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뒷동산(1)
그렇게 뒷동산에 모인 연습생들은 PD의 신호를 기다렸다.
“막내야, 졸려…….”
정요셉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어제 오후 4시에 시작한 방송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만큼 피로도가 확실했다.
나도 약한 소리를 안 하는데.
“저도요.”
“우리 막내가 피곤할 때도 있어~?”
“요셉 형, 저도 사람이에요.”
“아니~ 사람은 맞지. 그런데 우리 막내가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하잖아~”
아프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같은 처지인데 굳이 아프다고 찡찡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 막내는 우리보다 건강하잖아~”
…몸이 젊어서 그런가. 하긴 정요셉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나는 피곤할 틈이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건이 끊이질 않아서 피곤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우리 막내는 모를 거야, 이 마음~”
정요셉이 입꼬리를 밑으로 내리며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뭐지? 이 신종 괴롭힘은.
“요셉이는 슬퍼~”
“…아니 ,요셉 형.”
“정말 슬프다~”
내가 일방적으로 정요셉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화목현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둘이 화해해.”
내가 사과하려고 입을 열자 정요셉이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우리 막내, 죄송한가요?”
“요셉 형… 죄송합니다.”
“이게 화해인가요.”
“…사과입니다.”
다행히 PD가 마이크를 들었다. 나이스 타이밍.
“자, 이제 시작합니다!”
PD의 외침에 연습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자의 팀이 적힌 팻말 뒤로 섰다. ‘R’이 적힌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MC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연습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연습생들의 활기찬 대답에 MC는 ‘R’이 적힌 깃발을 흔들었다.
“오늘은 무슨 날이죠?”
“뒷동산!”
“카테고리!”
연습생들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MC의 표정이 악마처럼 보였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뒷동산에서 카테고리를 찾는 날이죠. 그런데 연습생 여러분, 왜 카테고리를 뒷동산에서 찾는 걸까요?”
제작비 때문이겠지. 최종 무대를 하려면 최대한 제작비를 아껴야 했다. 무대 세트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니까. 거기에 돌연프 화제성이 높다지만 들어오는 광고는 한정적이니.
제작비를 아끼고 재미를 뽑으려면 우리를 굴릴 수밖에 없을 테니. 그래서 장소를 뒷동산으로 선택한 게 아닐까.
“자,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남주 연습생?”
“…어, 재미를 위해서요?”
“재미라뇨!”
재미가 아니야? MC가 검지를 흔들었다.
“요새 연습생 여러분이 지치고 힘든 것 같아서요. 돌연프 제작진이 항상 연습생들의 건강 걱정을 했거든요.”
…돌연프 제작진이 연습생들을 걱정했다고? 어불성설이다. QTQ 방송국에서 뛰어다니고, 폐가와 폐교에서 공포 체험도 했는데.
“연습생들의 건강도 책임지는 돌연프,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뒤이어 MC가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MC도 얼마나 웃기겠는가.
“그래서 이런 걸 준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스태프들이 모래주머니를 가져왔다. 내가 몸 관리를 할 때마다 사용하던 모래주머니였다.
“이 모래주머니는 각 팀에서 한 명만 찰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 판국에 체력이 더 깎이게 생겼네…….
“여기서 끝인 줄 아셨죠? 각 리더들은 뒷동산 지도를 받으러 나와주세요. 아차, 화목현 연습생은 추가로 다른 지도도 받아 가세요. 팀 순위 1위 혜택입니다.”
화목현이 스태프에게 손을 내밀자 스태프는 뒷동산 지도와 또 다른 지도 하나를 건넸다. 화목현이 가져온 뒷동산 지도는 다른 팀이 받은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
“…뭔가 달라.”
이정진도 그 부분을 발견했는지 입을 열었다.
“정진아, 뭐가 다른데?”
주변 눈치를 보던 이정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기.”
이정진이 가리킨 ‘R’ 표시 밑에는 ‘보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 지도에만 이런 표시가 있는 건가 싶어서 슬쩍 눈을 돌려 다른 팀의 지도를 확인했다.
‘없네.’
정말 1위 혜택이 이거였던 건가.
“우리가 운이 좋네~”
정요셉의 말대로 우리는 운이 좋았다. 이건 우리만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여러분은 지금부터 카테고리가 적힌 팻말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규칙 하나가 있습니다. 카테고리를 2개 이상 가져오면 즉시 탈락입니다.”
그렇다면 카테고리는 딱 하나만 고를 수 있다는 뜻이고.
“그리고 상대 팀의 카테고리를 빼앗고 싶을 때는 대결을 하게 됩니다.”
…어떤 대결이지? MC는 스케치북을 높게 들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대결 방법은 돌연프 이미지 게임입니다. 저희가 돌연프 캡처본을 보여 드릴 건데요. 그 캡처본을 보고 몇 회차의 어떤 상황인지 손을 들어 말해주시면 됩니다.”
대결이 꽤 쉽겠는데.
“여기까지 이해하셨죠?”
“네!”
연습생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러면 먼저 4위인 개인 팀부터 올라가 주세요!”
개인 팀부터 뒷동산에 올라가자, 화목현은 몸을 돌려 우리를 불렀다.
“안 그래도 가보려고 했는데 잘됐네~”
정요셉도 그렇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 화목현이 아직 대답하지 않은 나를 보았다.
“나비는 어때?”
“어차피 가려고 했던 곳이니까 가야죠.”
그런데 우리는 제일 중요한 걸 빼먹고 있었다.
“근데… 모래주머니는 누가 찰래?”
저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누가 차야 할까. 하지만 생각을 곱씹어봐도 나밖에 없었다.
“제가 찰게요.”
나는 자연스럽게 화목현의 손에 들린 모래주머니를 가져왔다.
“나비야, 이유를 말해줄래? 너만 찰 수 있다고 생각해서 차는 건 아니지?”
“그것도 그렇지만.”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내가 모래주머니를 차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아이템이 있으니까.
“막내는 위험해.”
웬일로 이정진이 내 의견에 반대했다. 내가 무슨 항상 다치는 사람도 아닌데. 거기에 주이든이 끼어들었다.
“정진이 말대로 혼자서 뭘 하려고 그래?”
“아니, 이거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데……?”
“모래주머니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몰라?”
모래주머니가 무서운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모래주머니는 무서운 게 아니에요. 운동기구 같은 거죠.”
“운동기구라도 잘못 쓰면 큰일 날 수도 있어.”
내가 말을 하려는 찰나에 정요셉이 끼어들었다. 어린아이를 살살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저 모래주머니 차고 있는 상태로 춤도 추고 그랬어요.”
“뭐? 이걸 차고?”
“네, 이든 형.”
“거짓말!”
“모래주머니 차고 뛰면서 노래 연습을 한 적도 있고요.”
멤버들이 모래주머니를 뺏을까 두려워서 미리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차고 고개를 들었다.
“이미 찼어요.”
화목현은 어린아이에게서 차마 장난감을 뺏을 수 없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나비야, 힘들면 말해.”
“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뺏을 수도 없고.”
저 뒷말은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발목을 조금씩 움직이며 모래주머니 무게를 확인했다. 계단을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무게였다. 한 2kg 정도 되려나?
“막내야, 괜찮겠어?”
이정진은 걱정된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정요셉과 주이든은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막내, 힘들면 말해줘. 업어줄게~!”
“업어줄게!”
이 모래주머니가 뭐라고 이렇게 난리들일까.
“AA 연습생분들, 올라가 주세요!”
MC의 신호에 맞춰 우리도 뒷동산을 올랐다.
***
숨 막힐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산책로라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뭐, 계단이 조금 많을 뿐이지. 사실은 아주 많이.
“나비야, 힘들지는 않고?”
힘들다거나 몸이 무겁진 않았다. 나는 발목을 들어 화목현한테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아직은 가벼워요.”
그저 발목에 사람 한 명 더 달린 정도였다.
“힘들어!”
“계속 올라갈 수 있을까?”
이내 먼저 올라갔던 개인 연습생들과 RT 연습생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빠르게 정상까지 올라가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근데 FG 연습생들은 벌써 올라갔다던데?”
벌써 올라갔다고? 정상까지 갈 목적인가…….
“우리는 가볍게~”
“가볍게!”
“빠르게 갈 수 있지~!”
“갈 수 있어!”
“우리 이든이는 못 가지!”
“이든이는 못 간다고? 가위바위보 해!”
정요셉과 주이든은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누가 먼저 계단에 오를지 결정했다. 그런 둘을 놔두고 넓은 공간에 도착하자 화목현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나비야, 1분만 쉴까?”
“올라가도…….”
“지금 쉬고 싶다고? 알았어.”
내 말을 화목현이 가로챘다. 나는 더 올라가도 문제없었는데. 그러고는 벤치에 앉으라며 내게 손짓했다.
“막내야, 앉아.”
“…정진이 형, 전 강아지가 아닌데요.”
나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벤치에 앉았다. 뒤늦게 다른 팀 연습생과 대화를 나누던 정요셉이 다가왔다.
“다른 팀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정상까지 가려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대.”
30분이면… 오래 걸리네. 카테고리를 바꾸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최장 녹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재미를 뽑으려면 다른 그룹과 카테고리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범나비, 초콜릿!”
“초콜릿은 언제 가져왔어요?”
주이든이 카메라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몰래 가져왔어. 먹어!”
내가 포장지를 뜯어 초콜릿을 입에 넣자 주이든의 어깨가 하늘로 솟구쳤다.
“맛있지?”
“네, 맛있네요.”
“그거 편의점에 하나밖에 안 남은 초콜릿이더라고. 밀크 초콜릿이야, 무려 밀크.”
“네? 네… 이든 형, 고마워요.”
“내가 이렇게나 널 챙겨준다.”
“이든 형뿐이네요.”
그러자 주이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잔기침을 뱉었다.
“그런 말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받아줄게!”
내 칭찬이 부끄러웠던 모양이군.
“얘들아, 시간 별로 안 남았으니까 빨리 올라가자.”
벤치에서 일어나자 발목이 묵직했다. 한번 쉬었더니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럴 때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을 오르는데 박정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요셉아, 나비야, 안녕?”
하필 이럴 때 만난 사람이 박정후라니.
“박정후도 안녕~?”
“이제 정후라고 안 불러주네? 섭섭하다.”
“나중에 정후라고 불러줄게~!”
그나저나 다른 멤버는 안 보이고 박정후 혼자 덩그러니 있다니. 내가 의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박정후에게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셉아, 어디로 갈 거야?”
“그건 비밀인데~?”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어? 우린 친구잖아.”
우리 사이라니.
‘속도 좋다.’
하마터면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친구긴 하지~”
정요셉은 싫은 티를 내지 않고 박정후와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다. 눈치가 있다면 의사를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박정후는 정요셉한테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요셉아, 어디 가?”
“나는 위로 올라가야지. 너는 어디로 가는데?”
“아, 나는 쉬고 있었어.”
“쉬고 있다고~?”
“몸이 좀 아파서.”
전혀 안 아파 보이는데. 박정후가 계속 말을 걸어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 시간만 갈 것 같은데. 나는 정요셉의 앞을 막았다.
“정후 형, 이제 저희끼리 올라갈게요.”
“…어?”
“시간이 없어서.”
“어, 잠시만. 내가 줄 게 있는데.”
박정후는 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뭘 주려는 건가 싶어서 가만히 있는데 박정후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왔다.
“…어?”
그리고 박정후는 앞으로 넘어지는 척하며 나를 밀쳤다. 다행히 중심을 잡으며 산책로 난간을 잡았지만 난간을 잡을 때 체중이 실렸는지 손목이 우둑, 하고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젠장…….
“헉… 나비야, 미안해.”
“…정후 형은 괜찮아요?”
“나는 멀쩡하지.”
나를 에어백처럼 사용했으니 당연히 괜찮겠지. 박정후가 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최대한 멀쩡하다는 듯이 손목을 털었다.
“저도 멀쩡해요.”
“그래……?”
박정후는 아쉽다는 듯이 일어섰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박정후의 운동화가 내가 신고 있는 것과 똑같은 운동화였다. 내 시선을 따라온 박정후가 빙그레 웃었다.
“운동화…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