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화목현의 트라우마
보컬 A팀 멤버들과 번호를 교환하고 하루간의 휴가를 얻어 본가로 내려왔다.
“…엄마, 이건 반찬이 좀 많은데?”
“먹어.”
“나 배 터져서 죽으면?”
“사람은 배가 안 터져.”
“찢어질 수도…….”
미리 엄마한테 본가에 가겠다고 했더니 각종 반찬과 갈비찜을 해놓으셨다. 반찬은 심각하게 많았다. 대충 삼각김밥에 라면을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엄마 반찬 만들기 힘들잖아.”
“아니야. 힘들긴.”
“다음엔 내가 알아서 먹을게.”
나는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단톡방을 확인했다. 단톡방에는 제작진이 준 봉투에 있던 노래 리스트가 올라와 있었다.
(박정후) 노래 제목은 다 똑같은 것 같아
(정요셉) 호오~ 그러네~
(이남주) 정후 형, 노래 리스트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박정후) 뭘~
(범나비) 감사합니다
(박정후) ㅋㅋ 그래
톡에 올라온 사진을 누르고 노래를 확인했다.
《보컬 A팀》
1. 90년대 남성 듀오 - 하늘이시여
2. 드림 히어로 – 하늘이시여
3. 여자 아이돌 – 하늘이시여
흠, 노래는 괜찮다.
‘이 중에서 고를 때 까다롭긴 하겠네…….’
다들 보컬 포지션으로 들어왔으니 자신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노래를 고르려고 할 것이다.
솔직히 유닛 멤버들이 어떤 노래를 골라도 내 목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골라봤자 박정후가 태클을 걸 것 같기도 했고.
‘뭘로 정해지든 신경 쓰지 말자.’
숟가락에 하얀 쌀밥을 둥글게 얹어 갈비를 올린 뒤, 어떤 노래로 정해질지 생각할 때였다. 화목현한테 전화가 왔다.
“…목현 형?”
이 시간에 갑자기? 설마 또 무슨 일이 터졌나.
“형?”
“…어어, 나비야.”
“네, 형.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그게… 오늘 네 집에서 신세를 져도 될까?”
“오세요.”
“그럼 밑으로 내려와 줄래?”
밑에 다 와서야 전화를 했네.
“엄마, 잠시 밑에 갔다 올게요.”
“어, 어디 도망가지 말고!”
국그릇에 미역국을 뜨는 엄마를 뒤로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형!”
내가 손을 흔들자 화목현이 달려왔다.
“미안해. 오늘 신세 좀 지자.”
“신세는 져도 되는데. 형, 무슨 일 있어요?”
화목현의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었다. 막 도망친 사람처럼. 얼굴도 핼쑥하고.
“아, 사정이 있긴 해. 가출했거든.”
“…네?”
화목현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가출할 정도면 큰 문제인가?
“오랜만에 얻은 휴가인데 민폐를 끼쳐서 미안해, 나비야.”
민폐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폐는 무슨. 형이 와서 오히려 다행이에요. 오늘 엄마가 반찬을 많이 해서 누가 있어야 했거든요.”
“어? 반찬……?”
“그러니까 밥부터 먹읍시다. 배고프죠?”
“배는 고프지.”
나는 화목현의 등을 밀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어머님 있어?”
“네, 있는데요.”
“…어, 다시 내려갈까?”
“다시 올라가죠?”
무슨 실랑이를 이렇게 해. 나는 강제로 화목현의 손목을 잡고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엄마가 화목현을 보고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 목현이잖아!”
“어머님, 안녕하세요.”
“어머님이라니, 너무 딱딱하다. 어머니라고 해줄래?”
…나보다 더 반기는 것 같은데? 그렇게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잖아?’
왜 그런 시선을 느꼈지?
“나비야, 왜 안 들어와?”
“…들어가요.”
…뒤가 구린데. 나는 현관문을 확실히 닫았다.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와! 어머님, 반찬이 많네요?”
“오늘 나비가 집에 온다고 반찬을 많이 했거든. 근데 나비가 나한테 잔소리를 했다니까?”
“잔소리를요?”
“그래! 반찬이 많다고. 아들이 저래도 돼?”
엄마, 아들 욕을 바로 옆에서 하면 어떡해요. 나는 왼쪽 손으로 귀를 닫으며 밥을 먹는 데 열중했다.
“어머님, 밥 맛있게 먹을게요!”
“많이 먹고 가.”
그런데 우리 엄마의 반찬,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어, 형. 반찬…….”
늦었다. 이미 화목현의 입에 콩나물무침이 들어갔다. 이내 화목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콩나물무침은 소금 덩어리일 것이다.
“목현아, 맛있어?”
“켁……! 맛…있어요!”
“그렇지? 우리 아들은 내가 반찬을 만들면 잘 못 먹어. 이상하지?”
“진짜 이상하네요. 이렇게 맛있는데…….”
맛있긴.
“맛있죠, 형?”
“어, 어…….”
나는 꿋꿋하게 미역국과 갈비 위주로 먹었고, 화목현은 엄마한테 걸려서 반찬 위주로 먹었다.
“목현아, 밥 맛있게 먹고 쉬렴~ 이제 나는 일하러 가야 하거든? 나비가 괴롭히면 말하고!”
“네……!”
엄마는 편의점 조끼를 챙기며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그제야 나는 화목현을 보며 말했다.
“형, 반찬 안 먹어도 돼요.”
“…어? 나비야, 반찬… 맛… 맛있어.”
“얼굴 안색이 별론데요…….”
“그래?”
“우리 엄마가 반찬 간을 못 해요.”
그냥 먹으면 소금 맛밖에 나지 않았으니까.
“이런 반찬도 소중해.”
“그래요? 그럼 마음껏…….”
“부모님이 해주는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거든.”
화목현의 파격적인 발언에 목에 밥알이 걸렸다.
“미안. 궁금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한 건데 놀랐니?”
“…아, 아니요.”
빠르게 물을 마시고 밥알을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놀라지 않은 척을 하자 화목현이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저는 놀란 적 없어요.”
“놀라도 상관은 없는데.”
그러자 시스템창이 반짝이며 눈앞에 떠올랐다.
【화목현의 ‘트라우마’를 얻었습니다.】
【※‘가족’】
화목현의 트라우마가 생성되었다. 트라우마가 가족이라고?
“어릴 때부터 가정 폭력에 시달렸어. 도망친 어머니랑 닮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나를 때렸거든. 하지만 어렸던 나한테는 도망갈 곳도 없었어. 친척들이랑도 연락을 다 끊은 상태였거든.”
화목현의 시선이 밥그릇에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연습생 제의를 받고 아버지랑 연락을 끊었어.”
“…연락을요?”
“응, 팀장님이 근처에 있는 원룸을 알아봐 주셔서 거기서 살고 있었거든. 그런데 돌연프를 시작하고 내가 TV에 나오니까 계속 전화가 오더라.”
“왜요?”
“이유는 간단하지. 돈이 없으니까 달라는 거였어. 방송에 나오면 돈을 벌지 않느냐고.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더니 뭐라더라?”
“…….”
“아버지를 버린 이야기를 세상에 풀겠대. 아무래도 너희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오늘 시간이 난 김에 아버지를 만났거든. 근데…….”
화목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하니까 죽인다고 하더라. 그래서 도망쳤어.”
“…….”
“도망은 쳤는데… 갈 곳이 없었거든. 마땅히 찾을 공간도 없고.”
이제야 이번 랜덤 박스에서 방어 기술의 책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나 화목현의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었으니까.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나……?’
내가 보기에는 화목현에 대한 신변 보호가 필요했다. 자식을 패는 게 옳은 일인 줄 아나?
“목현 형, 갈 곳 없으면 이제부터 휴가 나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 쉬세요. 아니다, 아예 같이 올래요?”
“그건…….”
“괜찮아요. 저도 엄마랑 저, 이렇게 둘뿐이에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식구가 늘었다고 나쁘지도 않아요. 그리고…….”
“응?”
“우리 엄마 반찬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나도 목적이 있는 것처럼 굴어야 화목현이 편안하게 생각할 테니까. 내 말에 화목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비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뭘요. 제가 더 고맙죠.”
화목현은 끝까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엄마가 해준 반찬을 먹었다.
‘저러다가 위장 다 버리는 거 아니겠지…….’
그리고 나는 차가운 물을 삼키며 계획을 세웠다. 방금 전 집에 들어올 때 뒤에서 느껴졌던 시선이 뭔가 신경 쓰였기 때문에.
‘인벤토리 확인.’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방어 기술의 책을 누르자,
【※방어 기술의 책을 읽으면 기술이 몸에 흡수됩니다.】
경고 문구가 떴다. 방어 기술의 책을 한 장씩 넘기는데 책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고,
【1. 112에 전화한다.
2. 주변에 있는 어른에게 전화한다.
3. 아가리로 조져 버린다.】
이런 내용뿐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어의 기술은…….
‘3번, 아가리로 조져야겠는데.’
입으로 이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제 좀 쉴까요?”
“그래, 설거지는 내가 할게.”
“같이 해요.”
화목현과 설거지를 하면서 슬쩍 물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나랑 성격이 정반대야.”
“아, 그래요?”
화목현과 다르다면 화가 많고 차분하지 않은 사람이겠네.
“아, 형. 제가 설거지를 할게요.”
“내가 할게. 얻어먹었잖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자 슬슬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슬슬 원룸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계단 쪽에서 자꾸 발소리가 나는 거지? 이 건물은 2층밖에 없어서 나랑 엄마만 사는데.
“형, 무슨 소리 안 들려요?”
“소리?”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봤더니 아직 엄마가 올라올 시간은 아니었다. 지금은 편의점에 손님이 많을 테니.
“어머님 온 거 아니야?”
“그렇다기엔…….”
영 꺼림칙해.
“형은 여기에 있어요. 제가 보러 갈게요.”
현관문의 작은 구멍으로 밖을 살폈다. 그 순간 갑자기 훅 다가온 중년 남자의 눈알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여기로 들어갔는데?”
이어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구멍을 확인하자 중년 남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형, 잠시만요. 보실래요?”
화목현이 현관문의 구멍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우리 아버지인데…….”
…그렇다면 아까 전 그 찝찝한 시선의 정체가 화목현의 아버지가 맞았다는 거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뒤로 돌렸다.
“목현 형.”
나는 검지를 입에 댔다. 그대로 화목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화목현의 아버지가 여기로 온 목적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현관문 안전장치를 해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여기 화목현 있어?”
“없는데요. 왜 목현 형을 찾으시죠?”
“없으면 이거 좀 풀지?”
“싫은데요.”
화목현의 아버지가 안전장치를 잡으며 부술 것처럼 흔들었다. 정정하시네.
“난 너 알아! 내 아들이랑 같은 그룹이지?”
“예, 그런데요.”
“넌 어른 공경도 몰라?”
“모르는데요.”
“넌 아버지도 없어?”
“없는데요?”
“없, 없으니까 이러는 거야?”
내가 말을 안 듣자 화목현의 아버지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고 그러시는 건가. 그 손을 나는 가볍게 피했다.
“목현 형을 만나서 어쩌려고 그러시는데요?”
“…뭐, 뭐긴! 그냥 대화를 하려고.”
나는 화목현의 아버지를 향해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술을 마시고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세요?”
“그래, 돼!”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112가 적힌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 보이시죠?”
“경찰에 신고한다고? 그냥 목현이가 있는지 없는지 보러 온 거라니까.”
“지금 무단침입죄로 신고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아시죠?”
“아니… 아, 없으면 없다고 하지.”
그래도 경찰은 무섭다? 아들은 무섭지 않고?
“안 가시면 지금 전화합니다.”
“…아, 알았다고! 가면 되잖아, 가면!”
화목현의 아버지는 현관문을 발로 차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화목현의 아버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현관문을 닫았다.
‘또 올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은 끝났으니까. 뒤를 돌아보자 화목현이 미안하다는 듯이 서 있었다.
“나비야, 계속 미안한 일이 생기네.”
“형은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 이런 건 익숙해서.”
괜찮다고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지 않은 모양이네. 나는 화목현의 옆자리에 앉아서 TV를 켰다.
“형도 이거 볼래요?”
“어?”
“휴가 나오면 이 영화 보고 싶었어요.”
“…어, 그래. 보자.”
얼떨결에 나랑 같이 영화를 보게 된 화목현은 눈을 크게 뜬 채 TV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인상을 쓰던 화목현의 얼굴이 웃음으로 번졌다.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식히면 좋을 것이다. 화목현은 혼자 생각하는 타입이라 내가 다독일수록 독이 될 수도 있었다.
“형, 팝콘 먹을래요?”
“팝콘? 좋지.”
역시 영화에는 캐러멜 팝콘.
“형은 캐러멜 팝콘 좋아해요?”
“아니? 팝콘은 역시 오리지널이지.”
팝콘으로 화목현의 주의를 돌리고 나서 나는 다짐했다. 이 소식은 팀장님한테 말해야겠다고. 저런 부모는 언젠간 사고를 칠 가능성이 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