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범나비는 참지 않아(1)
“…그럼 남주 말대로 우리 곡 컨셉부터 정할까?”
곡 컨셉이라…….
평범한 컨셉을 한다면 ‘그럼 그렇지’라는 평가를 들을 것 같았다. 특히 이 노래로 승부를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곡 컨셉을 화려하게 잡고 관객의 눈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냥 노래로 승부를 볼까?”
박정후의 물음에 이남주가 정색했다.
“정후 형이 노래를 잘 부를 자신이 있다면?”
“아, 그렇다면…….”
어쭙잖은 보컬로 잔기술을 부리는 건 원작 팬분들한테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이도 저도 못한 무대가 될 수도 있지.’
나는 슬그머니 입을 열어 의견을 피력했다.
“화려한 무대로 만들까요?”
“어떻게?”
“만화 에피소드에 나오는 가면무도회 컨셉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드림 히어로 사전 조사를 철저하게 하려고 1화를 틀었는데, 바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면무도회.
“여기 이 장면이요.”
나는 핸드폰으로 드림 히어로 주인공이 가면을 쓴 채 무도회에서 악당을 무찌르는 움짤 몇 개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나비야, 좋은 아이디어 같다…….”
“우리 막내가 사전 조사를 잘해 왔네.”
고예찬과 정요셉은 가면무도회 컨셉이 좋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보컬 팀인데 무대가 너무 화려하면 욕을 먹지 않을까?”
“…나도 그 고민을 했어.”
박정후가 반박했다. 어느 누가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는가. 무대가 화려하면 벅차오르는 분위기를 낼 수 있어서 더 좋을 텐데.
“그러면 정후 형은 하고 싶은 컨셉이 있어요?”
내가 묻자 박정후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음… 노트에 적어뒀는데 그걸 안 가져왔어!”
“그럼 아이디어가 있긴 있다는 말이죠?”
“당연히 있지…….”
이거, 아무래도 아이디어가 없는데 있다고 우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일까지 시간을 줘볼까…….
“지금은 기숙사 갔다 오기가 힘드니까 그럼 내일 말해주세요.”
“어, 어?”
“오늘은 쉬고 내일 보자고요.”
어떻게 나올지 한번 볼까.
***
돌연프 5화 선공개 영상이 뜬 날.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망령인 김올팬은 커뮤니티를 떠돌아다녔다.
[HOR 연습생, 학교 폭력 행사?]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이대로 HOR 연습생 품고 가나]
“온통 HOR 연습생 이야기네…….”
그런데 커뮤니티는 HOR 연습생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범나비가 아니라.
“범나비가 아니라서 좋긴 한데.”
이번 돌연프 5화 선공개 영상에서 HOR 연습생들이 다음 무대에 진출했다나?
-주이든 팬들아 주이든 텀블러 사줘 아직도 텀블러로 지랄하는 거 웃긴다 ㅋㅋ
└팬이 준 거라고 맨날 말했다
하지만 김올팬은 이 상황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웃기네.”
주작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HOR 팬들은 주이든이 주작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주이든이 주작했다는 증거 나오면 어쩌려고 욕을 하냐; 고소당하고 싶어?
└ 응 다음 가해자 좋아하는 새끼
└ 팩트로 말하는데 무슨 고소를 한다고 그럼? 고소가 쉬운 줄 아냐
그런데 이번에는 HOR 팬들이 범나비를 잡고 늘어졌다.
-범나비는 왜 아프고 지랄임?ㅎㅎ
└ 왜 지랄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
└ ㅋㅋ
-범나비가 더 악질 아닌가?ㅎㅎ
└ 나비 소문 증거(X) HOR 학폭 악질 증거 다분(O)
└ 나비로 어그로 끌려는 거 다 보여ㅋ
한 어그로는 HOR 연습생들이 욕을 먹는 게 아니꼬운지 계속 범나비를 까는 댓글을 올렸다. 범나비 욕하는 댓글 다 이 녀석이 올리는 것 같은데.
-주이든도 마찬가지인데 ㅎㅎ
└ 얘 아까 범나비 욕하던 애인 것 같은데
└ 똑같은 댓글 여러 번 올리지 말라고 했다
그 어그로는 범나비로 어그로를 끌었다가 반응이 없으면 주이든으로 어그로를 끌었다.
“청기 백기도 아니고.”
커뮤 혼자 쓰나.
-저 하얀색 셔츠 입은 연습생 뭐임? 주이든 보고 낄낄 웃고 지랄 났다 ㅋㅋ
└ 그냥 웃는 건데?
└ 저런 식으로 웃으면 어디에서든 욕먹어 HOR 연습생 팬들은 사회성 제로인가
-저거 주이든 텀블러 맞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임…
└ (주이든_사진_텀블러_jpg)
└ (주이든_연습생_시절_jpg)
└ 진짜네?
└ 입덕할 뻔했는데 다행이다…
└ HOR 팬들은 이걸 알고도 팬 하는 거임?
-HOR에서 입장문 나옴?
└ 없음
└ HOR가 무슨 입장문을 냄;;ㅎㅎ 낼 필요가 없다는 거지 왜? 진짜라서ㅋ
-왜 또 범나비처럼 똑같이 까려고 그러냐?ㅋㅋㅋㅋ
└ ㄷㄷ 또 또 옹알이 팬들 범나비 데리고 오네
└ 그 팬들 특징이잖아
└ 나비는 착함;
-나비가 뭐가 착함ㅋㅋ 할머니 핑계로 학교도 제대로 안 다녀 이게 말이 되냐?
└ 말이 될 수도 있지ㅋㅋ?
└ 범나비 가난하다면서 핸드폰도 최신이고 패드도 최신임 ㅋㅋ
└ 가난하면 최신폰도 못씀?
└ 솔직히 맞잖아; 범나비 엄마 편의점 사장이라며 범나비 팬들만 ㅂㅅ이지
김올팬은 이런 비난 댓글이 제일 싫었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상한 글만 읽고 아는 척하는 댓글들 말이다.
-댓글 안 쓰려고 하다가 쓰는데; 범나비 중학교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집안 풍비박산 났음. 돈이 워낙 없었는지 병원에서 할머니 돌볼 간병인을 못 구함. 그래서 범나비가 직접 할머니 돌볼 수밖에 없다고 했음. 그거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고. 이게 왜 문제인지?
└ 엥? 아무 문제도 없는데
└ 그리고 범나비 어머니 편의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무슨. 날조하고 지랄.
└ [커뮤니티에서 삭제된 댓글입니다.]
김올팬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댓글을 확인했다. 정확히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1화에 나온 내용을 적은 댓글이었다.
-다들 싸우지 말고 AA 연습생들 커피차 후기나 보고 오삼
└ 또 해주고 싶다
└ 애들 ㄱㅇㅇ
└ 단체 사진 ㅅㅂ!!!!!!
그 뒤로 커피차 후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범나비를 향한 비난을 퍼붓는 어그로가 사라지긴 했다. 김올팬은 곧장 커피차 후기를 클릭했다.
“…사진은 잘 나왔네.”
그렇지만 김올팬은 여전히 범나비가 싫었다. 범나비를 제외한 AA 연습생들은 괜찮았다. 성격도 좋아 보였고. 괜히 범나비 하나 때문에 어그로가 끌리고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다른 연습생들이 가여울 뿐이었다.
“그래도 팬들이 좋아하긴 하겠지.”
워낙 범나비가 팬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많이 하긴 했다. 까와 빠가 미치도록 좋아할 것 같은 아이돌이었다.
-범나비 단체 싸인마다 ‘언제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어놓음… 이제 범나비 떠올리면 하트가 생각남…
└ 존나… 귀엽다ㅠ
왜 사람들이 범나비를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겉모습은 생양아치처럼 생겨놓고 유교맨처럼 굴고 있으니까.
-범나비 귀엽다는 팬들 역겹다. 소문도 더럽고 존나 나대고. 어떻게 범나비 팬이 될 수가 있지?ㅎㅎ
└ 어그로 지랄 노
└ 그래 HOR가 더 싫어ㅋㅋ
└ HOR 팬 ㅎㅇ
└ [커뮤니티에서 삭제된 댓글입니다.]
지금 이 순간 팬들이 범나비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다른 멤버들도 후려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ㅋㅋ 범나비랑 노는 AA 연습생들도 끼리끼리임
└ 응 어쩌라고
└ 범나비 끌어내리기 힘드니까 AA 연습생 잡고 늘어지네 ㅇㅋㅇㅋ
왜냐, 이렇게 나올 게 뻔했기 때문에.
***
돌연프 5화 선공개 영상 밑에 달린 커뮤니티 댓글창은 싸움터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 싸움에 일조하긴 했지만.
-왜 HOR 연습생들만 까여? 범나비도 별로잖아
└ 또 범나비;;
└ 그만해라 범나비 안쓰럽다
왜 HOR 연습생들과 관련된 댓글마다 내가 있는 거지? 주이든이 아니라?
“내 이미지가 안 좋기는 하지만.”
HOR 연습생과 엮다니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HOR 연습생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ㅠㅠ 범나비도 좋은 멤버 만나서 순위 올라가던데 우리 HOR도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 ㅋㅋ예
└ 또 왔다 ㅠ
└ HOR 진짜 팬이라면 가만히 있어줘… 제발…
커뮤니티를 분석해 본 결과, HOR 팬들이 주이든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HOR 연습생을 욕하는 거랑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나를 가지고 어그로를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더니 주이든한테 톡이 왔다.
(주이든) 보부상 복도로 나와라
(주이든) 상처에 바르는 약 하나 가져오고
생전 주이든이 먼저 개인 톡을 하는 일이 없었는데?
(주이든) 와라
(주이든) 내일 기사 하나 뜨기 전에
이렇게 협박하면 어쩔 수가 없네. 곧바로 약을 넣어 다니는 파우치에서 상처에 바르는 약을 꺼냈다.
(주이든) 안 옴?
(범나비) 가요
약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후드 모자로 얼굴을 가린 주이든이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약이요.”
“…아무도 없지?”
“그런데요?”
“그러면 나 따라와.”
“저요?”
“그러면 거울 없이 약을 혼자 발라?”
거울 있는 곳에서 혼자 바르면 되잖아요. 화장실에 가서 바르면 되는 문제를.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주이든의 뒤를 따랐다.
“여기 아무도 없네.”
주이든은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후드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주이든의 볼에 있는 작은 상처가 드러났다.
“그 상처는 뭐예요?”
“누구겠어? 그 개자식들이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지.”
“…아, HOR?”
주이든은 의자에 앉으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어디냐?”
“오른쪽 눈 밑에 있는데요.”
핸드폰 화면을 보며 혼자 상처를 치료하는 주이든을 보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혼자 바를 수 있으면서 나까지 부른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야, 너는 복수할 때 어떻게 해?”
복수할 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한다. 하지만 일단은 나에게 약점이 없어야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복수할 수 있는 법.
‘이걸 왜 묻지?’
주이든의 표정을 보아하니 급한 모양이었다.
“…형, 본론이 뭔데요.”
“본론부터 말할게. HOR 연습생들이 날 괴롭혔어……!”
“괴롭혔다고요?”
HOR 연습생들이 몸을 사리기는커녕 또 괴롭혔다고? 웃기네.
“내가 있는 단체 연습실에 카메라 없는 사각지대가 있거든. 내가 거기 있을 때마다 밀거나 치고 그래.”
춤 A팀이라서 단체 연습실 공간이 크다고 들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안 보는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괴롭히다니…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아무래도 혼자 있으니까 더 괴롭히는 것 같아. 내가 만만한가…….”
주이든은 만만해 보이지는 않아도 비교적 순한 얼굴에 속했다.
“만만한 얼굴은 아니죠.”
“그래? 그럼 다행인데…….”
원래 주이든은 강강약약인 사람이었다.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타입. 그런데 주이든이 나한테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HOR 연습생들이 괴롭히는 강도가 꽤 심한 모양이었다.
“…형, 간단해요.”
“뭐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게 뭔데?”
주이든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에서 괴롭히면 똑같이 해주면 돼요. 간단하죠?”
그러자 주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안 되면?”
“저한테 말하세요.”
“뭘 하려고?”
“제일 확실한 수단이 있거든요.”
HOR 연습생이 나를 팼던 그 동영상을 이서혁한테 넘기는 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