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데뷔 컨셉 회의(1)
AA 엔터 회의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기억하는 네스트의 데뷔 무대는 별로였다. SF 미래지향적인 컨셉을 내놓으면서 팬들과 벽을 세웠으니까.
실력이 좋은 아이들을 모아두면 뭐 하나? 아이돌 사이에서 개같은 컨셉과 개같은 노래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만큼 항간에는 AA 엔터가 네스트의 얼굴을 믿고 저런다는 말도 돌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네스트는 연차가 쌓이고 프로듀서가 바뀌면서 대중적인 곡을 선보였다. 그래서 선주문이 100만 장을 돌파할 만큼 팬들이 이를 갈았었다.
‘…제일 큰 문제는 KIN 프로듀서인데.’
네스트의 얼굴만 믿고 나댔던 난해한 컨셉의 주동자인 KIN이 나가고 네스트가 살아난 것이다.
“프로듀서는 누군데요?”
순진무구한 주이든의 질문에 김연호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게… 아이돌이라고 하던데.”
“아이돌요?”
“후스트였대.”
삽시간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KIN은 아이돌로 폭삭 망하면서 아이돌 프로듀싱으로 전향했다. 그러면서 KIN이 AA 엔터에 네스트 프로듀싱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이건 네스트와 예능에 나와서 했던 말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후스트 선배님이면 팬들의 마음을 잘 아시겠네요.”
“어…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러나 KIN은 팬들의 마음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았다. KIN의 컨셉 고집이 세서 팬들이 대거 탈덕을 했으니까.
“왜 KIN 프로듀서인가요?”
“…아마 팀장님의 연줄 때문이 아닐까.”
팀장님과 연줄이 있다고? 어쨌거나 KIN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더군다나 다른 프로듀서한테 프로듀싱을 맡길 만큼 AA 엔터가 예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얘들아, KIN 프로듀서가 가져온 컨셉이 몇 가지 있는데 볼래?”
“연호 형, KIN 프로듀서는 어디서 프로듀싱을 해봤대요?”
“HI 엔터에 있었다고 그러던데.”
HI 엔터는 대중적인 컨셉을 잘 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 엔터가 좋은 프로듀서를 버릴 리가 없지. 제 발로 나가지 않는 이상.
“오, 그런 분께서 오셔요?”
주이든은 행복의 나날을 상상했는지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안 좋을 텐데. 나만 빼고 모두가 기쁨에 물들 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팀장님이 들어오셨다.
“어~ 우리 네스트!”
다크서클이 진해진 팀장님이 노트북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다들 잘 지냈어?”
“네~ 저는 팀장님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죠.”
“요셉이, 하여간 말은 잘해.”
“제가 말은 좀 잘하죠.”
정요셉의 아부에 팀장님이 목을 가다듬었다.
“얘들아, KIN 프로듀서한테 네스트 데뷔 컨셉을 받아 왔거든. 한번 볼래?”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김연호의 입에서 나왔던 그런 컨셉이 아니길. 팀장님은 노트북을 열고 PPT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SF 컨셉, 하나는 과거 공룡 컨셉, 하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시대 사람 컨셉.”
난감하네… 듣기만 해도 머릿속이 아찔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시대 사람 컨셉 PPT에는 태극기가 있었다.
“너희들은 어떠니? 나는 다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인가요? 팀장님이 숲을 보기는커녕 이렇게 나무의 나뭇가지만 볼 줄은 몰랐다.
“…팀장님, 저는 이 컨셉 별론데요.”
“어? 나비야, 별로니?”
“네, 이도 저도 아닌 컨셉을 내놓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HI 엔터가 좋았던 이유는 컨셉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점인데.
“…씁, 그런데 우리가 예산이 부족해서 가성비가 좋은 컨셉으로 해야 하거든.”
좆소라서 투자할 예산이 없다는 뜻이군.
“KIN 프로듀서가 예산이 부족해서 좋은 노래를 가져오기는 힘들어도 컨셉은 좋게 가자고 하던데…….”
아이돌은 컨셉이 구려도 노래를 잘 뽑아야 하지 않나……? 컨셉은 대중의 눈을 끄는 용도고, 일단 노래가 잘 뽑히면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허벅지에 올라간 손을 말아 쥐었다.
“…목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전…….”
화목현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리더는 언제나 엔터와 멤버 간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해줘야 하니까 말을 아끼는 거겠지. 저 마음도 이해가 간다.
“에이~ 팀장님은 목현 형이 아니라 우리 막내랑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요셉이 치고 나와 팀장님과 리더의 고리를 끊었다.
“그래도 리더의 의견을 들으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요~ 저는 우리 막내 의견이 좋은 것 같은데. 이전에 HI 엔터에 있기도 했고?”
정요셉은 눈치껏 화목현을 뒤로 빼주었다. 정요셉이 적당히 치고 빠졌으니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팀장님, 이대로 이 컨셉으로 하면…….”
“하면?”
심한 말을 하려다가 돌려 말했다.
“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왜 망해?”
“돌연프에서 여러 그룹이 나올 겁니다. 그 그룹들이 그냥 나오지 않을 거고요.”
대형 엔터는 옛날부터 기획했던 컨셉과 노래를 가지고 데뷔를 빠르게 할 것이다.
“전 대중들에게 1위가 2위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를 믿고 기다려 준 팬들한테 기다림이라는 시련을 주고 싶지도 않고. 팀장님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나비가 그런 포부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곧 KIN 프로듀서가 온다고 하니까, 프로듀서랑 잘 이야기해 보자.”
팀장님은 아메리카노를 사 오겠다면서 회의실을 잠시 떠났다.
“범나비 말 진짜 잘한다?!”
“…예?”
“나도 이 컨셉은 별로라고 생각했거든.”
“아, 그래요? 그러면 별로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요.”
주이든이 손바닥에 턱을 괴면서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데뷔가 무산될 수도 있으니까.”
“…….”
“실제로 지금까지 몇 번 무산되기도 했고.”
…하긴 아이돌 데뷔는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네스트의 데뷔가 무산된다면 타격이 클 것이다.
AA 엔터가 아이돌 사업을 이어가고 싶다면 데뷔를 시키겠지.
“나비야, 그런데 KIN 프로듀서가 컨셉 바꾸는 건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다른 수를 써야죠.”
화목현의 말대로 KIN이 싫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한 상태에서 시스템한테 받은 랜덤 박스 1개를 돌렸다.
【랜덤 박스 OPEN】
【팽팽 돌아가는 비타민(3일):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비타민이다.】
다행히 랜덤 박스에서 좋은 아이템을 얻어 그대로 비타민을 입에 넣었다. 멈췄던 뇌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동시에 KIN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안녕하세요. 네스트입니다.”
“알아알아, 네스트인 거 알고 왔으니까.”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KIN이 의자에 앉자마자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보낸 컨셉이 싫다고 했다며? 누가 싫다고 했어?”
누가 싫다고 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죽일 기세인 KIN을 보면서 나는 손을 들었다.
“제가 싫다고 했습니다.”
“네 이름이 뭐더라?”
“네스트 막내 범나비입니다.”
“아아, 이번에 우리 엔터로 이적해서 소문이 시끌시끌한? 실력은 좋다고 듣긴 했어?”
내가 그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 노래만 부르지 의견은 왜 내는 거야?”
“…네?”
“팀장님이 네스트에 투자할 예산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엔터에 걸맞은 가성비 컨셉을 내달라고.”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KIN은 책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특히 노래 퀄리티보다는 컨셉이 새로웠으면 좋겠다는데. 그러면 나는 가성비 좋은 컨셉을 내놓을 수밖에.”
…총체적 난국이다. 노래 퀄리티를 따지지 않고 아이돌 시장에서 컨셉은 새로웠으면 좋겠다는 마인드.
KIN은 데뷔도 안 한 우리가 컨셉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니 심기가 불편한 뉘앙스였다.
“네가 막내라서 여기 상황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이돌은 컨셉이야. 노래가 아니라.”
KIN의 말을 들으니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목이 꽉 막혔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여기에서 후스트로 데뷔를 했거든. 내가 낸 아이디어로 기사나 너튜브에 오르기도 했어.”
애석하게도 후스트의 노래는 인기가 없어 딱히 기억에 남는 노래가 없었다. 왠지 기사나 너튜브에서도 대중들의 의견은 나쁜 쪽이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네가 이 바닥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AA 엔터가 원래 아이돌한테 돈을 쓰는 엔터가 아니라서 예산이 없어.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팀장님이 연습생을 잘 뽑아서 돌연프 1위는 했다는 거?”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팀장님이 잘 뽑아서? 말을 참 예쁘게도 하신다.
“너희들이 생각한 컨셉이 있다고 해도 AA 엔터가 허락해 줄까?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멤버들은 KIN의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그저 처참한 현실을 마주했을 뿐.
“자랑은 아닌데, 팀장님이 내 프로듀싱 능력을 인정해 주셔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거든.”
팀장님, 왜 그러셨어요. 속으로 한숨을 참아내며 KIN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러면 네스트 첫 타이틀곡이라도 들어봐. 내가 생각한 컨셉이 딱 떠오를 테니까.”
KIN은 가방에서 USB를 가져와 노트북에 꽂았다. 제발 노래라도 좋았으면 좋겠는데.
“팀장님이 받아 온 노래야. 일단 곡 제목은 플라워.”
1절을 들어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꽃피운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곡 퀄리티는 나름 괜찮았다.
“어느 작곡가 노래인지 아세요?”
“그건 잘 몰라. 나중에 팀장님한테 물어봐.”
잘만 부른다면 데뷔곡으로 충분했다. 유명한 작곡가의 노래가 아닌데 이렇게 퀄리티가 좋다?
“너희들, 노래 들으니까 딱 떠오르는 컨셉이라도 있어?”
떠오르는 컨셉이라…….
“KIN 프로듀서님, 갑자기 의견을 제시하라고 하면 멤버들이 당황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
가만히 KIN의 말을 듣고만 있던 화목현의 말문이 트였다. KIN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화목현을 보면서 비아냥댔다.
“너는 이름이 뭐더라?”
“네스트 리더 화목현입니다.”
“리더?”
“네, 리더요.”
“역시 하는 말본새가 리더 같더라.”
KIN은 화목현을 노려보면서 말을 뱉었다.
“나는 바빠서, 그럼 3일 뒤에 보자. 컨셉에 대해서는 팀장님한테 말하고.”
의자에서 일어난 KIN은 USB를 챙기고 회의실을 휙 나가 버렸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요셉이 책상에 엎드렸다.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아니, 엔터에 예산이 없다는 사정을 우리한테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러다가 1억 정산도 안 해주면 큰일인데…….
“어쩔 수 없어. 후스트에 예산을 부었는데 망했으니까.”
이정진이 조용히 말을 던졌다.
“막내야, 생각나는 컨셉 있어?”
“아니요. 정진이 형은요?”
“일단 노래를 다시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플라워를 다시 듣자 키오 시절에 생각해 놨던 몇 개의 컨셉이 떠올랐다.
“…제가 생각한 컨셉을 말해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