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모든 능력치 봉인이 해금됩니다.]
[이미 모든 능력치가 해금된 상태입니다. 대체된 보상으로 모든 신체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마력 제어력이 3 오릅니다.]
[???가 공개됩니다.]
[‘천살성’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별’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떠오른 메시지는 짧았다.
얼마나 짧은지 나갔던 정신이 다시 돌아올 정도였다.
‘아니 뭐야 시발.’
뭐가 이리 쥐꼬리만 해?
물론 마력 제어력이 오른 건, 상당히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그뿐이라는 게 문제다.
겨우 3만 오를 거면 다른 보상도 주든가 해야지, 이게 끝이라고?
지금 장난하나?
‘나 안 해.’
시발 배 째.
[추가 보상!]
[‘벽’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
내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세계가 추가 보상을 제안했다.
보기에는 먼저 준 보상과 다를 게 있냐 싶었지만.
‘이거라면…….’
나에겐 아니었다.
현재 내게 마력 제어력 다음으로 필요한 보상이었다.
벽을 돌파할 수 있다.
즉,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르는 데에 방해물 중 하나가 치워졌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저 벽이 고체인 벽을 말하는 건 아닐 테니까.
‘잠만.’
지금 내 능력치가 얼마지?
난 다급히 내 능력치창을 열었다.
[라온 리그벨토]
힘: 70
민첩: 65
체력: 71
마력:
115(-30)(-1)(-0.2)(-0.5)(-10)(사용 불가능)
마력 제어: 9.5 (마력 사용 혹은 폭주할 시,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신성력: 0
‘신체 능력치가 70을 넘었다……?’
…그럼 난 지금 소드마스턴데?
이 세계 사람들은 경지를 넘은 순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유저들은 상태창에 적힌 수치로 경지를 구분했다.
신체 능력치 60대는 상급 기사, 70대는 소드마스터.
‘능력치 두 개가 70대를 넘었으니, 지금 난 소드마스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검에 대한 깨달음은 물론 극의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쪽짜리에 불가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 자체는 인간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니.
‘그런데 왜 아무런 느낌이……?’
라온을 플레이하면서 능력치 70대는 몇 번 넘어봤었다.
애초에 빙의하기 전의 능력치는 마력을 제외한 모두 89였었으니까.
능력치 70을 넘겼을 때마다 본 건,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힘들어하는 라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나고, 안정 상태가 된 라온은 ‘상쾌해. 새사람이 된 기분이야’라고 중얼거리곤 했었다.
‘지금은 그냥… 뭐 달라진 게 없는데?’
손을 꽉 쥐어봐도, 능력치가 오르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냥 벽을 넘어서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일단은 이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지금 온종일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볼을 손등으로 쓱 닦고, 고개를 돌렸다.
“…….”
“…….”
날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
특히 스칼라의 시선이 강렬했다.
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왜 다들 그리 빤히 봐. 이별 처음 봐?”
“만약… 오빠랑 언니가 결혼하면… 난 뭐가 돼…?”
“무슨 볼뽀뽀에 결혼까지 가냐?”
요즘 세상에 무슨.
헬레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녀가 정실이 되는 건 힘들겠지만, 두 번째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것 정돈 괜찮네. 첫 번째 부인만 대충 가문의 격에 맞으면 되거든.”
“닥쳐.”
불에다가 기름 붓지 마.
* * *
반전 세계가 해제되고 나서 드러난 풍경은 꽤 잔혹했다.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인 피와 사체들.
정령들이 소환되었다가 역소환된 여파로 마력의 흐름도 불안정했다.
‘내 마력은… 얌전하군.’
놀라운 일이다. 원래 이런 상태라면 마력이 마구 난리를 쳐야 하는데,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얌전하다니.
‘제어력이 오른 덕분인가? 아니면 신체 능력치가 올라서?’
뭐가 됐던 내겐 이득이다.
이제 내 상태를 ‘안정’이란 단어로 묘사할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내, 내 성이…….”
펭수아가 울상이 된 채로 반쯤 폐허가 된 성을 쓰다듬었다. 나는 눈치 없이 구는 그에게 혀를 찼다.
“덕분에 산 줄 알아. 아니었으면 저기 버려진 시체는 암살자가 아니라 네가 됐을 테니까.”
“하지만….”
“더 지껄이면 저기 시체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펭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벨라와 비슷한 수법을 써보려는 건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남정네가 그러니 역했다.
그냥 역한 것도 아니고 X나 역했다.
퍽!
“끄엑.”
어딘가 날아온 눈덩이를 얻어맞은 펭수아가 단말마와 함께 기절했다.
펭귄 살해범 데자트는 검 끝으로 걸리적거리는 시체들을 툭툭 치며 말했다.
“얼른 치우기나 하죠. 스칼라. 이것들 좀 불태워줄래요?”
“응… 잠시만…”
슬쩍 눈덩이를 들었던 스칼라는 불로 눈을 녹인 후, 시체까지 몽땅 태웠다.
“공주님. 마력 안정시키는 데 좀 도와주세요.”
“응. 잠시만.”
샤흐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혼란스러운 마력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훌쩍거리는 펭수아도 뒤처리에 가담했다.
검밖에 쓸 줄 모르는 헬레나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때우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난 할 게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그러게.”
헬레나의 질문에 난 잠시 고민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총 두 개.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과, 이 여행을 계속하는 것.
내 마음은 아직 후자에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가문은… 아직 돌아갈 타이밍이 아니야.’
누군가가 날 호출한 것도 아니고,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가봤자 아벨라에게 전부 줘버려 텅 빈 돈주머니를 채우는 정도겠지.
아. 돈주머니도 없구나?
‘뭐… 어차피 헬레나가 있으니 괜찮겠지.’
정 아니면 용병 활동을 해서 돈을 벌면 된다.
어차피 좀 돌아다니게 될 거, 용병 경험 정도는 쌓아둬도 나쁘지 않겠지.
“저….”
“?”
가득 쌓인 시체들이 거의 정리가 되었을 때 즈음.
성을 어느 정도 보수한 펭수아가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왜?”
“그… 말씀해주신 극의… 그건 언제쯤 알려주시려는….”
‘얜 진짜 성격 신기하네.’
눈치가 없나?
‘뭐, 상관없지.’
어차피 몸 상태도 멀쩡하고.
‘나머지 애들은….’
좀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지금 할 일이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
“얘들아.”
“네에?”
“잠깐 뒤에 산에 좀 다녀오자.”
“네에?!”
생각해보니 지금 찾으러 갈 사람, 아니 유령은 지금 내가 처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지금은 영락한 처지지만.
한 때 ‘왕’으로 불리며 대륙을 군림해왔던 자이니.
“그럼 가자.”
* * *
얼어붙은 폭포.
설산 꼭대기 근처인 그곳은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 펭수아조차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헬레나. 부숴버려.”
“흡!”
헬레나의 검이 앞길을 가로막는 돌을 갈랐다.
돌이 쪼개지며 폭포로 향하는 작은 입구가 드러났다.
자신이 막아둔 길을 연 것에 화가 났는지, 얼음 정령들이 막 몰려들었지만.
-!!!
날 본 순간, 단말마를 지르며 후다닥 도망갔다.
“…….”
펭수아는 뭘 느낀 듯이, 멍한 눈을 한 채 입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샤흐, 데자트, 스칼라, 모두가 감탄을 터트렸다.
꼭대기와 이어진 폭포가.
물이 쏟아지는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동물들이….”
“그거 만지지 마. 동상 걸린다.”
조각처럼 얼어붙은 동물을 만지려던 데자트가 흠칫 떤다.
스칼라가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나도… 동상 걸려…?”
“넌…… 음, 폭발이 일어날 거 같은데.”
“???”
“아무튼 여기서 아무것도 만지지 마. 괜히 신경 거슬리게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런데 저희가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 이름이 뭐예요?”
“얼음여.”
“…얼음여? 이름이 왜 그래요? 성이 얼 씨인가?”
“그건 아니고.”
정확히는 얼음여■이다.
모종의 이유로 자격을 잃은 얼음여■은 이름의 한 글자를 잃었고, 그 뒤로 이곳에 갇혀 지냈다.
다행인 점이라면, 꽤 신사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름을 잃은 것도 본인이 부족해서이지, 적이 부당한 방법을 취한 게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 그라면 내가 지금 가진 의문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펭수아.”
“…예, 예?”
“괜히 홀리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넌 고위 마법사다. 극의가 보였다고 그대로 따라갔다간, 오히려 네 길을 잃을지도 몰라.”
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펭수아가 양 뺨을 두드렸다.
내가 직접 때려줄까 싶어서 손을 들자, 펭수아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헬레나.”
“음?”
“넌 싸울 생각하지 말고.”
“…난 극의를 아는 실력자에게, 무턱대고 달려들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 아닐세.”
“나한텐 왜 덤볐는데?”
“…….”
아무튼 우리는 폭포에 다가갔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가까이서 보는 게 더 장관이었다. 마치 얼어붙은 세상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은 느낌.
펭수아는 폭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런 고위 마법을 유지하다니……! 단순히 물만 얼린 게 아니라 지형으로 아예 굳혀버려…… 읍읍!”
더 시끄럽게 하기 전에 입을 막고, 폭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얼음여■이여.”
휘이이이이잉!
차가운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미 내 경지는 겨우 이런 냉기에 얼어붙지 않는다.
만약 얼음여■이 왕의 경지에 올라있다면, 그냥 얼어붙겠지만.
지금 그는 그저 이 공간에 갇힌 일종의 지박령일 뿐이었다.
“당신을 뵈러 왔습니다.”
스르륵…….
폭포가 마치 신기루처럼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폭포가 내 바로 앞에 모여든다.
[…내 이름을 아는 자는… 오랜만인데….]
이윽고 중성적인 외형을 가진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누구지…?]
“당신에게 극의를 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극의… 극의라… 그래… 내가 그런 걸 좇던 적이 있었지….]
다행히 내가 기억하던 성격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유령이 빙글 몸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 * *
그가 안내한 곳은 녹아내린 폭포로 인해 드러난 동굴이었다.
[천천히 내려오도록…….]
얼음이 가득한 동굴 안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냉기가 강해진다.
‘미리 두꺼운 옷을 입고 오기 잘했군.’
얼마나 냉기가 지독한지, 스칼라를 제외하면 모두 상급 기사에 가까울 정도인데 다들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유독 추위에 약한 스칼라는 꼬리와 귀를 쫑긋 세우며 힘들어해서 품에 안아줬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니, 이내 동굴의 끝이 보인다.
“우와….”
동굴의 끝에는 아주 넓은 공동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넓다.
천장을 지탱하는 얼음 기둥은 엄청나게 두꺼워, 내 쇠사슬로 몇 번을 후려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서 오거라….”
우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너무나 넓은 공동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왕좌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의 공동에 온 걸 환영하느니라….”
힘없는 목소리, 반쯤 기울어진 왕관, 반짝임을 잃은 얼음.
[얼음여■를 마주하였습니다.]
이름을 잃은 왕을 마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