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주이든의 트라우마(3)
I.P는 AA 연습생과 HOR 연습생 간의 신경전이 있다는 말을 제작진에게 전해 들은 상태였다. 예상대로 신경전은 팽팽했다.
“AA 연습생, 시작하겠습니다.”
AA 연습생들은 각자 마이크를 들고 뮤지컬처럼 무대를 구성했다. 느린 바이올린 연주로 시작되는 인트로를 AA 연습생들은 빠른 피아노 연주로 바꿨다.
매번 비슷비슷한 무대 구성을 보았던 I.P는 흥미가 돋았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붙였던 상체를 앞으로 내민 채 AA 연습생들의 무대를 관찰했다.
“잘하는데요?”
“그러게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잘했다. 특히 탁월한 편곡 부분과 보컬이 좋았다. 첫 화 무대보다 더 잘해서 귀가 열렸다.
-텅 빈 잔이 나인 것처럼
네가 잔을 따라주길
그런데 무대 뒤로 돌아가는 부분에서 범나비가 허리를 움직이는 순간, 범나비가 바닥에 미끄러졌다. 바로 자연스럽게 무대에 합류하긴 했으나 범나비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I.P는 범나비의 실수를 묻지 않으려고 했다.
“편곡은 누가 했어요?”
이정진이 손을 들었다.
“제가 했습니다.”
“어, 프로필을 보니까 작곡, 작사를 배웠네요? 언제부터?”
“17살부터 프로듀싱을 배웠습니다.”
“누구한테 배웠나요?”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독학으로 배웠다는 부분에서 I.P는 눈이 커졌다.
“…오, 독학했다고요?”
“네.”
마찬가지로 독학으로 작곡을 배운 I.P였다. 동지를 만났다는 생각에 I.P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컨셉이 겹치긴 하지만 HOR 연습생들 무대랑은 달라서 신선했어요.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초반 피아노 인트로는 빠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무대를 구성해도 좋겠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그리고 I.P는 마지막으로 범나비에게 눈길을 돌렸다.
“범나비 연습생?”
“네…….”
“어디 아파요?”
“아프지 않습니다.”
범나비의 거짓말에 I.P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몸이 아픈데 말을 안 한다. 이마에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는데.
“체력 관리는 본인 스스로 해야 하는 거니 아프면 무대를 쉬세요. 무작정 무대에 오르면 멤버들에게 피해가 가잖아요.”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멤버들한테 미안해해야지.”
모든 조언이 끝나고 카메라가 꺼졌다. I.P는 연습생들한테 인사를 하고는 범나비에게 다가갔다.
“범나비 연습생, 옆구리가 아프죠?”
“…아니요.”
“아니라고 해봤자, 아픈 거 다 보여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I.P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저러다가 뒤늦게 아프면 무대에 오를 수도 없는데.
“아직 범나비 연습생이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나도 아프지 않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병이 깊어져서 한동안 쉰 적이 있어요.”
“…아.”
“그래서 범나비 연습생이 몸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오래가야죠?”
이 정도면 설득이 된 줄 알았는데 설득은 무슨. 범나비의 눈빛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조언 감사합니다.”
“…이런. 병원에 안 가겠다는 거예요?”
“이 정도 상처는 괜찮습니다.”
씩씩하게 답하는 범나비를 보고 I.P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신,
“기대할게요.”
기대한다는 말을 남기고 연습실을 떠났다.
***
I.P 선배님이 떠난 후, HOR 연습생들의 괴롭힘은 날로 심해졌다. 일부러 바닥에 생수를 쏟아 춤을 못 추게 만든다거나, 일부러 우리 노래를 끄기도 했다.
“진짜로 죽일까~?”
“요셉아, 참아.”
“형, 우리 욕도 하잖아~!”
“그래도 참아. 사람 죽이면 감옥 들어가.”
정요셉이 나서려고 했지만 화목현이 막았다. 어차피 이번 미션만 끝나면 안 볼 사이니까. 그런데 괴롭히는 방법을 바꾸기로 한 모양인지 이젠 대놓고 욕설을 뱉었다.
“우리 따라 하는 거 쪽팔린 줄 알아야지. 느와르 컨셉 하더니.”
“원래 따라쟁이잖아.”
“등신 새끼들.”
원래 시각적인 폭력보다 청각적인 폭력이 기억에 더 남기 마련인데. 우리가 무시할수록 욕설의 수위가 심해졌다.
“주이든 진짜 찐따 같다.”
“원래 찐따잖아.”
확실히 선도 넘었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아, 왔네.
(알수없음) 나와
나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형들, 저 화장실 갔다 올게요.”
“그래, 조심하고. 누가 따라오면 연락하고~!”
“네, 조심할게요.”
HOR 연습생들을 훑으면서 연습실을 나왔다. 그리고 연습실과 거리가 벌어졌을 때 답장을 했다.
(범나비) 저 나가요
(알수없음) 어
사건사고, 이서혁이었다.
(알수없음) 뒷문으로
(범나비) 네
뒷문으로 오라는 이서혁의 톡에 건물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유롭게 뒷문에 도착하자 이서혁이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범아, 왜 이렇게 늦게 와?”
“저는 백수가 아니라서요.”
“나는 백수라는 거냐?”
“이미 연습생 신분이 아니긴 하잖아요.”
“야, 나도 바빠.”
…정말 바쁘시겠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이유가 있으니까 불렀죠.”
“어, 너는 그럴 것 같아.”
내가 그랬나… 짧게 자기반성을 한 뒤 이서혁에게 HOR 연습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서혁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영상은 뭐야?”
“이 영상, 이용 가치가 있어요?”
“무조건 있지, 협박용으로. 그런데 이걸 왜 보여줄까.”
막상 내가 정확히 대답을 못 하자 이서혁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걔들이 괴롭혀?”
“예.”
“그래서 이 영상을 나에게 보여줬구나.”
영상을 이용하는 것은 주이든의 꼬리표를 떼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이서혁은 이미 HOR 엔터 고소를 진행하고 있었고, 대중의 평판도 좋았다.
“그것도 있고. 주이든을 방패로 쓰지 말라는 뜻으로 드리는 건데요.”
“어째 협박처럼 들린다?”
“협박이 아니라 드리는 거예요, 선물로.”
이서혁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날 때렸다는 증거가 아니라서 별 소용은 없을 것 같은데.”
“협박 영상으로는 가능할 거예요.”
“그렇긴 한데.”
이서혁은 습관처럼 내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아.”
그 때린 부위가 멍든 부위라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여전히 알싸하게 아팠다.
“뭐야. 맞기라도 했어?”
“그렇죠, 뭐…….”
“이렇게 맞았는데, 나한테 협박용으로 영상도 주고… 이건 내가 잘 쓰도록 할게.”
“네, 그럼…….”
“근데, 범아.”
이서혁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나랑 친하게 지내자?”
“저랑요?”
“이런 비열한 수법을 쓰는 걸 보면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비, 비열한? 그 발언에 당황했다. 내가 어디가 비열한 건지. 영상은 그저 증거 확보용일 뿐이다.
“그러니까 범아, 다음에 보면 인사하고.”
이서혁은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나도 연습실에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는데, 이서혁이 창문을 내리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이번 무대 잘해라?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 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연습실로 들어갔다. HOR 연습생들은 나를 쏘아보면서 위아래로 훑었다.
나도 똑같이 HOR 연습생들을 쳐다보다가 정요셉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막내, 화장실에서 똥 싸고 왔어~?”
“큰 똥은 아니었어요.”
정요셉이 인상을 썼다.
“정색하면서 진지하게 말하지 말자~”
“…정색 아닌데.”
적당히 받아준다고 그런 건데 너무 진지하게 보였나. 정요셉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내 귀에 바람을 불며 괴롭힐 때였다. 연습실 문을 열고 PD가 들어왔다.
“각 그룹 개인 인터뷰가 있을 예정입니다.”
개인 인터뷰? 그런 말은 없었지 않나. PD의 얼굴을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급하게 인터뷰를 짠 듯 보였다.
“AA 엔터에서는 범나비 연습생이 대표로 인터뷰를 할 거예요.”
“저요?”
주이든이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였나.
“나비야, 입조심!”
“무슨 말이 있어도 입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멤버들의 걱정에 미소로 화답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내가 PD를 따라나서자 HOR 연습생들은 탐탁지 않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내가 뭐라도 터트릴까 봐 두려운 모양인가 보지. 저 작은 눈으로 쳐다본다고 해봤자 위협을 느끼겠나. 위협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지.
“저… PD님, 고발 하나 해도 돼요?”
“고발이요?”
묵묵히 안무를 연습하던 주이든의 움직임이 멈췄고, 나를 째려보던 HOR 연습생들의 얼굴도 재밌게 일그러졌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돌연프 공개 방송이 있는 날.
‘갑자기 야근을 하게 돼서 내일은 너 혼자 가야겠다. 미안.’
친구의 사정으로 이백수는 혼자 QTQ 방송국에 왔다. 카메라를 들고.
‘친구가 화목현 찍어달라고 한 거니까…….’
아직도 범나비한테 입덕한 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백수였다. 물론 커뮤니티에 올라온 범나비 악플에 대응한다고 밤을 설치긴 했지만.
오늘은 친구의 부탁 때문에 온 거지, 범나비를 찍으려고 온 건 아니다. 돌연프 방청객에 응모한 것도 친구가 하자고 해서 한 거고.
“돌연프 2화 선공개 나왔대!”
“너튜브에?”
“어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백수는 여유롭게 너튜브를 켰다. 돌연프 채널을 구독하는 건 아니었지만, 돌연프와 관련된 영상을 많이 봐서 그런가 너튜브 알고리즘에 돌연프 선공개 영상이 떠 있는 상태였다.
이백수는 심심하기도 하고 시간도 때울 겸 선공개 영상을 보기로 했다.
[이남주 미모?]
이남주가 순위를 보고 충격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넘기고. 10초를 넘기자 나온 범나비의 얼굴에 손가락이 굳었다.
[▲ 금금 VS 나비 ▼]
[금금, 울다?]
[개인 인터뷰에서 범나비의 고발?!]
이런 자극적인 자막이 나오더니 이내 범나비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Q, 개인 인터뷰 하기 전에 고발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 무슨 고발을?]
[AA 범나비 : 아, 고발이요.]
[두근두근]
[제작진이 기대한 고발은 과연!]
중요한 순간에 너튜브 광고가 나왔다.
“아.”
이백수는 광고 스킵을 누르며 이어지는 영상을 기다렸다. 그러자 범나비가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AA 범나비 : 돌연프 급식량이 너무 적습니다.]
[사실 나비는 밥에 진심인 편?]
…밥?
[AA 범나비 : 돌연프 급식이 맛있거든요. 그래서 밥을 더 먹고 싶었는데 더 먹는 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아쉬운 소리가 나오던데, 어떻게 안 될까요?]
진지한 태도에 이백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렇게 범나비를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 범나비 진짜 싫다.”
“어그로 끌어서 좋은 점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표정도 없잖아.”
“이렇게 하는 이유가 커뮤니티에 말 많아서 그런 거 아냐?”
어차피 아니라고 해명을 해도 이미 범나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 거다. 어떻게 보면 범나비의 행동이 맞을 수도.
그렇지만 싫다는 말은 조금 상처였다.
“입장할게요!”
스태프의 말에 이백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QTQ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열기가 이백수를 끌어당겼다. 연습생들의 이름이 적힌 슬로건과 팬들의 열광에 이백수는 카메라를 꽉 잡았다.
“남주야!”
“이금금! 내 보석은 금밖에 없어!”
주변에서 시끄럽게 연습생들의 이름을 외치는 와중에 이백수는 황급히 카메라를 켰다. 연습생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