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정요셉(1)
AA 엔터 회의실. 나는 풀 죽은 척을 하면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나비, 블로그는 나한테 말하고 만들어야지?”
“…죄송합니다.”
“근데 블로그는 왜 만들었어?”
“SNS 계정을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아직 깜깜무소식이라서…….”
“아, 아직 안 만들었어?”
팀장님이 의아해하면서 마케팅 부서에 전화를 하는 동안.
“야, 야. 잘했어. 기죽지 마.”
“가끔은 이런 일탈도 좋은 것 같아.”
주이든과 정요셉이 나지막이 속삭이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소속사 몰래 사진을 올릴 공간을 만들려면 계정보다는 블로그가 확실히 좋다고 생각했다. 계정은 소통이 잘되기는 하겠지만.
블로그로 간간이 멤버들의 소식을 알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간소하게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이런 떡밥을 줘야 팬들이 재밌게 덕질을 할 수 있지. 떡밥이 없으면 덕질이 잘될 수가 없었다.
“아, 데뷔 전에 만들겠다고 하네.”
전화를 끝낸 팀장님이 말했다.
아, 나는 작게 탄식했다. 이럴 거면 왜 아이돌 만들 생각을 한 거야. 혹시 후스트도 이렇게 케어한 건 아니겠지?
“데뷔 전이요?”
“어, 요즘 직원 물갈이가 심해서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
직원 물갈이가 심하다는 것은 이 엔터가 좆같다는 뜻이잖아. 직원이 많이 바뀌는 회사는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도 있는데…….
AA 엔터가 그 좆소라니.
“우리 데뷔는요?”
“…아, 데뷔.”
데뷔라는 말에 팀장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글쎄. 빨리 하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나요?”
“아직 노래도 안 나왔고 컨셉도 정해지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는 팀장님의 말에 뒤통수가 아팠다.
…이건 느려도 너무 느리다. 나는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유가 컨셉과 노래를 정하는 기간 동안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컨셉도, 노래도 정하지 않은 상황이라니.
문득 이래서 이남주가 AA 엔터를 나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FG 엔터는 벌써 데뷔 떡밥도 뿌리고 엔터에서 일을 아주 잘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침에 연예 기사 헤드라인만 봐도 머리가 아득했다.
[FG 엔터, 데뷔 시작?]
[벌써 티저로 팀명 공개한 HI 엔터]
[QTQ 방송국, 아이돌 사업에 뛰어들다?]
[FG 연습생 팀명, ‘크래프트’]
반면에 AA 엔터는 아직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도 슬슬 데뷔 떡밥을 뿌려야 하는데 말이다. 단독 예능만 나오면 뭐 하나…….
“그래도 데뷔 준비를 최대한 빨리 해야 뒤처지지 않을 거예요.”
“이번 주에 터널과 졸업식으로 음방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아?”
“그게 데뷔는 아니잖아요. 그건 돌연프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나비야, 팀명만 공개되면 다 된 거지. 걱정하지 마.”
이번 주 음방에 나가는 곡은 추억의 향수를 일으키는 곡이지. 데뷔곡은 아닌데… 팀장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찔했다.
‘우리 데뷔할 수 있는 거지……?’
화목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팀장님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 목현아. 애들 잘 다독이고…….”
팀장님이 정요셉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요셉아.”
“네~”
“혹시 ‘탐정 요셉이!’ 감독님 기억하니? 그 감독님이 이번에 QTQ 방송국에서 ‘막장 드라마의 사용법’ 촬영하고 있는데 남주인공 동생으로 잠깐 나와달라고 하더라.”
막장 드라마의 사용법? 이번에 QTQ 방송국에서 시청률 8%를 넘긴 드라마잖아.
“팀장님, 저희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요?”
“그렇긴 한데…….”
…거기에 데뷔 전인 아이돌한테 연기를? 어쩌면 정요셉이 욕을 먹을 수도 있겠는데. 네스트 데뷔가 정요셉 연기 때문에 미뤄진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데뷔 전에 연기하는 아이돌도 많고. 네스트 인지도도 쌓을 수 있는 거니까…….”
“팀장님…….”
“요셉아.”
팀장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렸을 때 감독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
“……!”
“부모님한테 들었단다.”
무슨 일? 정요셉은 시선을 떨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팀장님은 막장 드라마의 사용법 대본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팀장님, 제가 지금 거절하면 안 되는 건가요?”
팀장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QTQ 방송국이 갑질로 유명하잖아. 네가 거절하면 네스트 데뷔 음방 무대는 없을 수도 있어.”
팀장님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비야, 사진 올릴 때는 매니저 허락은 맡고 올리자. 그러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니까. 그런데,
“팀장님, 매니저요?”
“어제 네스트 매니저가 뽑혔거든.”
드디어 매니저가 뽑힌 건가.
“회사에 지원하는 신입이 없더라고. 소개가 너무 늦었다.”
왜 매니저가 늦게 뽑혔는지도 이해가 간다. 이 엔터에 지원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거지.
“들어오라고 할게.”
팀장님이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들어왔다.
“이분은 김연호 씨.”
“안녕하세요. 김연호라고 합니다.”
젊다.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제발 매니저가 일을 잘했으면 좋겠는데.
“안녕하세요. 네스트 리더 화목현입니다.”
“알아요. 네스트 리더.”
김연호 매니저가 미소를 지으며 화목현의 손을 잡았다. 팀장님이 김연호 매니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원래 배우 쪽 매니저로 가려다가 내가 제발 사정해서 이쪽으로 왔거든? 아이돌은 잘 모른대.”
아이돌 매니저가 아이돌에 대해서 잘 모른다… 차라리 아이돌을 잘 알면서 사고 치는 매니저가 나을 판국인 건가.
“얘들아, 그럼 다음에 봐. 예능 잘 찍고! 음방 잘하고! 사고 치지 말고!”
팀장님은 우리한테서 손을 빼려는 걸 수도 있겠네. 우리는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다.
“제가 제일 나이가 많더라고요. 동생처럼 생각해도 될까요?”
정요셉은 빠지지 않고 곧바로 ‘연호 형!’이라고 외쳤다. 그래도 멤버들의 프로필은 본 것 같군.
“그러면 나도 반말할게. 너희도 반말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아무리 그래도 아직 경계할 필요는 있으니.
“저는 존댓말이 편해서.”
“그래요?”
주이든이 내가 낯을 가린다며 방어를 해줬다. 이정진은 내 앞으로 와서 나를 보호했고.
“존댓말이 편할 수도 있겠네요.”
제발 좋은 매니저였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엔터 밖에 주차된 밴에 차례대로 올라탔다. 그러자 김연호 옆에 앉은 정요셉이 입을 열었다.
“왜 매니저에 지원했어요?”
“아, 지원.”
김연호가 자동차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재밌어 보였거든.”
재밌어 보여서?
‘…신기하네.’
***
기숙사에 오자마자 소파에 앉아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정요셉이 옆으로 와서 내 팔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우리 막내, 어디 아파~?”
“요셉 형, 저 안 아프고요. 컨디션은 괜찮고 배고프지도 않아요.”
“어? 그런데 말이야. 형은 섭섭해.”
…섭섭은 무슨. 요새 정요셉은 폐공장 이후로 틈만 나면 섭섭하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괴롭히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나비야, 보부상 가방 무겁지? 내가 방에 놔둘게.”
“아니요. 목현 형까지 왜 그러세요…….”
“음? 나는 원래 친절해.”
이건 반박을 못 하겠다. 맞는 말이라서. 화목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수록 나는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못 줘요.”
“난 정말 친절을 베푼 것뿐인데.”
화목현의 얼굴에 아쉬움은 없었다. 오로지 나를 놀리고 싶은 기색만 있었다. 화목현이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손뼉을 쳤다.
“오늘 회의를 해볼까?”
주이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룸메이트랑 블로그에 올릴 사진을 정해야지. 먼저 룸메이트!”
언제 준비했는지 화목현의 바지 주머니에서 다섯 개의 종이가 나왔다.
“얘들아, 하나씩 골라.”
우선 멤버들이 하나씩 고르고, 나는 마지막에 남은 종이를 집었다. 누가 되어도 딱히 상관없는데.
“1번과 2번은 왼쪽 큰 안방, 3번과 4번은 오른쪽 안방. 5번은 혼자 거실에서. 다른 의견 없지?”
“목현 형, 빨리!”
주이든은 5번이 걸렸으면 좋겠는지 손바닥을 빌면서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5번 걸리면 바꿔줘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종이를 펼치자.
“1번 걸렸다.”
제일 큰 방.
“내가 2번.”
이정진과 같은 방이 되었다. 어색한 사이는 아니지만, 둘 다 말이 없는 타입이라서 방이 조용할 것 같았다.
“요셉이는 4번~”
“나랑 같은 방을 쓰겠네. 그럼 이든이가 5번?”
주이든이 5번을 들고 울먹거렸다.
“거실에서 자고 싶었는데! TV도 있고 몰래 라면도 먹을 수 있어!”
그게 목적이었군.
“이든아, 라면은 적당히 먹어야 하는 거 알지?”
“알지!”
“라면은 몸에 해로워. 특히 밤에 먹으면 더.”
“이 정직한 사람!”
화목현의 잔소리 폭격에 주이든의 기가 죽었다.
“이제 블로그에 올릴 사진을 골라볼까?”
“어떤 사진을 올릴까?”
“오늘 우리 이든이가 막내 초콜릿 몰래 먹은 사진~”
내 초콜릿을 언제 몰래 먹었어? 내가 주이든을 쳐다보자 주이든은 강하게 부정했다.
“내가 언제!”
“요기~ 증거가 있지.”
정말로 핸드폰에 내 가방을 열고 초콜릿을 훔쳐 먹는 주이든이 포착되어 있었다.
“도둑처럼 나왔네.”
“아니야!”
이정진의 한 방에 주이든이 사진을 지우려고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초콜릿 같은 건 몰래 안 먹어도 되는데.
“형, 다음엔 도둑처럼 가져가지 마시고 말하세요.”
“도둑이라니! 그냥 보부상 가방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본 거야. What's in My Bag!”
팬들도 내 가방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긴 했으니까.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면 되겠지?
“목현 형이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래.”
화목현이 보부상 가방에 들어가 있는 물건을 찍고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려고 하는데.
“뭐라고 부르지?”
“그냥 팬들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팬명도 지어야겠다.”
“…그러게요.”
팬명은 데뷔 전에 만들어도 상관없지. 블로그에 사진을 올린 뒤에 화목현은 막장 드라마의 사용법 대본을 꺼냈다.
“하나 더 회의할 게 있는데. 이번에 요셉이한테 남주인공 동생 역할이 들어왔는데, 멤버들 생각은 어때?”
화목현이 멤버들의 의견을 물으려고 하자 정요셉이 먼저 말했다.
“내가 싫어.”
나도 숙소로 오는 내내 막장 드라마의 사용법을 봤다. 내용은 이러했다. 막장 드라마의 세상에 들어간 여주인공이 막장 드라마의 남주인공에게서 도망가는 내용을 담은, 막장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
“요셉이는 왜 연기하기 싫어?”
“나는 네스트에 집중하고 싶어~”
“그래?
“어, 욕먹기도 딱 좋고. 솔직히 나는 연기가 지긋지긋해서.”
…연기가 지긋하다고? 왜일까. 정요셉의 완강한 거부에 화목현은 알겠다는 듯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요셉이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
“그래도 조금 더 생각해 봐. 이 드라마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응?”
그럼에도 정요셉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화목현이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리더는 엔터와 멤버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일 수밖에 없으니.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살짝 화목현을 떠봤다.
“…왜 그렇게 물어본 거예요?”
“아… 팀장님이 요셉이가 드라마 출연을 안 하면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거든.”
그래서 그랬던 건가. 하긴, AA 엔터는 힘이 없는 편이었다. 정요셉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으면 QTQ 방송국 음방 무대가 없을 수도 있는 건가…….
원래 방송국은 권력을 자주 남용하는 편이니까.
‘그런데 어쩌지.’
정요셉이 완강하게 싫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설득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
“대본이라도 봐. 팀장님이 보라고 했으니까…….”
주이든이 눈치를 살살 보면서 말했다.
“미안. 난 연기가 싫어.”
“…….”
“정말.”
멤버들의 의견이라면 언제나 수용했던 정요셉이 싫다고 할 정도면… 드라마 촬영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연기가 싫어서 아이돌이 된 거거든.”
정요셉의 고백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정요셉의 ‘트라우마’가 공개됩니다.】
【‘연기’】
…연기라고? 그렇게 안 보였는데.
【정요셉의 상태:(=;ェ;=)】
※자존감이 내려가면 아이돌력이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