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파트 분배(2)
“정후 형, 나비가 사과하겠대~”
정요셉의 뒤를 따라서 단체 연습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박정후 근처로 다가갈수록 눈물을 닦는 척 연기했다.
“정후 형, 죄송해요…….”
“어, 어? 괜찮아.”
“제가 울어서 당황하셨죠?”
“당황하긴 했는데 왜 사과를 하는 거야? 안 해도 되는데…….”
“아니요. 사과는 해야죠. 죄송합니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자 박정후가 당황했다.
“네, 네가……?”
“네, 죄송해요.”
박정후 같은 타입에게 대들면 파트를 조금 받기는커녕 아예 파트를 못 받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사과하고 파트를 빼앗는 것이었다.
“정후 형, 우리 막내가 이렇게 죄송하다고 하니까 봐줘요.”
그리고 정요셉이 옆에서 거들어주는 방향으로 나갔다.
“내가 우리 막내 많이 타일렀어.”
“아, 그렇구나…….”
옆에서 정요셉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셉 형이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울면서 연습실을 나가면 형만 나쁜 사람 되는 거라고.”
“아, 아닌데, 그건…….”
아니긴. 박정후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정요셉이 치고 들어왔다.
“솔직히 사소한 파트 분쟁인데 우리 막내가 울면 정후 형만 나쁜 사람 되는 거잖아~?”
“저도 이 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고요. 저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정후 형을 나쁜 사람으로 몰 수 있겠어~”
이렇게 합이 잘 맞는 건 처음이다. 우리 둘의 발언에 박정후가 호두까기 인형처럼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양심에 찔리겠지.
“정후 형이 제 파트를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파트가 후렴에 한 번밖에 없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혼자 독식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건 맞지…….”
그리고 박정후를 치켜세우기.
“설마 그럴 생각이었어요?”
“어,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1절 파트만 조금 다르게 분배하면 될 것 같아.”
“역시 정후 형은 다르네요.”
“어……? 뭐가?”
내가 칭찬을 하자 박정후의 작은 눈이 커졌다. 저러다가 먼지가 들어가서 시력이 나빠지면 좋겠다.
“제가 그렇게 정후 형에게 상처를 줬는데 파트를 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요.”
“아…….”
“저였으면 아예 파트를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정후 형은 저한테 파트를 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가? 아니지.”
박정후의 볼이 씰룩거렸다.
“설마 정후 형이 질투를 하겠어요?”
“질투는 무슨. 그런 건 안 하지…….”
질투했다고 말한다면 재밌는 상황이 연출됐을 텐데 아쉽네.
“설마 정후 형, 질투했어요? 그렇다면 죄송해요.”
“아니, 아니! 내가 질투를 왜 해. 다들 같이 데뷔하고 계속 볼 사이인데.”
“그렇죠? 하긴 정후 형이 질투를 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다른 연습생들의 눈을 보면서 내 말에 동의를 구했다. 뜨끔한 연습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까 정후 형이 그랬어. 누군가의 파트가 많으면 나눠주고 그러자고.”
“맞아! 아마 1절 파트는 분배될 거야!”
“그렇지. 아까 정후가 그런 말을 하긴 했어. 자기 파트가 많아졌으니까, 필요한 파트가 있으면 파트를 나눠주겠다고.”
다들 자기 파트를 주기 싫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지. 박정후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은 금시초문인 모양이다. 그때…….
“저기…….”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안경 쓴 연습생이 손을 들었다. 누구지? 이름표로 시선을 내리자 ‘고예찬’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 파트를 범나비한테 주면 어떨까? 나도 파트가 많아서. 나눠주면 괜찮을 것 같거든.”
“파트가 많다고?”
곧바로 고예찬의 파트를 보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얘도 파트가 적은데 이걸 나한테 나눠준다고?
“나는 정후 형한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나도 이 파트는 다 못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남주가 고예찬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정후 형이 나비한테 파트를 준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도 나비만큼 파트가 적어서 좀 걱정되네.”
“…아, 어!”
자신의 편인 줄 알았던 이남주의 말에 박정후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남, 남주야……?”
“정후 형의 1절 파트에서 어느 정도 나눠주면 멤버들 파트가 비슷비슷해질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아… 그건 맞지.”
이남주도 내가 짠 판에 들어왔다. 이제 누가 박정후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파트 분배로 시간이 질질 끌리자 슬슬 연습생들의 불만이 나왔다.
“정후야, 빨리 파트 나누고 끝내자. 시간도 없는데.”
“그러게. 정후 형! 빨리 나비한테 파트 나눠주자.”
어떤 연습생도 박정후의 편을 들지 않았다. 박정후의 아랫입술이 떨리면서 박정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주먹을 풀었다.
“그래… 나비야, 나랑 같이 1절 파트 분배하자. 다른 멤버들은 그동안 안무를 외워도 좋고.”
“리더, 나도 옆에서 구경해도 돼~?”
“요셉이도?”
“우리 막내가 또 울면 큰일이니까.”
그러면서 정요셉이 나한테 윙크했다.
“…제가 또 울겠어요?”
누구를 울리면 몰라도. 또 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우리 막내가 눈물이 없긴 하지?”
“제가 좀 그런 편이죠.”
“그런 사람을 울리는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이겠지~?”
정요셉이 말의 끝부분을 늘렸다. 게임 닉네임을 짓는 것처럼 신중한 태도였다.
“…그러면 나비야, 파트 분배할까?”
이렇게 정요셉이 나를 말끔하게 도와줘서 파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나는 정요셉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고마워요.”
이럴 땐 같은 멤버가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다.
***
박정후와 상의한 끝에 1절 후렴 부분을 가져왔다.
“정후 형, 파트 잘 받을게요.”
“네 마음에 들었다니까 다행이네.”
마음 같아서는 박정후의 고음 파트를 가져오고 싶었으나 파트가 많다고 메리트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박정후가 가진 파트는 대부분이 고음이라서 내 목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내가 고음 셔틀도 아니고.
“저… 나비야?”
“…어?”
“안녕……!”
…고예찬?
“난 개인 팀 고예찬이라고 해.”
이번에 소속사 없이 돌연프에 들어온 개인 팀 멤버라는 사실은 알겠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
연습생 신분으로 친한 관계는 별로 없었다. 남한테 관심도 없고. 아까 나를 도와주긴 했었지. 자기 파트를 나눠주겠다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아니야!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서!”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왜 이렇게 나한테 호의적인 태도지.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HI 엔터에서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거든.”
HI 엔터에서? 흐려진 기억 속에서 고예찬을 기억하기는 힘들었다.
“미안해. 그래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 이 뿔테 안경도 기억이 안 나?”
그러고 보니 저 검은색 뿔테 안경을 계속 보니까 기억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보컬 선생님한테 혼나서 계단에서 울던……?”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한껏 밝아진 모습으로 고예찬이 기쁜 듯이 활짝 미소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날 기억 못 할 줄 알았거든.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오래된 기억이긴 해.”
거의 4년 전이니까. 고예찬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이후로 계속 연습생으로 지내고 있어.”
“잘됐네. 이렇게 만났으니까.”
“혹시 네가 했던 말 기억해?”
내가 했던 말?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더라?”
“그렇게 울고 있을 시간에 노래 연습했으면 좋겠다고.”
오, 꽤 세게 말했네. 그 당시는 연습생들이 힘들다고 소속사를 우르르 나갔던 시기였다. 하도 연습생들이 나가니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걔가 얘라니.’
그 당시, 한 연습생이 계단에 홀로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연습하러 올라가긴 해야 하는데 그대로 지나치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다.
“왜 울어?”
“…혼났어.”
“왜 혼났는데?”
“노래를 못 부른다고…….”
“그렇게 울고 있을 시간에 노래를 더 연습하는 건 어때?”
나도 모르게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이 먼저 나갔었다.
“미안. 그땐 내가…….”
“어, 어?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 말에 의욕이 생겨서 실력을 갈고닦았거든.”
“그렇다면 다행인데…….”
다르게 생각하면 내 말은 너무나도 직설적이었다. 어쩌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다.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 그 말이 내게는 위로가 됐거든.”
“다행이네…….”
“응! 그 이후로 보컬 트레이닝 열심히 하다가 다른 엔터로 옮겼어…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못 하고 나와서 아쉬웠는데…….”
저 말이 고예찬에게 촉진제 역할을 해줘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천하의 나쁜 놈이 되지 않았을까.
“언젠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널 만날 일이 없었거든.”
“하긴 만날 일이 없긴 했지.”
“그러니까! 그런데 때마침 이렇게 팀별로 안 해서…….”
고예찬이 살짝 톤을 낮추며 말을 이어갔다.
“…쟤들이 널 싫어해서 눈치 좀 보고 있었어.”
“미안. 눈치 보게 했네.”
“절대, 절대! 아니야!”
“강하게 부정하면 맞는 말이라고 하던데.”
“…농담이지?”
강하게 손을 휘저으며 내 말에 부정하는 고예찬을 보면서 나는 코웃음을 쳤다.
“농담 아니야.”
“…어?”
이렇게 놀리기 쉬운 사람은 또 처음이네.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예찬은 놀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넌 파트가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이 정도도 감지덕지라 생각하거든.”
감지덕지라…….
“다 높은 파트네.”
“그렇지? 내가 고음도 자신이 있다고 해서 그런가…….”
고예찬의 목소리는 베이스를 치는 것처럼 톤이 낮았다. 그런데 왜 높은 고음만 준 거지?
“…근데 키가 또 엄청 높지는 않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때 몰래 엿듣고 있었는지 이남주가 끼어들었다.
“안녕?”
“어, 안녕하세요, 남주 형…….”
“원래 나비랑 친했어?”
이남주의 질문에 고예찬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친해졌어요, 남주 형.”
“…어? 그래? 나비는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둘이 친해요?”
이남주는 기어코 내 앞에 앉아 고예찬의 파트를 훑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었다. 설마 시스템한테 다시 문제라도 받은 건가 싶을 정도로.
“같은 기숙사잖아.”
“아, 그러면 친하게 지내겠다.”
고예찬은 부럽다는 듯이 이남주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 미션 무대 보니까 목소리가 굉장히 낮던데, 노래 부를 수 있겠어?”
“…아, 연습해야죠.”
고예찬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하필 안경 그림자가 져서 더 불쌍하게 보였다.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내 한마디에 희망이 깃든 얼굴로 고예찬은 연습하러 가보겠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얼굴을 굳히며 이남주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요?”
“…아,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고예찬을 몰아냈대?
“혹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요?”
“없는데요.”
“…저는요?”
이남주? 이남주는 친한 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잖아요.”
“협력관계는 맞지만. 그 전에 친구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
“친구는 무슨. 동네 친구도 안 돼요.”
친구가 그렇게 필요하나. 굳이?
“동네 친구도 안 된다?”
“왜요?”
부질없는 대화는 끝내고 각자 연습했으면 좋겠는데. 이남주는 침음을 흘리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왜 저래? 이남주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표정을 보려고 했으나 이남주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더니 이남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을 열었다.
“이제 하늘이시여 곡 컨셉을 정해볼까요?”
설마 삐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