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중간 순위 발표(1)
“원래 피곤하면 코피가 자주 나요.”
“아무리 그래도 코피는 조금 심각한 것 같은데.”
“흔한 일이에요. 몸이 아픈 건 아니에요.”
어떻게든 변명했으나 정요셉은 정색했다.
“우리 막내, 요새 무리하는 것 같더니~?”
“무리 안 했어요.”
“변명하지 말자? 응?”
“네…….”
변명이 아니라 페널티일 뿐인데. 억울하다. 그러나 이도 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요셉은 내 얼굴을 요리조리 훑으면서 물었다.
“우리 막내, 원래 몸이 좀 허약했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러면 왜 코피가 난 걸까~?”
어떤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정요셉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잠을 안 자서 그런 것 같아요.”
“방송이 몰아쳐서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어. 그래도 내일 기숙사에 가면 하루 동안 휴가를 준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다음 세 번째 무대를 준비해야…….”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정요셉이 정색을 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코피만 흘렸지 몸은 괜찮은 상황이라.
“뒤늦게 합류를 했으니까… 더 잘해야죠.”
“어~? 막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제가 열심히 안 하면 형들도 욕먹을 테니까요.”
내가 무대를 못하면 멤버들이 욕을 먹을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멤버들과의 관계 궁예를 하고,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렉카에 떠돌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해야만 했다. 멤버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흐음, 우리 막내가 생각이 많네~”
“원래 생각이 많기도 하지만 요즘은 더 잘하고 싶거든요.”
“누구한테?”
“형들이요.”
다시 한번 잡게 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번에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정요셉이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요즘 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네~?”
“형들이잖아요?”
“처음엔 형들이라고 안 했잖아?”
형들이라고 안 했던가……? 언제부턴가 형이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아, 거리감을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거리감은 무슨.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뭐, 멤버들은 아닐 수도 있지만?”
“아, 그렇죠.”
하긴 정요셉은 날 보자마자 친근하게 굴었지. 정요셉이랑 지내다 보니 정요셉은 친한 척을 했던 게 아니라, 날 도와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삐딱하게 생각했고.
싱거운 내 대답에 정요셉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우리 막내, 상처받았어? 멤버들은 아닐 수도 있다고 해서?”
“…전혀.”
상처는 무슨. 상처받기는커녕 슬픈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 소문이 있었잖아. 우리 막내가 실력도 없고, 돈만 많은 갑부라고?”
“…아, 그 헛소문.”
“그런 소문 때문에 멤버들한테 오해가 있었다는 거지~”
“어떻게 오해가 풀린 거예요?”
정요셉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간단해. 우리 막내가 매사 열심히 하길래?”
“열심히…….”
“그래, 열심히. 돌연프에 출연한다고 DISS 안무 외우느라 숙소에도 오지 않았잖아. 거의 연습실에서 살았지.”
숙소는 어쩔 수 없었다. 며칠 만에 안무와 노래를 외우려면 1분도 아껴야 했으니까. 그래서 연습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팀장님이 숙소에 가라는 말을 해도 연습실에 죽치고 앉아서 안무를 외우고, 또 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습뿐이었기에.
“…그래서 애들이 널 신뢰하고 있는 거야.”
“신뢰라…….”
정요셉의 입에서 ‘신뢰’라는 말이 나올 줄은. 조금 감동적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의 신뢰를 받는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저, 잘할게요.”
“…응?”
“형들한테.”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성의를 다해 보답해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이 더더욱 깊어진다. 내 말에 정요셉이 당황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요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든든한 막내가 들어와서 우리도 좋네.”
“저도요.”
“그러니까 너도 우리를 믿어. 혼자 열심히 한다고 좋은 무대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까지는 무엇보다 혼자서라도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야 아이돌 생활을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정요셉의 말에 입꼬리에 미소가 걸쳐졌다.
“이제 자러 갈까?”
“네, 그러죠.”
슬슬 눈이 감겼다. 정요셉이 일어나는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는 그 순간, 왈칵 코피가 쏟아졌다.
“일단 코피부터 닦자?”
“…아.”
몸은 아프지 않으니까 괜찮은…….
“내가 안 괜찮거든~?”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정요셉이 끼어들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말했어, 얼굴로.”
…그랬나? 나중에 정말 연기 수업이라도 받아야 하나.
***
다음 날이 되자 화목현이 찾아왔다.
“나비야, 어제 코피 났다며?”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게 중요해? 요셉이한테 들었어.”
분명 멤버들한테는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벌써 말을 했다고? 정요셉한테 배신감을 느꼈다. 화목현은 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열이 있나 체크했다.
“나비야, 다른 곳은 안 아프고?”
“안 아파요. 저 멀쩡해요.”
“아프면 꼭 형한테 말해. 또 숨기려고 하지 말고.”
“숨긴 건 아닌데…….”
진짜로 아팠으면 말했을 것이다. 내 변명에 화목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영양제는 먹어?”
“영양제요?”
“얼마나 몸이 허약하면 코피를 흘려.”
“아니, 그건…….”
말하면 말할수록 화목현의 귀에는 변명처럼 들리는지 화목현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주이든이 나타났다.
“코피가 나네!”
“코피요?”
“아! 나도 어제 코피를 흘렸거든!”
그 말을 하는 주이든은 실실 웃고 있었다. 이건 순전히 거짓말이다.
“봐, 이든이는 숨기지 않고 말해주잖아.”
젠장. 이미 화목현에게 나는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주이든까지 내가 코피 흘렸다는 사실을 아는 걸 보면 역시 정요셉이 모두에게 말한 모양이다.
“그게…….”
내가 한숨을 내쉬자 화목현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내일 방송에서도 코피 흘리면 안 되는데… 나비야, 병원이라도 갈래?”
“아니요…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아 보이니까 넘어가는데… 또 그러면 병원 갈 거야. 알았어?”
“네…….”
그건 좀…….
“그래, 약속.”
“…약속.”
나는 그렇게 어리지도 않은데. 화목현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받아냈다.
***
세 번째 무대 전, 중간 순위 발표 순서가 다가왔다. 오늘은 탈락 팀이 선정되는 날이기도 했다. 차라리 세 번째 무대를 하고 중간 순위 발표를 하지.
‘논란이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폐교에서 이미 카테고리를 고른 팀이 탈락할 수도 있었다. 설마… HOR 엔터를 탈락시키려고……?
“모두들 자기 이름이 적힌 의자에 앉아주세요~”
스태프의 말에 주변에 있는 의자를 둘러보았다. 49위라고 적힌 의자에 내 이름이 있었다. 아마 내 개인 순위인 모양이었다.
화목현은 뒤를 돌아보며 멤버들의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얘들아, 탈락해도 웃으면서 가자.”
“그런 말은 무섭다고~!”
“그래도 각오는 해둬야지.”
모든 연습생이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하얀 조명이 무대를 비추자 MC가 등장했다.
“연습생 여러분, 폐교는 잘 다녀오셨나요?”
연습생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손뼉을 쳤다.
“아니요!”
“무서웠어요!”
연습생들이 앓는 소리를 내자 MC가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폐교가 무섭긴 하죠? 저도 잠깐 다녀왔는데, 진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더라고요…….”
MC가 진절머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폐교보다 더 무서운 날이 찾아왔죠? 오늘은 팀과 개인 중간 순위 집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총 4팀이 탈락하는 날이기도 하고요.”
탈락이라…….
“아쉽지만 오늘 탈락한 팀들도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겠죠?”
확실한 미래를 알고 있지만, 가슴에 뭔가가 꽉 찬 것처럼 답답했다.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니까. 내 앞에 앉은 주이든도 떨리기는 매한가지인지 다리를 떨었다.
“이든 형, 떨려요?”
“떨리긴… 내가 떠는 거 봤어?”
지금 몸이 떨리고 있는데요. 주이든은 단호하게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안 떨어. 절벽에 서 있어도 무섭지 않고. 뭐, 참고로 내가 자주 타는 놀이 기구는 관람차지.”
“아, 관람차…….”
“굉장히 무서운 놀이 기구지. 그거, 바람이 불면 막 흔들리고 그래!”
…주이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귀신은 안 무섭다고 하더니 여전히 다른 종류의 공포는 있는 것 같았다.
“지난 2화 방송에서 잠깐 순위를 알려 드렸죠? 이번에는 순위에 많은 변동이 있네요.”
그게 나한테 해당되는 말이면 좋을 것 같았다. 돌연프 어그로꾼이라는 이미지 탓인지 나의 개인 순위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2화 방송이 공개되고 나서는 내 이미지가 바뀌었다.
친절하게도 돌연프가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면서, 커뮤니티에서 내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수많은 악플들이 줄어들었고.
그리고 지속적인 악플 때문에 나를 안쓰럽게 생각했던 시청자들이 투표를 해주기도 했다.
-범나비 불쌍해서 투표함
└ 22
-악플 사라지는 거 실화냐……? 유독 몇 명이 범나비 악플 달았다는 거잖아… 소름 돋아…
└ 그냥 나비를 낙하산으로 본 듯 ㅋㅋ
└ 제발 현생을 삽시다…
- 진심; 너무 욕하더라 어그로 티 났는데;
이런 반응이 대다수였다.
“우선 2화 방송에서 공개했던 순위를 다시 보여 드리겠습니다.”
모니터 화면에 개인 순위가 떴다. 그리고 무리는 환호하는 연습생들과 우울하게 한숨 쉬는 연습생들로 나뉘었다.
물론 나는 우울하게 한숨 쉬는 쪽이었고.
“자, 여러분… 여기서 순위가 변동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이제 총 11팀 중, 4팀이 탈락하게 되는데요. 우선 개인 순위부터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30위에서 39위 연습생입니다.”
30위에서 40위.
“여기까지입니다.”
일단 나는 없었다. 그나마 순위가 올라간 연습생들은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20위에서 29위 연습생입니다.”
설마 20위를 한 번에 올라갈 리가…….
“29위, 범나비 연습생.”
있었다.
“…나비야, 축하해!”
곧바로 화목현이 뛰어와 나를 축하해 줬다. 어리둥절한 채로 나는 주이든과 이정진의 축하를 받았다.
“축하해요.”
가는 도중에 이남주한테도 축하 인사를 받았고. 정신이 없어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어리둥절한 나머지 나는 스태프한테 마이크를 받지도 않고 무대 위로 올라가 버렸다.
“범나비 연습생, 마이크!”
“아아… 죄송합니다.”
마이크를 안 가져온 탓에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뇌가 멈춰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어…….”
무슨 말을 꺼내야…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새하얘졌다.
“범나비 연습생? 할 말을 잃은 것 같은데요?”
“…네? 네.”
“농담이었는데… 진담이었어요?”
“네, 저는 진담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시간을 질질 끌자 PD는 시간이 없다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합니다.”
그 말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고작 29위에 올랐다고 얼어붙다니.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저를 좋게 봐주셔서…….”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