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미리보기 무대
이남주가 안 좋은 곡을 할 리가 없었다. 정요셉이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남주가 새로운 곡을 도전하려고 하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겠지.”
이정진의 말처럼 최종 무대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았다. FG 엔터가 고른 곡에 멤버들이 살짝 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화목현이 이정진에게 물었다.
“정진아,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어떤 쪽으로 편곡할래?”
“음… 터널은 더 긴장감을 주는 쪽으로 가고 싶은데, 어때?”
그제야 FG 연습생들의 곡 선택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편곡하는 쪽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정진 형, 긴장감 좋다!”
“이든아, 너는 어떤 식이었으면 좋겠어?”
“정진 형이 하자고 하는 거라면 무조건 해야지.”
적극적으로 나오는 멤버들을 보면서 이정진은 다급하게 이면지를 가져오더니 안경을 썼다.
“얘들아, 의견을 내줄래?”
이정진은 볼펜을 들고서 본격적으로 멤버들한테 의견을 물었다. 단숨에 바빠졌네. 아직 시간이 많아서 천천히 시작해도 괜찮지만 이런 분위기도 나쁠 건 없지.
“졸업식은 터널보다는 밝은 느낌을 주고 싶은데. 마치 개나리처럼~?”
“요셉아, 개나리?”
“졸업식은 봄, 터널은 가을 느낌을 주는 거지. 우리한테는 무대 세트 혜택도 있으니까.”
이 의견도 괜찮았다. 어차피 무대 세트를 활용할 방법도 있어야 했고. 나도 의견을 냈다.
“저는 졸업식에서는 온전한 교복을 입고, 터널에서는 망가진 교복을 입었으면 좋겠어요. 졸업식은 우리가 온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터널은 온전함이 사라진, 위험의 터전이 되는 거죠.”
우리의 무대에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해해 보이는 우리가 다른 팀에게는 위협될 정도로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나비야, 온전함이 컨셉인 거지?”
“그렇죠, 목현 형.”
“온전함이라는 단어가 꽤 괜찮다.”
‘온전함’이라는 단어가 멤버들에게 어울리기도 했고.
“얘들아, 그러면!”
화목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체 연습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밥부터 먹고 파트 분배하자.”
아, 이제 밥 먹을 시간이지.
***
밥을 먹고 단체 연습실로 올라가다가 휴게실에서 이남주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만 하고 지나치려는데 이남주가 옆으로 다가와 함께 걸었다.
“왜 저 지나쳐요?”
“그냥 인사하고 지나가려고 했어요.”
“인사만? 저한테 궁금한 건 없어요?”
대놓고 묻네.
“나는 있는데.”
“뭔데요?”
“왜 그 곡을 골랐어요?”
나는 훅 들어오는 질문에 최종 무대 정보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제가 뭘 골랐는지 알아요?”
“알죠. 그 곡을 골랐잖아요.”
하긴… 이남주는 알고 있겠지. 우리 팀이 어떤 곡을 골랐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요.”
“말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하죠.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먼저 말하면 말할게요.”
이남주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시스템이 그 곡을 하라고 시켰어요.”
“시스템?”
“제가 소설에 빙의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는 않거든요. 사람의 기억은 사라지면 그만이니까요. 그래서 시스템한테 물어봤죠. 어떤 곡이 좋을지.”
시스템이 그런 것도 말해줘?
“원래 시스템이, 주인공한테는 박하지만 엑스트라한테는 잘해줘요.”
“자랑이죠?”
“어떻게 알았지. 그래서 무슨 곡을 골랐어요?”
“저는 뭐… 그 곡을 골랐죠.”
“아, 터널?”
“네.”
나는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이남주한테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그러면 FG 엔터가 최종 무대에서 몇 위를 하는지 알아요?”
내가 기억하기론 네스트가 1위를 하지는 않았거든. 그 부분만 머릿속에서 도려내기라도 한 듯 1위를 한 팀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남주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물었더니 이남주는 입꼬리만 올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글쎄요…….”
“모른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알고 있죠?”
이남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가르쳐 주기 싫은데.”
“그러면 힌트라도 줘요.”
“범나비가 예상 못 한 팀이라면?”
예상 못 한 팀? 두루뭉술하게 답하네.
“…됐어요.”
저런 말을 들으면 혼란만 가중된다.
“왜요? 삐졌어요?”
“안 삐졌어요.”
그렇게 뒤돌아 단체 연습실로 가려는데 이남주가 뒤에서 외쳤다.
“우린 아니에요.”
FG 엔터는 아니라고?
“잠깐만요.”
이남주의 팔뚝을 잡아 세웠다.
“FG 엔터가 아니라니까 흥미가 생겨요?”
“당연하잖아요? 저는 FG 엔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른 팀이라면 어디일까. 극적으로 다른 팀이 1위를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사실상 그게 가능한 일일까?
내가 개입하면서 돌연프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게 된 거라면?
“설마 HOR 엔터?”
“맞아요.”
“그걸 말해줘도…….”
“어차피 끝난 애들이니 말해봤자 바뀌는 것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 녀석을 믿을 수 있을까?
“지금 저 의심했죠?”
“…아닌데요.”
“저 의심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한테 거짓말을 할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라서.”
“의심해서 미안해요.”
사람을 의심하는 건 나쁘니까. 나는 고개 숙이며 최대한 사과하는 모습을 취했다. 이남주도 말이 없고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남주가 나를 불렀다.
“열심히 해요, 우리.”
“열심히는 할 건데요.”
“그래요. 열심히 하면 나야 좋은데.”
“그게 왜 좋아요?”
이남주가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밟고 올라가는 재미가 있잖아요.”
의심해서 사과했던 거 취소다.
***
다음 날.
‘첫 번째 곡 1분 미리보기’라는 무대를 진행하는 날이 찾아왔다.
“와! 박정후 한쪽 귀에 피어싱도 했네?”
정요셉이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박정후를 쳐다보았다. 박정후는 앞머리를 내더니 어느새 나랑 비슷한 쉼표 머리까지 했다. 그것뿐일까.
“눈물점도! 범나비랑 똑같아!”
주이든도 옆에서 박정후를 보고 있었는지 말을 얹었다. 내 눈물점을 따라 그렸나.
더군다나 박정후는 주로 튀는 색깔의 옷을 입곤 했는데 오늘은 나처럼 무채색으로 입고 있었다.
“나비가 한 명 더 있는 줄 알았어.”
“그러게.”
한 번도 말을 얹지 않았던 화목현과 이정진도 입을 열었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나비야.”
“정후 형, 안녕하세요.”
이제 나한테 아는 척도 해?
“나랑 똑같이 입었네?”
…뭐라고?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이번에는 안 진다.”
“예?”
“안 진다고.”
“그러세요.”
어제 청춘 만화를 보고 잤나… 심지어 이젠 나를 라이벌로 의식하는 것 같아서 문제였다. 나는 박정후를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건 뭐,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쟤 맛이 갔나?”
정요셉이 내 어깨에 팔꿈치를 올리더니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차라리 맛이 간 거면 좋겠네요.”
저 멀리서 이남주가 주먹을 들고 힘내라는 포즈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 쟤가 제일 얄미워.
“이제 시작합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MC가 손을 흔들면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약간 섭섭한 마음도 드네요.”
사람으로 꽉 차 있던 스튜디오가 어느새 넓어졌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겠죠?”
MC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봉투를 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인 건가.
“오늘은 ‘첫 번째 곡 1분 미리보기’를 진행하는 날이죠? 벌써 첫 번째 곡을 편곡한 팀도 있다던데…….”
대부분의 팀이 편곡부터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기 팀의 이미지에 맞게.
“제가 직접 1분 미리보기 순서를 뽑으려고 하는데요. 일단 테이블에 팀명이 들어 있는 봉투 4개를 놓겠습니다. 그리고 섞을게요.”
MC는 테이블에 봉투를 놓더니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섞었다.
“사실 제작진 측에서 봉투 순서를 알려주긴 했는데,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못하는 팀부터 내보내기 위해 MC한테 순서를 알려준 것 같았다. 그래야 진행이 재밌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봉투를 섞어서 어느 팀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 전략적으로 1분 미리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의 전략이 다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자!”
MC의 목소리에 연습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첫 번째 팀을 뽑겠습니다.”
MC가 봉투 하나를 골라 열었다.
“…먼저 1분 미리보기를 보여줄 팀은, RT 엔터입니다!”
첫 번째 차례는 피했다. RT 연습생들은 의자를 가져오더니 자리를 잡았다.
RT 엔터가 뽑은 곡은 위영 선배님이 소속된 그룹의 곡이었다. 박정후가 중심을 잡고 마이크를 잡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박정후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RT 엔터는 퍼포먼스보다는 보컬로 유명했다.
-oh oh oh oh
이 공간에 너와 나
우리는 샴페인을 마셨지
인정하긴 싫지만. 박정후의 보컬은 좋았다.
-아름다운 시절에
우리는 침대에 누워
아름다운 상상을 펼쳐.
박정후가 중앙으로 들어오고 악을 쓰면서 고음을 원키에 끝냈다. 이로써 RT 엔터는 보컬로 승부를 볼 것 같네.
“…오, 이렇게 RT 엔터의 1분 미리보기 무대가 끝났습니다.”
박정후는 무대가 끝난 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노려봐?
“박정후 연습생, 이 노래를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박정후가 입에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저희가 지금껏 보컬로 승부를 보는 무대를 보여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해봤습니다.”
“박정후 연습생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보컬 무대가 없긴 했어요?”
“네, 일단 프로님들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는 퍼포먼스 무대 위주로 했습니다.”
묘하게 말투도 나랑 비슷한 것 같다면 자의식과잉일까.
“그렇다면 박정후 연습생이 이기고 싶은 연습생이 있을까요?”
그러자 아래로 떨어졌던 박정후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범나비 연습생이요.”
“범나비 연습생?”
“저랑 포지션도 겹치고, 자꾸 비교하는 영상이 뜨더라고요.”
비교하는 영상이 있을 리가. 이건 박정후의 착각이다.
‘자기만의 소설에 빠져 있네.’
“그래서 범나비 연습생을 골랐습니다.”
“범나비 연습생의 답변을 듣고 싶지만! 일단은 다음 무대를 볼 차례라 AA 엔터의 차례가 오면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RT 연습생분들, 고생하셨어요!”
RT 연습생들이 의자를 치우는 동안, MC는 또다시 봉투를 섞으며 신중하게 고민을 했다. 그렇게 맨 끝에 있는 봉투를 골라 열자,
“이번에는… AA 엔터입니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박정후 연습생이 범나비 연습생을 지목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째 무대는 AA 엔터가 되었네요. 범나비 연습생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는 대답하기 전에 우선 멤버들의 얼굴을 살폈다.
“…일단 정후 형, 절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뽑혀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지만?”
나는 박정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후 형이 저를 뽑아주셨으니까… 저는 정후 형한테 따라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따라잡히지 않도록! 범나비 연습생의 패기 있는 답변 잘 들었습니다.”
MC가 박정후를 보면서 물었다.
“범나비 연습생의 답변이 마음에 드시나요?”
“네…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들긴. 떨떠름한 표정이면서.
“박정후 연습생은 어떤 말을 하고 싶나요?”
“나비야, 따라잡히지 마라. 내가 따라잡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외면하며 억지로 손뼉을 쳤다. 물처럼 흐르는 영혼 없는 박수.
“박정후 연습생의 재밌는 답변을 들었는데요! 이제 AA 연습생들의 무대가 남아 있죠? AA 연습생들은 준비해 주세요.”
이남주 하나로 귀찮아 죽겠는데 한 명이 더 생겼다. 이남주는 재밌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귀찮지만…….’
나도 똑같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앉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리가 생각해 놓은 전략은 따로 있었으니까.
“얘들아, 자기가 맡은 포지션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우리가 쓴 전략은 각자 맡은 포지션을 바꿔본 것. 이번에 내가 맡은 포지션은 ‘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