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뒷동산(2)
팔에 소름이 돋았다.
“저랑 똑같은 운동화여서요.”
“흔한 브랜드잖아. 안 그래?”
“흔하긴 하죠.”
흔한 브랜드긴 했지만, 이상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게? 우리 막내랑 운동화가 똑같네. 신발 끈도.”
정요셉도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나를 보호하는 것처럼 말을 얹었다.
‘진짜잖아.’
신발만 봤지 신발 끈은 못 봤는데. 나랑 똑같은 갈색 신발 끈이었다. 이건 내 신발 끈이 더럽다고 엄마가 자기 신발 끈을 묶어준 거였다. 신발 끈 색까지 따라 하다니.
“뭐가 똑같아. 원래 이 운동화에 있던 신발 끈이잖아?”
“이 신발 끈은 없었어요.”
“내가 살 때는 있었어!”
박박 우기네. 슬슬 손목이 아려서 화목현을 쳐다보았다.
“목현 형, 올라가죠.”
“그래, 올라가자.”
박정후한테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손목을 문질렀다. 최선을 다해서 손목을 천천히 돌려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짜증 나는데.’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머릿속에 박정후를 집어넣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신경이 거슬렸다.
이대로면 박정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 이름이 같이 언급될 것이다. 그 꼴은 보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대응을 안 하자니 계속 박정후 소식이 들릴 거고. RT 연습생들도 합심하는 것 같더니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는데.’
아이돌은 컨셉도 곧 생존력이다.
그런데 나의 정체성을 빼앗으려고 하다니 너무나도 불쾌했다.
“우리 막내~?”
앞서가던 정요셉이 내 걸음에 맞춰 옆에 섰다. 이윽고 마이크에 손을 얹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쟤가 우리 막내 따라 하잖아~?”
“네, 그렇죠.”
“내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내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정요셉이 빙그레 웃었다. 또라이 같은 미소.
하필 그 순간 정요셉 뒤로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후광이 비쳤다. 거짓말처럼 눈을 깜빡이자 사라졌지만. 그때 뒤에서 올라오던 주이든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요셉 쟤 왜 저래!”
주이든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글쎄요.”
“…너는 저렇게 되면 안 된다!”
처음으로 주이든이 어른처럼 보였다.
“도착했다!”
화목현의 외침에 고개를 들자 지도에서 봤던 ‘R’ 표시가 보였다.
“워, 가까울 줄 알았는데 높긴 하다~”
그리고 멤버들이 ‘R’ 표시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모래주머니 빼셔도 돼요.”
정자에서 대기하던 스태프의 말에 후련하게 모래주머니를 뺐다. 가벼워진 발목을 보고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발목이 무거워져서 정상까지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얘들아, 카테고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 근처에 있겠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R’ 표시와 반대쪽에 있는 정자에 갔다. 정자에 올라가 천장과 바닥을 살폈으나 별다른 건 없었다. 그렇다면 아래에 있나?
다시 아래로 내려가 몸을 최대한 낮췄다. 좁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손을 집어넣어 보니 네모난 게 잡혔다.
“찾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보자 거미줄 사이로 봉투가 있었다. 팔을 뻗어 봉투를 뜯고는 멤버들에게 보여주었다.
“형들, 봉투 찾았어요.”
멤버들은 행동을 멈추고 즉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봉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I.P – 졸업식》
“I.P 선배님의 졸업식이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가사도 좋았고. 이 노래를 놓치기는 아쉬운데. 그때였다.
“AA 연습생 여러분?”
방송작가가 우리를 불렀다. 대체 언제 오셨어?
“RT 연습생들이 곡을 바꾸고 싶다고 해서요.”
RT 연습생들이? 다른 엔터도 아니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얻기까지 했으니 나로서는 바꿀 마음이 없었다. 이런 노래를 놓칠 수는 없지.
이보다 더 좋은 노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형들, 바꿀 거예요?”
“음, 아니.”
“절대~!”
멤버들도 똑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RT 연습생들은 우리 곡을 알고 바꾸려고 하는 건가요?”
“모릅니다.”
우리 곡을 모르는데 바꾸려고 했다고? 어찌 됐든 카테고리를 지키려면 RT 연습생들과의 대결에서 이겨야 했다.
“그렇다면 대결을 하기 전에 혜택부터 확인해 보자.”
“목현 형, 어차피 무대 조명, 무대 배경, 옷 정도여서 딱히 확인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제작진을 믿으면 안 돼. 혜택이 다를 수도 있잖아.”
화목현은 제작진을 믿지 않는구나. 나는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는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무대 조명, 무대 배경, 옷》
“형들, 무대 조명, 무대 배경, 옷이라는데요?”
“혜택은 똑같네. 우리 2등 혜택 맞지?”
“네, 확실히 2등 혜택이에요.”
그제야 멤버들은 제작진을 향한 의심을 거뒀고, 나는 뭐가 더 없나 싶어 봉투를 탈탈 털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졌다.
“형들, 종이가 또 있는데요.”
“종이?”
“잠시만요.”
나는 떨어진 종이를 주워 확인했다. 정자와 나무가 그려진 작은 지도였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보물 표시가 있다는 점이었다.
“형들, 보물 지도 같은데요?”
“우리가 ‘R’ 표시가 되어 있는 곳에 와서 그런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막내야, 지도 좀.”
내가 지도를 건네자 이정진은 빠르게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서 가깝네.”
“어딘데요?”
“잠깐만.”
그대로 이정진은 뒤를 돌아서 몇 번 걷지도 않고 한 소나무 앞에 멈췄다.
“보물, 여기에 있는 것 같은데.”
“그래요?
“응, 여길 파면 나오지 않을까.”
멤버들은 소매를 걷고 무작정 소나무 밑을 팠다. 손목이 알싸하게 아프긴 했으나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보물은 포기할 수 없으니까.
땅을 개처럼 파는데 손끝에 뭔가 닿았다. 옆을 더 파자 상자가 나왔다. 곧바로 그 상자를 꺼내서 정요셉한테 건넸다.
“요셉 형, 열어주세요.”
“그래~!”
상자 안을 확인한 정요셉의 눈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였다. 어떤 보물이길래? 옆에 있던 주이든도 상자 안을 확인하고 감탄했다.
“우리, 대결하자.”
뒤늦게 나는 정요셉의 옆으로 가서 상자 안을 확인했다.
《다른 팀 혜택 2개 빼앗기》
…이거, 괜찮겠는데? 멤버들이 상자 안을 확인하고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얘들아, 대결할래?”
RT 엔터와 대결했다가 져도 이걸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멤버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화목현이 손을 들어 입을 열었다.
“대결하겠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화목현이 싸움판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정말로 RT 엔터와 대결할 겁니까?”
“네, AA 엔터는 RT 엔터의 대결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
뒷동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RT 연습생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노래를 가지고 싶어 한다면서?”
먼저 방패 역할인 정요셉이 앞으로 나와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 노래 가지고 싶었어!”
박정후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노래길래?
“너희 노래는 뭔데?”
“우리는 위영 선배님의 러브 레터거든.”
그거라면 꽤 괜찮은 노래다. 남자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은 하고 싶어 하는 섹시한 노래인데 그걸 포기한다고?
“뭐야. 괜찮은 노래잖아~?”
“그렇긴 한데 우리랑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 노래는 어울릴 것 같고?”
“너희도 잘 모르잖아. 그 노래가 너희한테 잘 어울릴지.”
다른 노래여도 딱히 잘 어울리지 않을 텐데. 정요셉의 말투도 박정후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는지 박정후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화목현이 끼어들었다.
“정후야, 우리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아직 말한 적도 없는데 탐낸 거야? 조금 너무하다.”
“탐냈다뇨. 원한 거죠.”
“그게 탐냈다는 말이나 똑같은 거 아닌가.”
화목현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박정후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에이… 다르죠, 목현 형.”
“이 노래도 너희한테 어울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우리 노래를 고른 건지.”
“그러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죠, 뭐.”
만만하다는 말을 화목현은 돌려서 말했다. RT 연습생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쟤들은 그냥 우리 노래를 빼앗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그때 MC가 스케치북을 들고 나타났다.
“시간이 없어서 빠르게 진행합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이미지 게임을 할 거예요. 제가 스케치북을 넘길 건데요. 스케치북에 있는 캡처본을 보고 이 캡처본이 돌연프 몇 화에 나왔는지 맞히면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에는 자신이 있었다.
“AA 엔터에서 한 명, RT 엔터에서 한 명. 이렇게 나와주시면 됩니다.”
누가 나갈지 회의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나갈게요.”
“나비야, 잘 알아?”
화목현의 신중한 말투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돌연프 자주 돌려 봤어요. 잘 알아요.”
“나비야, 믿는다.”
“저만 믿으세요.”
멤버들의 응원을 받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동안 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돌연프를 시청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내가 어떻게 춤을 추는지, 그리고 실수는 없었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자신 있었다.
“AA 엔터에서는 범나비 연습생이 나왔고… RT 엔터에서는?”
“제가 나가겠습니다!”
또 박정후랑 엮이네.
“그럼 첫 번째 문제를 보여 드릴게요.”
스케치북이 뒤로 넘어가고 첫 번째 문제를 보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야?”
“…저건 나도 모르는데.”
커뮤니티에 돌고 있는 돌연프 짤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몇 화인지 알 수 있었다.
“범나비.”
“네, 범나비 연습생이 틀리면 박정후 연습생한테 기회가 넘어갑니다.”
옆에서는 신중히 하라는 말조차 없었다. 멤버들을 나를 믿고 있었다.
“간단한 짤입니다.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1화에서 I.P 선배님이 ‘노력도 안 하는 연습생은 필요 없어’라고 말한 장면입니다.”
MC가 정답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범나비 연습생, 정답입니다!”
정말 쉬운 문제인데 이걸 못 맞히냐.
“자, 두 번째 문제입니다.”
돌연프는 인심이 후한 편이다.
“이건 몇 화에 나오는 장면일까요?”
이번에도 몇 화인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숨에 맞히면 재밌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니 박정후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몇 화였더라? 아는데, 알고 있는데…….”
박정후는 이번에도 정답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야겠네.
“범나비.”
“이번에도 범나비 연습생!”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3화. 폐교에서 남주 형이 귀신 스태프분과 악수하는 장면입니다.”
MC가 큐카드로 정답을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범나비 연습생, 정답입니다!”
이번에도 정답.
“범나비 연습생, 혹시 어떤 장면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남주 형이 귀신 스태프분한테 애교를 부린 뒤 카테고리를 받는 장면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짤은 이남주 팬 영업짤로 유명했다.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이남주를 영업할 때마다 저 짤을 사용하는데 모를 리가.
“이거, 범나비 연습생이 이길 것 같은데요? 박정후 연습생, 분발해 주세요!”
“…네!”
“자, 세 번째 문제입니다.”
스케치북이 넘어가고 캡처본을 보는 순간,
“범나비.”
손을 들어서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MC는 박정후를 보면서 물었다.
“그 전에… 박정후 연습생도 이 짤을 알고 있나요?”
이미지 게임이 너무 빨리 끝나면 방송 분량이 안 나오니 MC가 박정후한테 눈치를 준 것이다. 네가 이걸 맞혀야 방송 분량을 뽑을 수 있다는 의미로.
“저, 저 알 것 같아요!”
“먼저 박정후 연습생의 답을 들어도 될까요, 범나비 연습생?”
“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박정후는 모를 테니까.
“박정후 연습생, 정답은?”
“최근에 방영된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5화… 오스 작곡가님?”
저 장면에 오스가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저도 말해도 되나요?”
“아, 네. 범나비 연습생의 정답은?”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5화. 개인 팀 고예찬 연습생이 볼펜을 문 채 울고 있는 장면입니다.”
MC는 나와 박정후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이미지 게임의 정답자는… 범나비 연습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