지 않았어요? 위엄도 있고!”
독수리는 화목현과 비슷하지 않나. 누가 봐도 이든이는 참새다. 이백수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이든이 스티커로 얼굴을 가렸다.
“대답 안 하니까, 얼굴 안 보여줄 거예요!”
“이든이는 독수리도 닮았지만… 참새랑 더 닮아서 잠시 고민했어요.”
슬쩍 스티커를 내린 이든이 이백수를 슬쩍 봤다.
“…독수리, 닮긴 했어요?”
“네!”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든이 들고 있는 볼펜이 움직였다. 싸인 밑에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이름이?”
“이백수요.”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옆으로 옮기자마자 나비 손등의 핏줄을 봐버렸다.
‘나비가 실존해!’
이백수는 돌연프 방청도 여러 번 갔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나비를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헉!”
“헉?”
나비가 있다. 이백수는 하염없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최애가 바로 앞에 있다니…….
“진짜… 저…….”
심지어 목소리까지 떨렸다. 이러다가 대화도 못 하고 가면 안 되는데. 나비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 울면 저 못 보는데. 많이 봐야죠.”
“…눈물이 막 나서.”
나비가 매니저한테 휴지를 받아 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뒤에서 네온의 비명이 들렸다.
“그… 나비는 이번에 팬들과 만나서 어때?”
“팬들과 만나서 행복해요, 엄청 많이.”
최대한 눈물을 참으면서 이백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울고 있어. 1초라도 더 말을 걸어야 하는데…….’
이게 아이돌 첫 팬 싸인회도 아니면서. 이백수는 콧물을 삼키며 스티커를 뗐다.
“…귀, 귀에 붙여도 돼?”
뒤에서 매니저가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나비가 고개를 돌려 귀를 보여주었다.
“붙여도 돼요.”
나비의 냉한 얼굴에는 피어싱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 나중에 피어싱 한 번만 해줄래?”
“네, 기억하고 있을게요.”
이제 싸인을 할 차례가 되자 나비가 이백수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요?”
“이, 이백수!”
그러고는 나비가 포스트잇에 무언가 적어주었다.
《Q. 팬들한테 전하고 싶은 말은?》
-첫 만남도 마지막 만남도 나였으면
이백수는 이게 실제 상황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헐.’
앨범을 들고 내려오는데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도 나비를 계속 구경했다. 오늘따라 빛이 났다.
***
팬들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유쾌하다.
“나비야! 꽃도 들어줘!”
멀리서 들려오는 요청에 팬들한테 받은 장미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입에 장미도 물어주면 안 될까?”
나는 장미를 입에 물고는 한술 더 떠서 윙크도 했다. 그리고 싸인을 할 차례가 되어 아쉽게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팬분이 계단을 올라왔는데, 다른 멤버의 싸인은 받지 않고 오로지 주이든에게만 앨범을 내밀었다.
“이든아, 여기에 싸인해 줄래?”
“어, 어… 네!”
낯익은 얼굴이라서 단번에 누군지 알아보았다. 금금이의 개인 팬. 키오 시절 금금이한테만 싸인을 받아 가서 갠팬 빌런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팬이었다.
나를 못 본 척 지나쳤던 적도 많았고.
“옆으로 가주세요.”
기어코 김연호가 지적을 하자 갠팬 빌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갠팬 빌런은 싸인을 받기는커녕 무대 밑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시스템 때문에 싸인을 해줘야 하는 입장인지라.
“누나, 어디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