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돌아온 연습생 멘토 멘티(1)
“숙소 번호 뽑고 올라가 주세요!”
곧바로 숙소 앞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를 선택해 숙소 번호를 뽑았다.
《302호》
굳이 팀을 갈라놓았다. 딱 분량 뽑으려는 수작이다. 뻔하지. 하긴 팀별로 하면 재미가 있겠나.
계단을 올라가자 이미 다른 팀 연습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연습생들이 보였다. 이남주만 없으면 좋겠는데.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꺾어 302호를 찾았다.
“여기네.”
그런데 302호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사람은… 이남주였다. 장난하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같은 방에서 보니까 반갑네요?”
“아, 네. 반갑네요.”
나는 딱히 반갑지 않았다. 이남주랑 같은 방을 쓴다고 하면 얼마나 어그로가 끌릴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침대는 제 맞은편 침대밖에 안 남았어요.”
“아… 그래요?”
신이 도와주지 않는군. 나는 이남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왼쪽 침대에 걸터앉았다.
“숙소 번호는 언제 뽑았어요?”
“제일 먼저 뽑았어요.”
제일 먼저 뽑았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랜덤으로 뽑긴 한 걸까… 조작한 걸 수도 있잖아.
‘하지만 대형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렇게 할 리가 없어.’
괜한 의문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짐을 풀며 바리바리 싸 온 물건을 침대에 올려뒀다.
“와아… 물건이 많네요?”
“아… 휴지, 물티슈, 로션, 컨디셔너, 책, 이어폰, 수건, 담요, 치약, 칫솔, 가글…….”
“더 있어요?”
“아, 드라이기도 있어요.”
연습실에서 오래 지냈던 습관이 있어서 항상 물건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이남주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물건을 가지고 다녀요?”
“네, 언제 필요할지 몰라서.”
“실제로 보부상을 보니까 귀엽네요.”
“…예?”
난생처음 듣는 귀엽다는 말에 뇌가 멈췄다.
“귀엽다고요?”
내가 되묻자 이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설에서만 봤거든요, 보부상은.”
“아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남주의 시선은 여전히 묘하게 내 가방을 향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가방을 꽉 끌어안았다.
‘이 가방… 마음에 드나?’
때마침 화장실에서 정요셉이 나왔다.
“우리 막내 왔네?”
“어, 요셉 형. 같은 방이네요.”
“그러게~ 역시 막내랑 나랑 뭔가 있다니까.”
앞에 이남주가 있는데도 정요셉은 나를 먼저 반겼다.
“요셉 형, 나는 안 보여?”
“어~ 남주도 있었네. 내 눈엔 우리 막내만 보여서 몰랐다. 미안~”
“전 멤버라고 인사도 안 해주고.”
“그거 아니라니까~ 우리 막내가 어리잖아.”
정요셉이 이남주의 옆구리를 공략하면서 놀다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내 주변을 보고는 눈이 빠질 것처럼 커졌다.
“막내야, 침대에 널브러진 물건들… 다 막내 거야~?”
“네? 네, 제 거예요.”
“우리 연습실에서 쓰던 드라이기를 가져왔네~?”
“네, 필요할 것 같아서.”
오랜 기간 연습실에 살다시피 있었더니 생필품이 많았다. 화목현에게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본 후에 흔쾌히 허락도 받았고.
“으음~ 우리 막내, 여행 한 번도 가본 적 없지?”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았지? 내가 놀라는 티를 내자 정요셉이 팔짱을 꼈다.
“아니야.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뭐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걸까. 궁금했으나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밴드, 상비약, 파스를 꺼내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그 앞에 있는 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어? 우리 이든이!”
“왜 네가 여기에 있어!”
“나도 여기 뽑았으니까~”
그리고 방으로 들어오는 주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얼떨결에 주이든의 인사를 받은 나는 그 뒤에 서 있는 금금이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금금이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바로 누워버렸다.
“어, 쟨 인사도 없이 누웠네~ 많이 피곤했나?”
“그런 것 같아요.”
“흐음, 피곤하겠지~”
적당히 금금이를 보호했다. 안 그래도 무대 실수 때문에 멘탈이 나갔을 텐데. 기숙사에 설치된 카메라를 살펴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저런 상태에 빠졌을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약을 올려놓았다.
“저 필요할 때 이거 써도 돼요?”
그때 이남주가 내 약을 가리키며 물었다.
“쓰고 싶으면 쓰세요.”
“진짜 써도 돼요?”
“네, 저 혼자 쓰기엔 어차피 많아서.”
나는 고개를 돌려 빨간색 노트를 베개 옆에 놓았다. 그러고는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혼자 있고 싶었다.
“우리 막내, 혼자 이불 안에서 뭐 해? 형 심심한데~ 설마 우는 건 아니지?”
“안 울어요. 일기 쓰려고.”
“그래, 그래. 우리 막내 정말 우는구나~”
안 운다니까. 막 잠에 빠지려는 찰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문제 3, 팬들이 미치는 요소는?
1. 관계성
2. 소속사
3. 끼와 재능
4. 과거 서사
5. 잘생김
정답 풀이:(비공개)」
…팬들이 미치는 요소라. 5번은 당연했고. 2번은 미치는 요소가 아니라 욕하는 요소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나마…….
‘1번, 관계성.’
정답이 맞는지 빵빠레가 울렸다.
[정답 풀이인 ‘멤버들의 프로필’이 공개됩니다.]
【화목현
외모:-S
노래:+A
춤:-A
리더:+B
나비와의 관계성:-F
트라우마:(비공개)
특징:(비공개)
정요셉
외모:+A
노래:-A
춤:+B
연기:-S
아이돌력:+A
나비와의 관계성:+F
트라우마:(비공개)
특징:(비공개)
이정진
외모:+A
춤:+S
랩:-A
작곡:-S
사회성:-F
나비와의 관계성:-F
트라우마:(비공개)
특징:(비공개)
주이든
외모:-A
노래:+B
춤:+A
랩:+B
친화력:-F
나비와의 관계성:-F
트라우마:(비공개)
특징:(비공개)】
【※멤버의 트라우마와 특징에 대한 정보는 경험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
곰곰이 어제 빨간색 노트에서 봤던 멤버들의 프로필을 곱씹었다. 멤버들의 능력치가 좋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게 좋을 줄은… 더군다나 멤버들의 관계성 수치까지 나왔다.
‘올 F라니… 교수도 이렇게는 안 줄 것 같은데…….’
유일하게 정요셉만 플러스다. 갈 길이 머네.
“나비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화목현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네?”
“나비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그러고 보니까 멤버들의 외모 수준이 S였지. 물끄러미 나를 보던 화목현이 눈을 접으며 웃어주었다.
“형, 잘생겼네요…….”
“왜, 어제는 나 못생겼었어?”
어제? 어제는… 기억이.
“…어제도 잘생겼었죠.”
“음… 나비야, 답변이 늦었어.”
아니… 겨우 몇 초 늦었다고. 내가 당황하자 화목현이 가볍게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까 삐진 건 아닌가 본데. 옆에서 우리를 본 정요셉이 질투가 난다며 어깨에 치댔으나 무시했다.
“이제 ‘돌아온 연습생’의 멘토 멘티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번호 뽑았죠?”
“네!”
아침 일찍 기숙사 대강당에 모여 번호를 뽑았다. 서로서로 도와주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랜덤 뽑기를 실행한 것이다.
“이제 멘토와 멘티를 만날 시간입니다! 1번이라면 2번, 3번이라면 4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짝을 찾으면 됩니다.”
자신의 짝을 찾으라는 MC의 말에 나는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화목현이 다가와 물었다.
“나비야, 몇 번이야?”
“아, 저는 28번이요.”
“아쉽네. 나는 25번이거든.”
아쉽네. 한 끗 차이라.
“우리 막내, 나한테는 번호 안 물어봐~?”
“몇 번인데요?”
“흐음… 늦어서 말해주기 싫은데.”
삐지지 말라는 의미로 정요셉의 팔뚝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정요셉은 뭐가 웃긴지 크게 웃었다.
‘…일부러 삐진 척을 한 거군.’
또 속았다. 혼자 웃고 있는 정요셉을 버려두고 27번을 찾는 도중,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너구나?”
“…어.”
“나 27번이거든.”
첫 만남부터 반말을 하던 연습생. 그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느 공간에 있건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별명이 ‘사건사고’인 연습생이었다. 돌연프에 출연하고 자신의 소속이었던 HOR 엔터를 고소하기도 했다. 모두가 사건사고의 연예계 생활은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건사고는 다음 해에 주말드라마로 재기에 성공했다.
그 사건사고가 내 짝이라니.
“안녕하세요.”
“어, 안녕.”
나는 낯가리는 척을 하면서 옆에 섰다.
“다들 짝을 찾으셨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옆에 있는 분과 3일 동안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짝과 ‘돌아온 연습생’ 영상을 찍어 심사를 볼 겁니다!”
그나마 3일.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주일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야.”
“야가 아니라, 제 이름은 범나비입니다.”
그러자 사건사고가 눈을 껌뻑였다.
“너 멍청하게 생겼는데, 말을 잘한다?”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보고 형이라고 불러.”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 바보가 낫다.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스태프가 준 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패드로 테마곡인 돌아온 연습생 영상을 보는 척했다. 어차피 안 봐도 된다. 회귀 전 QTQ 방송국의 오뮤직어워드에서 가벼운 이벤트로 돌아온 연습생을 춘 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대충 보는 척, 알아듣는 척을 하다가 카메라가 들어오면 웃으면서 열심히 보는 척을 했다.
“너 안 보는 거 티 난다.”
“보고 있는데요.”
“혹시 AA 엔터에서 돌아온 연습생 영상 미리 보여줬어?”
돌연프 측에서 영상을 보여줬을 리가 없었다.
“아니에요. 사실 형도 열심히 안 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대충 봤어요.”
“뭐?”
“그래도 할 수는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건사고한테 욕설이 날아오거나 주먹이 날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사건사고는 신기한 생물을 본 것처럼 크게 웃었다.
“야, 내가 열심히 안 한다고 했어?”
“네……?”
“난 너도 우리랑 같은 줄 알았지.”
우리랑 같다고?
“혹시 영상을 미리 받았나요?”
사건사고가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3일 동안 노래랑 춤을 외워? 그건 미친 짓이지. 안 그래?”
왜 사건사고가 사건사고인지 알 것만 같았다.
“저한테 그런 걸 말해줘도 돼요?”
“뭐, 너한테 말해봤자 고발을 하겠어, 뭘 하겠어?”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온 연습생 영상을 다시 틀었다.
“그래서 안무 외울 수 있겠어, 범아?”
“제 이름은 나비인데.”
“어, 범아.”
하… 할 말은 많지만 참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사건사고는 낄낄 웃었다. 왜 이름을 안 부르고 성으로 부르지?
뭐, 나도 속으로는 사건사고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피차일반인가. 다시 영상을 틀고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죄송해요…….”
금금이가 화목현한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저 못 할 것 같아요……!”
“아니, 금금아!”
저 멀리 분홍색 머리를 휘날리며 금금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금금이는 원망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사건사고가 혀를 찼다.
“멘탈 나갔으면 곱게 나갈 것이지. 널 왜 노려봐?”
나만 알고 있는 거겠지만, 금금이는 멘탈이 나간 게 아니었다. 금금이는 자기가 못한다고 생각하면 밖으로 도망가는 습관이 있었다.
“이야, 화목현만 불쌍하게 됐네.”
화목현은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금금이가 나갔던 곳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사건사고가 웃으면서 바닥을 굴렀다.
“노래랑 안무 외우기 싫다고 도망치는 꼴이 우습네. 안 그래?”
“이유가 있겠죠.”
“범아, 카메라가 뻔히 있는데 도망을 친다고? 이유가 있다고 한들 웃긴 거야.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니까.”
사건사고의 말이 맞았다. 도망치는 모습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사건사고의 입에서 나오는 것도 웃겼다.
“그런데 화목현한테 안 가?”
“…….”
“친하지 않아서 안 가는 건가…….”
이 영악한 새끼. 내가 째려보자 사건사고는 흐린 눈을 하면서 패드를 두드렸다.
“열심히 합시다, 우리.”
“야, 범아. 이렇게 보여도 나 열심히 하거든?”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라니? 날 어떻게 본 거지.”
“배짱 좋게 노는 사람.”
“…내가 베짱이라는 거지?”
“그걸 이제야 아셨어요? 제가 개미고요.”
사건사고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나, 그러면 협조 안 한다?”
“협박하세요?”
“음, 협박 맞지.”
그대로 무시하는 나를 보며 사건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거 말해줄까? 사실 쟤랑 나, 사이 안 좋거든.”
“그러세요?”
“그러세요, 그러세요?”
이 미친놈… 이제 화목현으로 협박을 한다. 자기한테 잘하라는 듯이. 사건사고는 씩 웃으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거지. 저 뛰쳐나간 연습생과 화목현에 대해서 돌연프 PD가 나한테도 물어보지 않을까?”
“…….”
“그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는데. 해볼까?”
…사이가 좋지 않다고 이렇게 협박을 한다?
“알겠어요. 안무 알려 드리면 되잖아요.”
“그래,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사건사고의 환한 미소에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완전히 잘못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