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왜 하필 주이든한테
“보면 몰라요? 손 씻고 있는데요…….”
“그걸 내가 모르냐고.”
주이든이 화장실로 들어와 내 팔뚝을 잡아 돌려 세웠다.
“이거 피잖아.”
하필 주이든한테 걸려서. 다른 멤버였다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괜찮다고 하면 끝이다. 그런데 주이든은 내 옷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서 버럭 화를 냈다.
“…의사 선생님은 괜찮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뭔데?”
“그냥 조금 피곤했는지 코피가 나서…….”
“아, 코피가 쏟아져서 입가에 다 묻었다?”
“제가 피를 토했으면 쓰러졌겠죠.”
주이든은 변명이 아닌, 진실을 섞어서 말해야 알아들었다. 그제야 주이든은 의심을 거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지?”
“네, 진짜.”
“…하, 개찝찝한데.”
나는 주이든의 시선을 피하려고 좁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너 화상 입었으면서 말도 안 했잖아! 이번에도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널 어떻게 믿어! 고작 잠깐 밖에 나갔다가 왔더니 화장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온 동네에 소문내려고 하나? 나는 주이든의 목청에 황급히 병실 문을 닫았다.
“이든 형, 사소한 거예요.”
“사소하다고? 그게 왜 사소한 거라고 생각해.”
사소하지 않나. 고작 피를 흘렸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조금. 그래서인지 주이든이 이렇게 열을 내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데뷔 일정이 뒤로 밀릴까 봐 나한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제가 쓰러진 것도 아니고.”
“뭐?”
“이러다가 데뷔 일정이 밀리면…….”
“하! 그거였어?”
주이든의 웃음에 내 말이 끊겼다.
“아, 데뷔 일정 밀릴까 봐 겁나서 거짓말을 하는 거였네?”
“…….”
“젠장… 개답답하다.”
왜 화를 내는지 잘 모르겠다. 현실적인 이유지 않나.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내가 뭐라고.
“죄송해요.”
사과하고 싸우지 말자. 투두 네스트 마지막 촬영이 남았는데 주이든과 싸우면 좋지 않았다. 싸우면 카메라에도 티가 나니까.
“야, 범나비, 죄송하면 끝이야?”
그런데 사과하는 방법이 틀려먹은 것 같았다. 주이든의 화에 불을 지펴서.
“이든 형.”
“이럴 때만 사과하지? 의견 피력할 때는 잘만 떠들었으면서…….”
“…….”
“꼭 인형이랑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왜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항상 사과가 먼저였고, 내 감정보다는 멤버들이 우선이었다. 주이든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의사 선생님한테 말하러 가자. 코피 흘렸다고.”
“괜찮아요. 고작 그런 걸 의사 선생님한테 말하는 건.”
“야! 범나비!”
소리를 지르던 주이든은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놀라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됐다. 그래, 의사 선생님한테 가지 말자. 그러니까 일단 침대에 누워.”
“…딸꾹.”
“누우라니까?”
“네…….”
의사한테 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침대에 누우란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침대에 누웠다.
“진짜로 아픈 곳은 없지?”
“네… 없어요.”
근데 주이든이 멤버들한테 말하면 어떡하지? 그건 안 된다. 나는 주이든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이든 형, 저 코피 흘린 거 다른 형들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
“부탁할게요, 딸꾹.”
주이든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변종이 어디서 나온 걸까’ 하는 눈빛이었다.
“데뷔 직전이라 다들 생각도 많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나도 이기적일 때가 있으니까. 더 이상 말은 안 할 테지만.”
“…….”
“그러다가 곯아. 현실적인 것도 좋지만.”
더 말을 했다가는 주이든과 싸울 것 같았다.
“저 잘게요.”
나는 그대로 왼팔로 눈을 가리며 어두운 세상에 나를 던졌다.
“그래, 차라리 자라.”
주이든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뭐야? 아이스크림 사 왔는데 우리 막내 자?”
“어, 얘 자.”
“뭐야~ 31가지의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는데~”
“얘 자니까 우리는 밖에 나가자.”
“뭐야~ 우리 이든이, 뭔가 분위기가 차분하다~?”
“시끄럽거든!”
주이든은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요셉을 데리고 병실 불을 끈 뒤 복도로 나갔다. 그제야 눈을 가렸던 왼팔을 내리고 세상을 마주했다.
‘…하, 복잡해.’
하필 피를 토할 때 주이든과 마주해서.
그냥 거짓말이라도 섞어서 주이든한테 말하면 됐을 텐데. 주이든과 잘 풀 수 있는 상황임에도 괜찮다는 말로 사정을 숨긴 거니까. 주이든의 눈에는 내가 멍청하고 바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하아.”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너무 생각이 많았다. 일어나면 주이든한테 사과하자. 죄송하다고.
“딸꾹.”
이런… 망할.
***
그 일이 있고,
“이든 형?”
“…….”
“저, 이든 형.”
“비켜.”
사과는 개뿔. 주이든은 나랑 말도 섞지 않았다.
“…뭐야? 둘이 싸웠어?”
정요셉이 나서서 중재를 했으나 주이든은 나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범나비, 나랑 일주일 동안 대화 금지야.”
“네?”
“벌이니까 알아서 감수해!”
정요셉은 나에게 빵을 먹여주면서 말했다.
“저건 우리 이든이가 화나면 하는 행동인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을? 네가?”
정요셉이 네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물었으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주이든은 홀로 침대에 누워서 영화를 시청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든이 원래 화나면 저래.”
“…….”
“놔두면 좀 풀리니까 놔둬. 이든이 뒤만 졸졸 따라다니지 말고.”
퇴원하고 나서도 계속 주이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 사과를 받아달라고. 처음에는 스태프들의 눈치를 봤으나 얼마 후부터는 대놓고 주이든의 뒤를 밟았다.
…어쩌지. 내일 투두 네스트 촬영인데.
“어떻게 잘되겠지! 우리 막내는 빵이라도 먹자~”
“…아, 감사합니다.”
주이든한테도 빵을 먹으라고 물어봤지만 주이든은 몸을 돌려 됐다며 거절했다.
“저런… 우리 이든이, 앙탈은.”
“…앙탈 아니거든!”
“앙탈이지. 내 사랑이 담긴 빵인데. 한 입 먹어줘도 괜찮잖아?”
“윽…….”
멤버들과 트러블이 생긴 적이 없어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 키오 시절에는 멤버들과 싸우다가도 항상 내가 먼저 사과하고 풀었으니까.
“나비야, 내일은 풀리겠지.”
“…네.”
하다못해 화목현도 풀릴 거라는 말만 남겨주었다. 나보다 몇 년을 더 오래 본 사이니까. 나도 그렇게 믿었다.
***
투두 네스트 마지막 촬영 날. 농촌 컨셉에 맞게 화려한 꽃무늬 몸빼 바지를 입고 미끄럼방지 장화를 신었다.
“자, 오늘이 투두 네스트 마지막 촬영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간단한 게임을 해볼 겁니다!”
간단한 게임?
“바로, 배추 100포기를 먼저 뽑는 팀이 퇴근하는 겁니다.”
쉽네. 단순노동은 머리를 비우기 좋았다.
“그래서 PD의 권한으로 제가 팀을 나눠봤습니다.”
PD가 우리를 3명과 2명으로 갈랐다. 그런데,
“우리 이든이! 우리 막내! 파이팅!”
기어코 멤버들이 나와 주이든을 팀으로 만들었다. 주이든은 이럴 줄 알았다면서 멤버들을 노려봤으나 멤버들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막내즈네! 막내즈!”
“정요셉, 너랑 나랑 나이 같잖아!”
“예~ 뭐라고 하는지 요셉이는 잘 들리지가 않아요~ 나는 맏형즈라서~”
나는 정요셉한테 배신감을 느꼈다. 어제 정요셉은 내일이 되면 주이든의 마음이 풀릴 거라며 괜찮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 막내, 힘내!”
애써 고개를 돌려 정요셉의 응원을 무시했다.
“…범나비, 잘해보자.”
“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팀이 된 이상 열심히 하는 수밖에. PD는 두 개의 종이를 보여주었다.
“자, 팀의 리더가 나와서 종이를 하나 뽑아주세요.”
주이든이 앞으로 가서 종이를 뽑았다. 반대편에서는 이정진이 나와서 나머지 종이를 가져갔다.
“동시에 종이를 펼쳐주세요.”
PD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이든이 종이를 펼치자 ‘왼쪽’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제 뒤에 있는 배추가 보이시나요?”
왼쪽과 오른쪽? PD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배추를 심어놓은 논이 눈에 보였다. 그게 왜?
“그러면 이번에는 왼쪽을 봐주세요~”
모두가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았다. 왜 왼쪽의 땅이 축축할까?
“왼쪽은 저희가 미리 물을 뿌려 축축하게 만들었답니다.”
그렇다, 왼쪽은 땅이 물에 젖어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오른쪽은 땅이 물에 젖지 않아 배추를 쉽게 뽑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저 둘 좀 봐~ 얼이 빠졌네, 빠졌어~”
얼이 빠질 수밖에. 게다가 맏형즈 팀은 멤버가 많아서 빨리 퇴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가. 우리는 두 명에다가 축축한 땅을 골랐고.
“시작!”
PD의 신호에 정요셉은 바로 배추 뽑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약이 바짝 오른 주이든이 근처에 있는 흙을 정요셉한테 던졌다.
“응, 안 맞아~”
정요셉이 혀를 내밀면서 주이든의 승부욕에 불을 붙였다.
“우리가 먼저 퇴근한다, 범나비.”
“…당연하죠.”
“우리가 먼저 퇴근해야 저 놀림을 덜 받을 수 있거든. 우리 잘하자?”
주이든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때 정요셉이 장화를 신지 않았다며 PD가 경고를 주었다. 그 경고 내용은 5분 쉬기. 정요셉은 바닥에 앉아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걸 우리 막내랑 이든이는 잘 못하네?”
차라리 입을 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진흙를 보면서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내가 뽑아놓으면 네가 트럭에 옮겨.”
“예.”
“안 그러면 배추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배추가 죽어요?”
“배추가 죽으면 슬프잖아.”
하긴 배추가 죽으면 슬프긴 하겠지. 주이든의 마음에 동화되어 최선을 다해서 배추를 옮겼다.
“잘한다~ 잘한다~ 우리 막내~”
정요셉도 배추를 트럭에 옮기는 일을 하는지 내 옆에 와서 조잘거렸다.
“우리는 벌써 반절 했다? 부럽지? 완전 부럽지?”
“…….”
“엄청 뽑았는데, 구경할래?”
당연히 두 명이 배추를 뽑으니까 반절이나 뽑았겠지.
“처음으로 요셉 형이 얄미워요.”
“얄미워? 우리보다 잘하면 되잖아?”
“우리도 잘해요!”
“아닌데~ 우리보다 못하던데~”
일부러 저렇게 얄미운 태도를 취하는 거겠지만. 물론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재밌겠지.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독기가 올랐다. 나는 다시 바구니를 들고 주이든에게 말했다.
“이든 형, 배추 더 빨리 뽑죠?”
“어?”
“저도 저 형들 이기고 싶거든요?”
이렇게 화가 나는 일은 드문데. 정요셉의 화법에 잔뜩 짜증이 났다.
‘살짝 열받는데?’
계속 반대편에서 정요셉이 우리의 속을 살살 긁었다. 주이든도 계속 들으니 짜증이 나는지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 허리 죽인다.”
단순노동을 하니 감정의 골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 주이든과 싸웠더라?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아!”
열심히 일해서 그런지 순간 하체의 힘을 잃어 그만 논에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얼굴에 그대로 진흙이 묻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상체를 일으키자 얼굴에 묻었던 진흙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큽.”
주이든은 내 몰골을 보고서 웃음을 터트리다가 그만 자기도 논에 빠졌다. 내가 머리에 묻은 진흙을 떼어내는데 주이든이 시비를 걸었다.
“쟤 몰골 봐. 범나비 못생겼어.”
“형도 못생겼거든요?”
“아닌데? 나는 괜찮거든?”
이번에는 나를 비웃던 주이든이 배추를 뽑다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저런.
“형, 운동 좀 하죠?”
“허! 너보다 몇 살이나 더 먹었거든?”
“그래서 하체에 힘이 없어요?”
그때 주이든이 손가락에 묻은 진흙을 나한테 털어내는 바람에 진흙이 입에 들어갔다. 진짜 유치하게.
“형……!”
“…와, 쟤 봐. 카메라 감독님, 소리 지르는 거 찍었어요?”
주이든은 카메라 감독님한테 물어보는 척을 하면서 나한테 또 진흙을 털어냈다. 고단수네. 하필 머리 위에 툭 떨어진 진흙 덩어리를 보며 주이든이 배꼽을 잡고 비웃었다.
나는 진흙을 퉤, 뱉으면서 전쟁을 선포했다.
“이든 형, 전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