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정진의 열심 모드
“…참 지랄을 한다, 지랄을.”
오한준은 초콜릿 통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선배님, 지랄들이라니. 후배에게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하면 안 좋지 않을까요?”
“선배가 후배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좋게 타이르는 건데, 뭐가 안 좋아?”
계속 이렇게 오한준과 입씨름을 하다가는 연습의 효율이 안 나올 것 같았다.
데뷔도 못 한 연습생이 하늘 같은 선배를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는 이 공간은 오한준을 밟기에 제격이었다. 내가 오한준을 가리고 있어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를 테니까.
“선배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뭐?”
“그러니… 저도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나는 다가가 오한준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오한준은 얇은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밟히면 아플 것이다, 꽤 많이.
“악!”
밟자마자 나오는 오한준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네, 이 기분.
“야!”
“오한준 선배님의 뜻깊은 말을 들으니까 제 미래가 창창할 것 같네요.”
“…야, 안 내려가?”
더욱 세게 발을 밟으니 오한준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시선을 내리면서 오한준을 좋게 타일렀다.
“선배님, 조언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이돌 생활에 대해서 많은 걸 가르쳐 주시고.”
“야!”
이번에는 무게까지 싣자 오한준이 세게 나를 밀쳤다. 그런데,
“야!”
공기처럼 오한준의 힘은 약했다. 그래서 나는 밀리지도 않았다. 이런 놈이 이정진을 괴롭혔단 건가? 우습다. 차라리 오한준이 꼰대 같은 선배였다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워낙 지랄 맞은 선배가 많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그만 슬슬 끝내야지.
“선배님, 바쁘실 텐데 저한테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 미친놈이.”
“그런데 선배님.”
그리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한마디를 건넸다.
“저 이 대화 내용, 녹음하고 있습니다.”
“…어?”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굴면…….”
그리고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녹음 파일 풀 겁니다, 선배님.”
부들부들 떠는 오한준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오한준의 발에서 내려왔다.
“선배님, 안 가세요? 저는 바빠서.”
“…미친 새끼.”
그러자 두고 보자는 듯이 오한준은 나를 밀치며 저 멀리로 가버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참.’
자기가 먼저 괴롭혔으면서. 나는 초콜릿 통을 줍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을 살폈다.
“여보세요?”
“…….”
전화를 끊었을 줄 알았는데 화목현이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였다.
“어, 형. 들리세요?”
“…어, 나비야.”
“들었죠?”
“…들었고 녹음도 해놨어.”
“감사해요, 형.”
나도 녹음은 해놨지만.
“너는 괜찮아?”
“저야 뭐…….”
참았지, 때리고 싶었던 거.
“그나저나 아까 정진이가 너 데리러 갔는데 못 봤어?”
이정진이 데리러 갔다고?
“또 마주치면 연락하고.”
“네.”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자 이정진이 나타났다.
“막내야.”
“정진 형, 언제 거기에 있었어요?”
“아까.”
이정진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오한준이 괴롭히는 모습을 목격한 건가?
“정진 형, 다 봤어요?”
“……응.”
그래서 손을 떨었던 모양이네. 나는 몸 상태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형이 걱정할까 봐 말하지만 저 안 맞았어요.”
“…….”
“다치지도 않았고요.”
“…가자. 애들이 기다려.”
괜찮다는 표현이 이정진한테 먹히진 않았다. 오히려 기숙사로 가는 내내 이정진은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리 물어봐 줬으면 좋겠는데.
“미안해, 나 때문에.”
“…음, 어떻게 보면 저 때문이죠.”
내가 오한준의 신경을 긁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가방에 들어 있던 물건도 떨어지고.”
“그건 형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과해야죠.”
이정진이 사과할 필요도 없는데. 착해 빠져선…….
“형은 죄책감 느끼지 마세요. 알겠어요?”
“…죄책감은 없어.”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오한준이 왕따 주동자였다는 증거도 얻었고, 상황은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언제든지 오한준이 이정진을 건드리면 녹음 파일을 퍼트릴 거니까. 그러나 이정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널 건드린 게 짜증 나서.”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한 성격을 가진 이정진이 짜증을 내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그냥 나 하나 가만히 있으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거든.”
“…….”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조용히 지냈던 거야.”
이정진이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처음이었어, 오한준을 때리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라고요?”
“걔 때문에 막내 가방이 더러워졌잖아.”
내 가방? 가방은 더럽지 않았다.
“막내야, 먼저 들어갈게.”
이정진이 먼저 방에 들어가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이정진의 사회성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좋은 편곡을 위해서 이정진의 사회성을 극대화시킵니다.】
【이정진의 상태:( `-´ ) 열심 모드 ON】
이정진은 이불에 쏙 들어가 노트북을 켜놓고 편곡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힌트:이남주와 만나기.】
***
이정진의 사회성을 극대화시켰더니, 말도 안 되는 능률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밤샘 작업까지 돌입한 상태였다.
“우리 막내, 정진 형이 왜 저러는지 알아?”
“저도 잘…….”
“이상하다. 정진 형, 우리 막내랑 같이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달라졌는데…….”
“…그런가요.”
지금 이정진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개인 연습실에서는 편곡 작업을 하고, 단체 연습실에서는 졸업식과 터널 안무를 외웠다. 이러니까 멤버들이 걱정할 수밖에.
이정진은 편곡을 할 때마다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며 계속해서 편곡에 돌입했다. 그랬더니 이정진은 24시간이 모자란 병에 걸려 있었다.
“시간이 부족해.”
사회성을 극대화시키면 저렇게 되는구나.
“이든아, 이건 별로야?”
“…이것도 괜찮은데?”
“왜 내가 듣기로는 부족한 것 같을까.”
“흠, 여기에서 더 완벽하게 하려고?”
“그래야 할 것 같아.”
이정진은 며칠 내내 멤버들한테 편곡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다녔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돌연프 7화 선공개 영상과 1분 미리보기가 나오는 날이 되었다.
“얘들아, 개인 연습실에서 선공개 영상 같이 보자.”
“어, 목현아, 나는…….”
“거절한다고?”
편곡 때문에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화목현은 차마 이정진의 목덜미를 잡아서 개인 연습실로 갈 수 없었다.
“지금 나왔다!”
주이든의 외침에 너튜브에 돌연프를 검색했다. 나는 돌연프 선공개 영상을 보면서 커뮤니티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돌연프 7화 선공개 뜨는 날이다!
└ 가슴이 웅장해진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것 같냐
└ 10부작으로 늘려주면 좋겠음…
└ 내 일상이 끝나간다
-돌연프 원래 오늘이 끝나는 날이었는데 반응 좋아서 8부작 됐죠?
└ QTQ 방송국도 돌연프 인기 체감하는 듯ㅋㅋㅋ
└ ㄹㅇ 재방 많이 틀더라
그런데 돌연프 선공개 썸네일이 이상했다. 서툰 그림체로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눈을 뜨고 스케치북을 쳐다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니 ㅋㅋㅋㅋㅋ 포토샵으로 안 하고 왼손으로 그렸다니?
└ ㅋㅋㅋㅋㅋㅋ ㄹㅇ
-돌연프 편집자 죽겠나 봐 편집이 많아 대충 했다는데 시그널이 아닐까…
└ ㅅㅂ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이 댓글이 편집자를 두 번 죽입니다
선공개 영상 초반은 FG 연습생들이 정상으로 올라가 팻말을 발견했으나 가져오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남주 자신감 봐 1등 팻말 곡 멤버들이랑 안 어울린다고 단호하게 말하네
└ 진짜 멋있어 ㅠㅠ
└ 솔직히 저 팻말 좋은 혜택 엄청 많은데…
다시 내려가서 3등 팻말을 가져오는 부분을 보며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남주 대단하다! 우리도 저런 부분을 배우자.”
“그러자, 이든아.”
그 뒤로도 우리가 나오는 장면은 딱히 없어서 내심 우리 장면은 별론가 싶었다. 그런데 선공개 영상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가소롭다는 듯한 얼굴로 이미지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비 동태 눈깔 어쩔 거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ㄹㅇ 왜 저렇게 동태 눈깔이지?
└ 뭐 때문에 동태 눈깔이야 ㅋㅋㅋㅋㅋㅋ
-우리 나비는요. 생태 눈깔을 가진 아이예요. 원래 저런 눈을 가진 아이가 아닌데…
└ ㅅㅂ
-범나비 눈빛 마치 고인물 게임 유저 같아
└ 고인물 게임 유저 비유 적절
└ 스케치북에 있는 내용을 다 알아서 동태 눈깔인 건가?
└ 그래서 편집자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거네 ㅋㅋㅋㅋㅋㅋ
이미지 게임이 재미없어서가 아니었다. 스케치북에 있는 내용을 다 알고 있어서 지은 표정인데. 선공개 영상이 끝나고, 멤버들의 어깨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움직였다.
“형들, 참지 말고 웃어요.”
“…큽.”
주이든이 웃으면서 어쭙잖은 위로를 해준다고 내 등을 때렸다.
“때리지 말죠?”
“아……! 너무 웃겨서 때려 버렸네.”
고의 같지만 참자. 참는 사람한테 복이 들어온다고 우리 할머니가 그랬다. 나는 몰래 구석진 곳에 들어가 너튜브 댓글을 확인했다.
-2:11 이 부분 보면 범나비랑 박정후랑 스타일이 비슷하다?
└ 박정후가 범나비 따라 하잖아 그래서 그럼
└ ㅋㅋㅋㅋ 요즘 박정후가 범나비 스타일 따라 함
└ 스타일 따라 하는 걸 어떻게 알아?
└ 박정후 원래 저런 스타일 안 좋아했음
-박정후는 자존심 상하지도 않나?
└ 왜?
└ 범나비 싫은 티 팍팍 내더니 따라 하잖아
-존나 웃기니까 괜찮은 듯ㅋㅋㅋ
└ 박정후가 범나비 따라올 수나 있을까
└ ㄹㅇ 존웃
박정후를 생각하자 손목이 시큰거렸다. 뻑뻑한 손목을 돌리며 화면을 껐다. 그러자 저 멀리서 화목현이 얼음이 담긴 봉지를 가져오더니 내 손목에 댔다.
“아직도 손목이 안 좋아?”
“많이 나아졌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최대한 무리하지 말고.”
어차피 아이템을 쓰면 괜찮겠지. 그렇게 안심하고서 멤버들과 안무를 맞춰보는데 이정진이 손을 들었다.
“터널 편곡 끝났어…….”
“형!”
정요셉이 곧장 달려가 이정진을 안았다.
“숨, 숨 막혀.”
“정진아, 고생 많았어.”
“…아니야. 그냥 내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 노래 들려줄게.”
정요셉에게 벗어난 이정진은 노트북으로 편곡한 곡을 틀었다. 기타 사운드가 들어가면서 음이 풍부해졌다.
“편곡 자체가 너무 잘됐는데요?”
“고마워.”
이정진은 부끄럽다는 듯이 안경을 위로 올렸다.
“그 밖에 부족한 건?”
“없어요. 완벽해요.”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막내야.”
사회성이 극대화된 이정진은 I.P에게 찾아가기도 했다. 원래 저러나 싶었지만 화목현이 알려주기를, 이정진은 지금껏 편곡을 할 때 한 번도 누구를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다.
오직 홀로 하거나 편곡이 막혀도 혼자 해결하는 타입이라고.
“나도 우승하고 싶었거든.”
“형이? 믿을 수가 없는데!”
“…나도 우승 욕심은 있어.”
주이든이 이정진의 어깨를 붙잡고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살폈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닌데!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면 죽는다고 그랬어!”
“주이든, 그렇다고 죽지는 않아.”
“한순간에 이렇게 편곡을 좋게 하는 데다 우승 욕심이 생길 리는 없잖아!”
“지금까지의 편곡이 별로였다는 거지?”
“형이 편곡한 곡은 너무 좋아서 그냥 미친 수준이지!”
대놓고 좋다는 말을 듣자 이정진의 눈에 독기가 조금 없어졌다.
“그랬구나.”
“그래!”
극적으로 화해한 이정진과 주이든은 악수를 하고 상황을 끝냈다. 나는 이정진이 편곡한 곡을 다시 들으면서 안무 영상을 돌려 보았다.
“이든 형, 편곡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기존 안무를 수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졸업식은 편곡을 많이 해서 계속 안무를 수정했잖아!”
계속 편곡을 하는 바람에 주이든의 안무 수정도 바빠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주이든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럼 이건 스태프에게 전달하고 올게요.”
“어, 그래.”
이정진한테 터널 편곡이 담긴 USB를 받고 단체 연습실을 나갔다. 기숙사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로 가야 하나.
오늘 스튜디오 무대 세트 설치 때문에 단체 연습실 근처에 스태프가 없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런데 그런 걱정도 잠시, 스튜디오에서 나오자마자 스태프를 발견했다.
“이거 AA 엔터 터널 편곡입니다.”
“…아! PD님께 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일이 빠르게 마무리되고, 다시 단체 연습실로 가는 길에 이남주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이남주랑 만나라고 했었지?
“어디 가요? 단체 연습실?”
“…이제 단체 연습실로 가야죠.”
이남주의 시선이 내려가더니 내 손목을 쳐다보았다.
“손목은 괜찮아요?”
“아프긴 한데 버틸 만해요.”
“몸은요?”
“멀쩡하고요.”
그러자 이남주가 씩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제가 아까 문제를 받았거든요.”
“무슨 문제요?”
“이번에 시스템이 업데이트되면서 새로운 랜덤 박스가 열렸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템을 당신한테 쓰래요.”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아이템이길래 나한테 쓰라고 했을까.
“무슨 아이템인데요?”
“그냥 카드예요.”
“…예? 그냥 카드요?”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이남주도 이걸 주는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이남주가 나한테 카드를 건네주자마자 검이 박혀 있는 심장이 그려진 검은색 카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냥 좋은 카드:어느 시점에 범나비를 괴롭힙니다.】
…날 괴롭힌다고? 이남주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진심으로 말해줘요?”
“…음, 아뇨. 화가 나는 카드라는 점은 알겠네요.”
…이 카드만 아니었으면 일이 순조롭게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팀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최종 무대에 선보일 만한 좋은 노래도 두 개나 얻었고.
“어떤 카드인지 진짜로 안 말해줘요?”
“네, 저도 잘 모르는데요?”
“진짜요?”
정말 이남주도 모르는 건가.
이남주는 고심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살짝 재밌죠?”
그러고는 저딴 말을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