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 준비(1)
주의 사항……? 내가 이런 걸 적었던가.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 페이지를 넘겼는데.
[♨인생을 바꿀 주의 사항!♨
정말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고 하나요?
미치지 않고서야 돌았나요?]
아니… 도대체 뭐길래? 다음 페이지를 잡고 넘기려는 순간,
【♡아이돌 노트♥
노트에 적혀 있는 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맞힐 경우 당신의 아이돌 트라우마를 치유합니다. 그 대신 페널티가 존재합니다.】
페널티?
【99개의 문제를 못 맞히고 죽을 시에 회귀합니다.
페널티:회귀의 시간 속에 갇힘.】
회귀? 나, 회귀한 거란 말이지. 어째서 꿈인데 아픔이 느껴지는 건가 싶긴 했다. 그렇게 다시 다음 페이지를 넘겼는데,
【분명 주의 사항을 안내해 드렸는데 이 노트를 펼쳤다면, 당신은 완벽한 아이돌이 되려고 하시는 거군요? 그렇다면 저와 계약을 하시면 됩니다.】
대수롭지 않게 페이지를 넘겼더니 문제가 적혀 있었다.
[문제 1, ■■■을(를) 옮겨라.
정답:
풀이:비공개
‘정답’을 맞히면 풀이가 나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으나 문제의 정답을 유추했다. 세 글자… 그리고 옮겨라.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소속사?”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길게 풀이가 그려졌다.
[정답, 소속사입니다!
풀이:회귀를 한 당신!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으신가요?
HI 엔터는 연달아 그룹이 실패하여 빚이 쌓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4년 동안 돈을 못 벌지 않았나요?
네스트의 미래를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뜸을 들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당신은 소속사를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풀이를 보고 직감했다. 키오는 겉에서 보면 성공한 그룹 같았으나 속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그 곰팡이의 주범은 소속사였다. 대표님은 우리에게 매일 이렇게 말했다.
‘…너희, 성공해야지.’
그리고 키오를 성공시키고 싶은 야망보다는 키오한테 쓴 돈을 돌려받고 싶은 욕심이 컸던 나머지 키오 멤버들을 끝없이 굴렸다.
팬들이 앨범을 사줘도 빚을 탕감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드라마 OST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키오 역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지옥에 몇 년을 또 있으라고?
그건, 싫었다.
【정했습니까?】
“어.”
【아이돌 노트는 실시간으로 시스템창이 떠오릅니다.】
시스템창……?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일을 해야지. 나는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AA 엔터 팀장님의 명함을 꺼내 번호를 두드렸다.
“지금 바로 할까?”
우리 할머니가 사람이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음성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범나비입니다.”
-아아! 범나비 연습생? 그래요, 결정했어요?
“네, 결정했어요.”
-들어오기로? 아니면 거절?
“들어갈게요.”
들어간다는 말에 상대방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지금 당장 들어오는 걸로 할까요. 아니면 내일?
“내일 갈게요, 애들이랑.”
-아, 당장 오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이런 제안을 받은 연습생에게 가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거라서…….
“그래도 전…….”
-너무 착해도 안 좋은데.
“네?”
-그래요. 내일 HI 엔터 앞으로 갈게요. 준비 다 하고 와요.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음, 착하다고?
“착하진 않은 것 같은데…….”
나도 딱히 좋은 성격은 아니라서.
***
“형, 진짜 가요?”
“왜?”
“진짜 우리 버리고 가요?”
“버린다니.”
“이렇게 가는 게 버리는 거죠…….”
연습실에서 쓰던 물건을 가방에 넣자 금금이가 내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정말 갈 거예요?”
“가야지.”
“왜요? 어제는 안 가겠다고 하더니.”
“너희한테도 그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처음 듣는 말인 듯 금금이가 눈을 껌뻑거렸다. 나는 가방에 물건을 넣던 손을 빼고 금금이의 어깨를 문질렀다.
“뭐가 좋아요!”
“…글쎄. 말은 못 해주겠는데.”
“말도 못 해주면서!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요…….”
“금금아, 내가 외국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외국으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나는 금금이의 머리를 흩트렸다. 금금이는 만지지 말라며 반항했으나 이미 금금이의 머리는 망가져 있었다. 모르는 척하면서 가방에 빨간색 노트를 넣었다.
“…근데 형, 애들은 괜찮을까요?”
금금이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같은 멤버로서의 정이 사라져 버려서.
“네가 잘 말해줘.”
“아, 형…….”
“내 말보다 네 말을 더 잘 듣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대로 가면 미워할 거예요.”
“그래, 미워해.”
그게 편하다면 마음껏 미워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연습실에서 나오자 전무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금금이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전무님이 있는 걸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나비야, 잘 지내.”
“전무님도 잘 지내세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전무님은 코를 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저건 미안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알기에 괜찮다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전무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려는 찰나였다.
“조심해라.”
“…….”
“AA 엔터에서 나간 연습생이 있는데 걔 뒷배가 좋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러더니 전무님은 뒤로 몸을 뺐다. 더는 말해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숙인 뒤 내 갈 길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한때는 죽어도 HI 엔터에서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안녕하세요.”
밖으로 나가자 AA 엔터 팀장님이 서 있었다. 작은 경차에 올라탄 나는 AA 엔터 팀장님의 흐뭇한 미소를 피할 도리가 없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얼굴만 봐도 흐뭇해서요. 사실 처음 만났을 때 범나비 씨가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이 했어요.”
“…아.”
“우리 애들과 어울리는 연습생이 몇 없거든요.”
하긴 네스트 멤버들이 워낙 잘생긴 편이긴 하다. 그래서 그룹에 어울리는 얼굴을 찾기 어려웠다는 언급을 네스트 화보 인터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반말해도 될까?”
“네, 반말하셔도 돼요.”
“그래, 나비야.”
AA 엔터 팀장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어울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잠깐 침음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비야, 잘할 수 있지?”
“잘할 수 있어요.”
“그래도 마냥 잘할 수 있다고 데뷔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알지?”
하긴 아이돌 시장은 레드오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얼굴이 잘났어도 아이돌로 성공할 수 없는 게 이 바닥이다.
하지만 나에겐 작은 확신이 있었다. 이 연예계 바닥을 잘 알고 있다는 점.
“데뷔할 수 있어요.”
“뭐?”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데뷔해 봤거든요. 성공도 해봤고. AA 엔터 팀장님은 당당한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미소를 지으셨다.
“자신감은 좋네. 마음에 들어.”
그 말에 조금 쑥스러웠다. 괜히 콧잔등을 긁으며 앞을 보는데 AA 엔터 팀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다행이다. 그런 자신감이 없으면 우리 애들이랑 못 어울리거든.”
“……?”
“애들과 만나보면 알 수 있어.”
무슨 뜻일까?
“걔들이 조금 무섭거든.”
“…예?”
“눈에 독기가 가득해. 어떻게 보면 무섭다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네스트는 멤버들 간의 관계가 끈끈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새 멤버가 들어온다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것이다.
“네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두려워하더라고.”
당연히 그렇겠지. 연습생 시절에는 AA 엔터와 접점이 아예 없었다. 그저 배우 전문인 AA 엔터에서 아이돌을 키우고 있다는 소식만 접했을 뿐.
“어떻게 보면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죠…….”
나도 두려웠다. 과거로 돌아왔으나, 네스트가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잘 몰랐기에.
한창 바쁘게 살다가 우연히 스태프가 보던 영상을 같이 본 적이 있다. 네스트의 한 멤버는 팬들에게 1위를 안겨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었지.
“자, 도착했다. 내리자.”
“네…….”
차에서 내려 AA 엔터를 올려다보았다. HI 엔터보다 명성은 높은 곳이지만 왠지 모르게 허름했다. 심지어 귀신이 나올 법한 공간도 있었다. 무슨 풀이 저렇게 무성해……?
“뭐 해?”
“…풀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
“태평하네? 풀도 보고.”
“아, 풀 때깔이 좋아 보여서요.”
“그렇게 변명 안 해도 돼.”
“네에…….”
괜한 말을 꺼냈나.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곧장 AA 엔터 건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연습실이라고 적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삐그덕. 삐그덕.
바닥에 닿는 신발 소리가 맞춘 것처럼 일정했다.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얘들아!”
우렁찬 목소리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긴장된 상태에서 고개를 들자 잘생긴 얼굴이 눈에 띄었다. AA 엔터 팀장님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 명이 없는데…….”
“요셉이가 없어요.”
“정요셉은?”
“잠시 화장실 갔어요.”
“화장실?”
“너무 급하다면서…….”
“내가 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그러면 정요셉한테는 나중에 소개해 주고… 자, 얘는 HI 엔터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범나비.”
나에게 향하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러나 앞을 똑바로 주시했다. 얼굴이 아닌 어깨를 보기는 했지만.
“…얘들아, 인사 안 해?”
훗날 네스트의 리더가 되는 화목현이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했다. 자주 잡았던 손이라 그런지 익숙했다. 그랬더니 뒤에서 헛웃음이 들려왔다.
“팀장님, 쟤 소문 들었잖아요?”
“무슨 소문?”
“손버릇도 안 좋고 싸가지 없는 애라고 하던데.”
“누가?”
“그건 모르죠. 저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버릇도 안 좋고 싸가지 없는 애라고? 팩트만 말하자면 나는 손버릇이 안 좋기는커녕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다. AA 엔터 팀장님은 이상한 헛소리를 듣고 왔다면서 구박을 했으나 다들 도통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든아, 이럴수록 우리한테 좋지 않다는 거 알잖아?”
“그럼 내보내요. 쟤 없어도 우리는 괜찮은데.”
“얘들아… 어쩔 수 없어. 이미 끝났거든.”
“뭐가 끝나요?”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가 다음 주로 앞당겨져서 내보낼 수가 없단다?”
AA 엔터 팀장님의 말에 모두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언제부터요!”
“듣기로는 오늘 아침.”
“이유는요?”
“그 시기에 들어갈 드라마가 펑크 나서 뒤로 밀렸거든.”
모두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연습은…….”
“지금도 잘하잖아. 지금껏 해온 대로 하면 되는데?”
“한 명이 더 들어오면 말이 달라지는데요? 춤 동선과 노래 파트를 다시 짜야 하잖아요.”
화목현의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그러면 나가지 말까? 우리가 돌아온 연습생 프로젝트에 안 나간다고 하면 QTQ 음악 방송에 우리 데뷔 무대가 없을 수도 있는데?”
AA 엔터 팀장님은 상황이 답답한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돌연프 PD가 자기 프로그램에 안 나오는 연습생들은 QTQ 음악 방송에 못 나오게 할 수도 있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방송 갑질을 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얘들아, 일주일 동안 잘해보자.”
숨이 턱 막혔다. 나 때문에 모든 일이 다 꼬인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