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투두 네스트 – 배추 뽑기
오늘의 목적이 배추 뽑기인지, 진흙 싸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만큼 나와 주이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이 묻어 있었다.
“범나비, 싸움 잘한다?”
“형도요.”
진흙 싸움으로 진을 빼는 바람에 배추 뽑기는 부진했다.
“형들, 쟤들 싸운다~ 싸운다~”
아예 정요셉은 자리를 잡고 우리를 구경했다. 나와 주이든은 싸우다가 말고 고개를 돌려 정요셉을 쳐다보았다.
“야, 정요셉! 너는 빠져!”
“요셉 형은 빠져요.”
정요셉은 우리를 보면서 혀를 내밀며 지나가는 화목현의 팔을 붙잡았다.
“목현 형, 쟤들 봐~”
“왜? 무슨 일인데?”
“내가 놀렸다고 저렇게 성을 내잖아.”
“네가 잘못했겠지. 싸우면 그냥 놔둬.”
“싸우니까 더 괴롭혀야지!”
서럽다는 듯이 울상을 짓는 정요셉의 목덜미를 이정진이 붙잡았다.
“일해.”
“…아악! 우리 정진이 형, 손길이 너무 매섭다.”
“일도 안 하고 놀잖아.”
질질 끌려간 정요셉은 버둥거리면서 배추를 옮겼다.
“야.”
“왜요?”
“우리 이러다가 지려나?”
“예, 당연하잖아요.”
“…그래?”
그럼 싸우고 있는데 이길까.
덩달아 위기감을 느낀 주이든은 다시 배추를 뽑기 시작했다. 나도 배추를 트럭에 옮기면서 열심히 진흙을 털어냈다.
“범나비, 빨리 옮겨!”
“옮기고 있어요.”
“더 빨리빨리!”
다시 배추를 옮기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어디 난리가 난 거 아닐까요.”
“설마.”
그렇게 바구니에 배추를 담고 고개를 드는데.
“우리 트럭!”
정요셉의 외침에 모두가 트럭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운전자석에 앉아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게 뭐지?
“…뭐야?”
그러더니 그대로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순식간에 배추가 도망가는 꼴을 봐야만 했다. 나는 바구니를 든 채로 허망하게 트럭이 지나간 길을 훑었다.
“범나비, 우리 배추 도둑맞았어?”
“…도둑맞았어요.”
“우리 퇴근은!”
갑자기 추리물로 장르가 변했다. 배추가 있어야 퇴근을 하는데. 도둑이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 배추를 찾을 수가 없었다.
“PD님, 우리 배추는요!”
정요셉이 나서서 질문하자 PD가 확성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농촌 추리물은 없었다! 갑자기 배추를 도둑맞았다? 이 난관을 네스트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네스트는 올라와서 종이의 내용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나와 주이든은 힘겹게 논에서 빠져나와 PD 앞에 도달했다. 먼저 도착한 형들이 종이를 들고 있었다.
“정진 씨, 종이의 내용을 읽어주세요.”
이정진은 종이를 뒤집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네스트.
나는 배추를 좋아하는 도둑, NPC 배도라고 한다.
당신들이 뽑은 배추를 되찾고 싶다면
일단 내가 알려주는 주소로 와라.
오는 길에 마을 사람들과 만나게 될 텐데
거기에는 나도 섞여 있다.
내가 누군지 맞혀보겠나?》
여기에서 NPC가 나올 줄이야. PD가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네스트는 배추 도둑을 맞혀야 상금 100만 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김치 40포기를 담가야 합니다.”
사악한 PD의 모습을 보면서 멤버들은 배추 도둑을 잡겠다며 강렬한 의지를 표했다.
“얘들아, 배추 도둑 꼭 잡자. 우리 배추 99포기 뽑았거든.”
화목현의 평온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딱 1포기만 더 옮기면 퇴근할 수 있었을 텐데. 배추 도둑 때문에 퇴근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허망하게 앞을 보고 있는데 자전거를 탄 경찰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 예?”
“잠깐만요.”
경찰이 냅다 우리를 향해 옆돌기를 했다. 주이든은 깜짝 놀라 습관적으로 내 뒤에 숨었다.
“배추 도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형이 누구죠?”
“접니다.”
화목현이 말했다.
“잠시 호구조사가 있겠습니다. 나이는?”
“22살이요.”
“키는?”
“188입니다.”
“확실히 크군요.”
경찰이 고개를 들어 화목현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배추 도둑인가?”
배추 도둑? 이정진과 정요셉이 다가온 경찰을 팔로 막았다. 나는 상황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경찰한테 질문했다.
“왜 형을 배추 도둑으로 모는 거죠?”
“배추 도둑이 화목현 씨랑 키가 얼추 비슷하거든요.”
배추 도둑의 키가 목현 형과 비슷하다? 배추 도둑의 정보 하나를 입수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화목현이 말했다.
“저희는 배추를 도둑맞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배추 도둑일 리가 없잖아요.”
경찰은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습니까?”
경찰을 말을 하다가 다시 옆돌기를 했다.
“아, 제가 옆돌기를 안 하면 몸이 쑤시는 체질이라서… 양해 부탁드립니다.”
몸이 쑤실 정도로 잘 돌긴 했다.
“그건 그렇고… 배추 도둑은 배추만 보면 환장을 하나 보네요?”
“환장하죠. 집에서 매일같이 김치를 담글 정도예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배추를 도둑맞을 때마다 각 집마다 택배로 김치가 왔었거든요.”
배추 도둑, 배추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 힘든 김장을 매일같이 할 정도라면…….
“내가 정보를 적을게.”
어디서 볼펜과 수첩을 가져왔는지 이정진은 수첩에 내용을 적었다.
“그 밖에 배추 도둑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김치 냄새가 많이 나요.”
“…김치 냄새가요?”
“걔를 물에 넣으면 김치찌개 냄새가 날 거예요.”
…정말이지 제작진이 미친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것도 김치에 환장한 캐릭터라니.
“김치찌개 냄새가 어떻게 나? 김치찌개를 들고 다니나?”
옆에서 주이든이 지나가듯 물어보자 경찰이 말했다.
“그건 배추 도둑이 김치찌개를 만든 뒤 김치를 이웃들의 대문 앞에 놔두고 가는 바람에… 김치 냄새가 지독하게 난다고 신고가 들어왔었거든요…….”
“그렇다면 배추 도둑이 있는 곳 주변에는 김치 냄새가 나겠네요?”
“그렇죠. …어, 잠시만요, 전화가 왔네요.”
경찰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했다.
“세상에! 돼지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다고 하네요? 저는 그 일을 해결하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배추 도둑에 대한 정보를 적어놓은 수첩이 있습니다. 이 수첩이 있으면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경찰이 내놓은 것은 ‘N’이라고 적힌 탐정 수첩이었다.
“이제 당신들을 저의 파트너로 임명하죠.”
그리고 화목현한테 배추 도둑을 잡으면 연락하라며 핸드폰을 줬다.
“그럼 저는 돼지 하늘 사건을 해결하러 가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그나저나 돼지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볼 수 없지 않나? 경찰은 아까처럼 옆돌기를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이정진은 탐정 수첩을 열어서 배추 도둑의 정보를 읊었다.
“목현이랑 키가 비슷하고, 김치 냄새가 나면서, 집집마다 김치찌개를 만들고 김치를 대문 앞에 놔둔다는 거지.”
“김치찌개를 만들고 다닌다는 건, 자기 집에서는 김치찌개를 못 만든다는 거 아닐까요?”
안에서 할 수 없으니, 밖에서 하려고 했겠지.
“탐정 수첩에 지도도 있네.”
이정진이 펼친 마을 지도는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배추 도둑이 왔다 간 집이 표시되어 있었다.
《신혼부부 – 배추 도둑 안 옴(X)
이장님 – 배추 도둑 안 옴(X)》
“우리는 신혼부부랑 이장님 집으로 가자. 먼저 신혼부부네로.”
***
우선 배추 도둑이 안 왔다는 신혼부부 집에 갔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마당까지 들려왔다.
“똑똑, 안녕하세요~”
정요셉이 입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은 입에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고, 아내가 쓰고 있는 거대한 선글라스에는 작은 눈이 그려져 있었다.
“어… 어! 여보!”
우리의 등장에 놀란 남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보가 좋아하는 돌연프 네스트! 그 네스트가 왔어!”
우리를 좋아한다는 설정인가? 아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선글라스에 그려져 있는 작은 눈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제가 눈이 좀 커서 네스트가 한눈에 보이네요.”
“여보는 큰 눈이 아니잖아.”
“남편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거 웃으면 안 되는데. 멤버들의 웃참이 시작되었다.
“아, 저희가 지금 고기를 굽고 있는데요.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가져와 줄 수 있을까요? 저희가 눈이 커서 작은 물건 찾기가 어렵거든요.”
남편이 갑작스러운 퀘스트를 던졌다. 집에 김치찌개가 있는지 없는지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든이랑 나비가 들어가 봐. 우리는 남편분 도와드리고 있을게.”
거리낌도 없이 나는 주이든과 함께 집 안에 들어갔다. 이상하다. 김치찌개 냄새는 안 나는데?
“범나비, 부엌! 부엌!”
부엌에 들어가자 대놓고 김치가 있었다. 그러나 김치만 있을 뿐, 김치찌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교묘하게 숨어 있나? 그렇게 부엌 서랍과 냉장고를 뒤졌다.
“이든 형, 냉장고에 있는 고기는 꺼냈어요.”
“어, 잘했어!”
고기를 잠시 식탁에 놔두고 다시 냉장고를 뒤지는데 안방의 문이 열렸다.
“…형들은 누구야?”
NPC인 듯한 남자아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리 아빠는요?”
“마당에요. 저흰 아빠가 부탁해서 잠시 부엌에 왔어요.”
“아빠가요?”
낯을 가리는 주이든이 남자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최근에 김치찌개 냄새를 맡은 적이 있어요?”
“그… 혀를 막 때리는 국이요?”
혀를 막 때리는 국이라면 얼추 맞지 않을까. 남자아이가 방방 뛰었다.
“그 국이 있긴 했어요!”
김치찌개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는 말은, 여기도 배추 도둑이 왔다가 갔다는 건가. 이 사실을 알리려고 마당으로 가려는데 남자아이가 우리를 불렀다.
“아, 형들!”
그러면서 방에 있던 종이를 주이든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주라고 했어요!”
《나는야 배추 도둑.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치찌개 명인인 할머니의 이름을 걸고 말하지.
너희들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나를 찾고 싶다면 작은 힌트를 주지.
바로, 나는 남자라는 사실이야.》
여자가 아닌 남자라. 남자란 남자는 다 의심해야겠네.
“남자라는 소식을 알리러 가죠?”
“그래.”
남자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럼 남은 사람은…….’
이장님밖에 없었다.
***
멤버들한테 배추 도둑이 남자라는 소식을 알렸다. 거기다가 남편에게 힌트 하나를 얻었다. 이장님 집에 어린 아들이 살고 있다고.
“저기다.”
마당에 소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이장님, 계세요?”
화목현이 묻자 현관문을 열고 나온 이장님이 지팡이를 짚은 채 문워크를 했다. 이번에는 춤을 추는 NPC인가.
“안녕하세요. 이 근처에서 배추 도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어, 어? 배추 도둑?”
한 바퀴 턴을 하는 이장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 집에는 배추 도둑이 안 왔는데 무슨 일로?”
“아, 혹시 집에 김치찌개가 있나요?”
“아니? 우리 집 사람들은 김치를 싫어해.”
이 집이다. 멤버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이장님 집에 어린 아들분이 있다고.”
화목현의 질문에 이장님은 목 아이솔레이션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은 김치를 보기만 해도 싫어해.”
“정말로 김치를 싫어해요?”
“당연하지. 나랑 유전자가 같잖아.”
내 질문에 목 아이솔레이션을 끝낸 이장님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나?”
뭐길래? 이장님은 갑자기 웬 끈을 가져오더니 우리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쥐가 계속 옷을 뜯어 가는데, 내가 처리할 수가 없어서… 쥐를 잡아줄 텐가?”
배추 도둑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다. 멤버들이 쥐를 잡겠다고 말하자 이장님은 끈을 보며 턱짓했다.
“쥐를 잡으려면 끈이 필요하네. 왜냐하면 쥐가 꽤 크거든!”
크다면… 거의 카피바라 아니야?
“아이고, 허리가 아프네.”
그러면서 이장님은 경건하게 웨이브를 했다. 이장님을 따라서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한 거대한 쥐에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찍찍?”
집 안에 인간 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