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범나비는 참지 않아(2)
주이든을 안심시켜 놓은 다음에 이서혁한테 연락을 했다.
(범나비) 나중에 전화 좀 하죠
(알수없음) 왜? 내가 보고 싶어?
(범나비) 아니요. 할 말이 있어서요.
(알수없음) ㅇㅋ
연락하면 무시할 줄 알았는데… 다행인 건가. 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다음에 단체 연습실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싸늘했다.
“얘들아, 미안해!”
“…컨셉을 적은 노트가 사라졌다니. 어디에 놓고 온 건 아니고?”
“기억이 잘…….”
거짓말이군. 나를 깔고 싶어 하는 박정후가 노트를 안 가져올 리 없다.
“뭐야. 정후 형의 컨셉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 어. 미안.”
차라리 없다고 하는 게 마음 편하지 않나.
“그럼 제 아이디어로 갈까요?”
“…그건 생각을 조금 더 해보자.”
그래 놓고서 내가 낸 아이디어는 여전히 싫단다. 내가 이유를 묻자 만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상한 변명을 내놓았다.
“이상하다. 난 나비 아이디어가 좋을 것 같은데~?”
“요셉이는 나비랑 같은 팀이라서 좋다고 하는 거 아니야?”
박정후는 정요셉을 무서워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나중에는 다 내 탓으로 돌리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것 말고 딱히 좋은 아이디어가 없으니까. 안 그래, 정후야~?”
“…나는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잖아. 둘이 같은 팀이기도 하고.”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남주가 손을 휘저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나비 컨셉이 싫으면 이번 보컬 트레이닝 선생님께 물어보는 건 어때요? 곧 오실 텐데.”
이남주의 제안에 박정후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자기 편을 들어주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게 좋겠다. 이대로 가면 싸움밖에 안 날 것 같고. 그동안 다들 노래 연습이나 할까?”
애매한 박정후의 태도와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에 숨이 턱 막혔다. 아, 이럴 때 청심환을 먹는 거구나. 나는 몰래 인벤토리에서 청심환을 꺼내 아그작 씹었다.
【톡 쏘는 청심환을 사용합니다.】
청심환을 사용하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랜덤 박스에서 모든 아이템을 사용하자 보컬 트레이닝 선생님이 연습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와!”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번 보컬 트레이닝 선생님은 9년 차 남자 아이돌인 위영 선배였다. 악착같이 예능에서 살아남은 위영 선배가 인기를 얻으며 위영 선배 그룹의 ‘HOHO’라는 노래가 역주행했었지.
그렇게 위영 선배는 아이돌로서 최고의 상인 골든 레코드 디지털 음반 대상과 앨범 대상을 받았었다. 뛰어난 작곡 실력까지 겸하고 있어 이번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의 심사 위원으로 제격이었다.
“설마 제가 올 줄은 몰랐죠?”
“아닙니다, 선배님!”
“와, 여기는 뭔가 기운이 좋네요. 다른 연습실은 난리였거든요.”
어떤 난리가 있었길래. 위영 선배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제가 드림 히어로의 하늘이시여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저도 좋아했습니다……!”
박정후가 호들갑을 떨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한 번도 노래를 맞춘 적이 없었으니까. 각자 노래 연습을 했지. 박정후가 모여서 하자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아 종종 정요셉, 이남주, 고예찬과 함께 노래를 맞춰본 게 전부였다.
“노래 시작 전에…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는 카테고리가 중요한데, 이번에는 카테고리가 없는 대신 주어진 노래에 컨셉을 정하라고 했잖아요. 맞나요?”
“…네!”
“보컬 A팀은 어떤 컨셉으로 진행할지 정했나요?”
그러자 입을 벙긋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위영 선배도 놀랐는지 몸을 앞으로 당겼다.
“여기 팀 리더가 누구죠?”
“저요!”
박정후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컨셉이 없죠? 다른 보컬 팀은 컨셉도 정해놨던데.”
“…아, 컨셉 회의가 조금 늦어져서.”
“컨셉 회의가 늦어졌다고요?”
“파트 분배 문제 때문에 컨셉 회의가 늦어져서 확실한 컨셉을 못 잡았습니다.”
“그 말은, 컨셉 회의를 하긴 했다는 거네요?”
“네… 하긴 했는데.”
청심환을 미리 먹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박정후의 행동이 답답해서 질식사했을 것이다.
“하긴 했는데요?”
“그러니까…….”
박정후의 말꼬리가 길어질수록 위영 선배의 미간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어떤 컨셉인지 정하긴 했나요?”
“네…….”
“어떤 컨셉으로 진행할지 아이디어를 말한 사람이 있나요?”
곧바로 내가 손을 들었다.
“여기요.”
나는 미리 패드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위영 선배에게 보여주었다. 위영 선배는 내가 보여준 링크와 사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어, 이렇게까지 했으면서 컨셉을 제대로 못 말한 거예요?”
“네…….”
“드림 히어로를 본 사람으로서 가면무도회라는 컨셉, 괜찮은 것 같은데… 컨셉은 이대로 진행해도 무리 없을 것 같아요.”
고구마처럼 꽉 막혔던 마음이 쑥 내려갔다. 고예찬은 내 옆구리를 치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박정후는 카메라가 있어 내색은 못 했지만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컨셉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이제 노래를 들어볼까요?”
각자 노래를 부를 때도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너무 없는 게 탈이었다.
“…허.”
다만 미리 합을 맞춰봐야 했다. 카메라만 쳐다보며 노래를 부르니 이게 무대인지 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절만 들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평범하네요.”
“감사합니다!”
“이걸 감사할 필요가 있나요. 악평을 돌려서 말한 건데.”
“…예?”
“분명 저한테 파트 분배를 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무대가 뒤죽박죽이네요. 무슨 노래방 왔나요?”
위영 선배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앞머리를 넘기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컬 A팀은 컨셉도 제대로 못 말하고, 노래도 중구난방에… 이게 무슨 팀이죠?”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죄송할 짓을 안 하면 되지 않을까요?”
결국 위영 선배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대로면 보컬 A팀은 하위권이 될 것 같네요.”
그렇게 위영 선배는 단체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정적에 휩싸인 연습실에는 공허만이 남아 있었다. 몇 분 뒤에 박정후가 나에게 접근했다.
“…나비야, 그 가면무도회 컨셉으로 하자.”
“진짜요?”
“어, 그러자…….”
드디어 박정후가 백기를 들었다.
***
위영 선배가 한 말에 정신을 차린 연습생들은 파트를 맞추기 시작했다.
“얘들아, 조금 쉴까?”
“조금 쉬자!”
연습한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박정후가 쉬자고 하는 순간 정요셉이 음료수나 마시자며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 속이 다 시원하다!”
정요셉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트를 안 맞추고 하니까. 속에서 천불이 막~”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하는 타입인 정요셉은 박정후가 답답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런데 우리 막내, 어제 기숙사에는 왜 늦게 왔어~?”
“이든 형이 약 좀 빌려달라고 해서요.”
약을 빌려달라고 한 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정요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이든이가 너한테 약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네, 그랬어요.”
“…걔가?”
“왜요?”
정요셉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이든이는 누구에게 선뜻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서.”
“하긴 뭐든 혼자 하려고 하지 않나요?”
“우리 막내, 잘 아네?”
몇 달을 같이 있어서 그런지 주이든의 성격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그런데 정요셉한테 다른 것도 말해야 할까.
“근데 약은 왜 빌려달라고 한 거야?”
…말해? 주이든이 말하지 말라는 말은 안 했잖아.
“HOR 연습생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했어요.”
“…뭐? 어쩌다가?”
“카메라가 없는 사각지대에서 밀쳤다고…….”
내가 말을 이어나가려는 찰나의 순간, 복도에서 쾅! 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 어디서 난 거야?”
“…글쎄요.”
“이든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주이든이 아니길. 그런데 복도로 나가보니 HOR 연습생들이 넘어진 주이든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마침 그 장면을 나랑 정요셉이 보고야 말았고.
“…저거 주이든 맞지?”
“네…….”
주이든이 HOR 연습생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정요셉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요셉 형?”
내 목소리에 험악하게 굳었던 정요셉의 인상이 풀어졌다. 그러면서 정요셉은 HOR 연습생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주이든한테 다가갔다.
“이든아~”
“어, 뭐야!”
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주이든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우리 이든이, 맨날 혼잣말로 밑바닥 인생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진짜로 밑바닥 인생을 맛본 거야?”
“밑바닥 인생은 무슨!”
주이든이 힘도 없는 주먹으로 허공을 휘저으면서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이 협박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걸 보면 내가 말해준 방법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았다.
“형, 왜 상처가 늘었어요?”
“…상처가 늘 수도 있지.”
저번에는 얼굴이더니, 이번에는 목 주변에 상처가 나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이든의 얼굴을 더는 보지 않고 뒤를 돌았다.
“요셉 형, 저는 갈 곳이 있어서 다녀올게요.”
“…어? 어디 가는데?”
이대로 놔두면 주이든을 만만하게 보고 또 괴롭힐 것이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서혁한테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형.”
-이제 전화를 하네?
“…필요할 때만 전화해서 죄송해요.”
-알면서 내 마음을 속상하게 하네?
그렇게 말하기는 해도 이서혁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목적을 말해볼까.
“이렇게 전화한 이유는… 제가 준 영상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왜? 걔들이 너 괴롭혀?
“절 괴롭히지는 않지만.”
-흐음……? 널 괴롭히지는 않지만 영상을 써달라?
“네, 옆구리 장면만 편집해서 써주세요.”
그러자 핸드폰에서 이서혁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뭐. 쉬운 일이니까. 나중에 밥 한 끼 먹자?
“…네.”
-어째 싫은 것 같은 말투다?
“네…….”
정말 싫은데 한 번은 만나야겠다. 고마운 마음은 있으니까.
-싫어도 와라?
…하, 연락처를 지울까.
***
이서혁이 영상을 써먹은 건지 반나절이 지나자마자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제작진이 HOR 연습생을 퇴출시킨다는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올라왔다.
[HOR 연습생, 같은 연습생을 때리다]
[HOR 엔터는 묵묵부답, HOR 연습생은 퇴출]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이대로 무너지나?]
이서혁의 행동이 빠르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빠르네. 일부러 영상을 너튜브 렉카에 풀어서 의심을 심은 뒤 원본을 올렸다.
그리고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제작진 측은 HOR 엔터와 합의해서 HOR 연습생을 퇴출시키겠다는 말을 남겼다.
-퇴출시키면 다임?ㅋㅋ
└ HOR : ㅇㅇ 다라네요 ㅠ
└ ㅅㅂㅋㅋㅋㅋㅋㅋㅋ
-누가 쟤들이랑 범나비 똑같다고 했냐? 진심 억까 존나 심했음
└ ㅠㅠ 22 사과해
└ 진심 억울하다… 똑같다고 할 때 마음 아팠음
└ 범나비는 아직도 까이네
-이렇게 세상이 무너지네… 끝까지 믿었는데…
└ ㅋㅋ 병크 있어도 쭉 좋아했잖아 끝까지 믿는단다 개웃기네
-HOR 엔터 병신인가 모르쇠 일관하지 ㅅㅂ
└ ㄱㄴㄲ 데뷔하면 싹 사라질 텐데
└ ?
└ ??
-아 드디어 갔네 HOR 애들 주이든 텀블러 빼앗은 증거도 있고 과거 일진 논란도 있던데 엔터에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지 커뮤니티에 올리면 바로 삭제되더라?
└ 그거 커뮤니티 관리자가 돈 받고 지워주는 듯?ㅇㅇ
└ ㄹㅇ HOR 학폭 증거도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몇 시간 뒤에 삭제됨
그사이에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HOR 연습생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귀에 들려왔다. 잠시 뒤 이서혁한테 톡이 왔다.
(알수없음) 내가 했다?
(범나비) 감사해요
(알수없음) 그리고 내 번호 아무 데나 뿌리지 마라?
(범나비) 네? 안 그래요.
(알수없음)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아는데 사람들이 약아빠져서 ㅋㅋ
(범나비) 아, 네.
(알수없음) 그래서 내가 일부러 이름을 알수없음이라고 쓴 거거든^^
아하, 그래서 이름을 쓰지 않고.
(범나비) 알겠어요
(알수없음) 그게 끝이야?
(범나비) 네
(알수없음) 알 수 없는 놈…
(범나비) ^^
대충 대화를 끝내고 단체 연습실에 들어가려는데 그 앞에서 연습생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그거 들었어? HOR 연습생들 짐 빼고 있다는데.”
“에이, 설마?”
“걔네 성격 더러웠는데 잘됐네.”
“HOR 연습생들 엔터 믿고 나댔잖아.”
그 말을 들으며 단체 연습실로 들어가자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박정후가 보였다. HOR 연습생들이 퇴출돼서 무엇보다 제일 좋았던 점이라면,
“우리 다 같이 노래 맞춰볼까?”
바로 고집이 세던 박정후도 꼬리를 내렸다는 것. 하긴 HOR 연습생들처럼 짐 빼고 싶지는 않겠지.
“그, 나비는 2절 후렴 부분 소리를 조금 더 긁어주면 좋겠어.”
“네, 해볼게요.”
“무대에서도 잘해주면 좋겠다.”
…슬슬 속을 긁는 건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었지만.
“…남주는 너무 잘한다.”
“그래? 정후도 잘해.”
“고마워. 나도 너처럼 잘했으면 좋겠다.”
저런 모습을 보면 박정후의 엉덩이에 꼬리가 달린 것만 같았다. 곧 쉬는 시간이 되었고, 나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이남주를 보았다.
‘…땀을 저렇게 흘려도 잘생겼네.’
그러고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나비야! 다시 연습하자!”
“아, 네.”
그래, 무대에 신경을 쓰자. 얼굴을 신경 쓰면 뭘 할까. 어차피 내 얼굴도 아닌데. 그때 정요셉이 박정후한테 무언가 조용히 말을 했다.
“오… 좋다, 요셉아.”
“그렇지, 형?”
무슨 꿍꿍이인지 정요셉의 표정이 음흉했다.
“드림 히어로가 희망과 우정을 꿈꾸게 하는 만화잖아? 그래서 마지막 엔딩 때 카메라를 보고 귀엽게 마무리하자고 했거든. 어때?”
무대에 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엔딩은 나쁠 거 없었다. 그런데 그때, 박정후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나비는 막내니까 귀엽게 할 수 있지?”
“저요?”
귀엽게? 때마침 눈앞에 시스템이 나타났다.
「문제 9, 관객의 호응 얻기!
(0/500)
페널티:무대에서 조명이 떨어짐
정답 풀이:랜덤 박스 2개」
관객의 호응이라… 그러면 귀엽게 할 수밖에 없지.
“네, 귀엽게 할 수 있어요.”
“정말……?”
박정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굴었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이런 건 또 내 전문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