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내게 ‘우주’란 그렇게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과학이 발전한 지구에서 우주란 미지(未知)의 영역일지언정, 무지(無知)의 영역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별이… 나를 주목한다고?’
저러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곧 별에게 자아가 있음을 의미했다.
게임을 하면서 이런 경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성좌물도 아니고.’
한때 유행했던 웹소설의 소재가 떠오르긴 했지만, ‘영웅의 문’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출시한 지 10년도 더 넘은 게임이 ‘성좌물’과 연관이 있다면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이해하려면 억지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최종 보스가 온 곳이 어디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이상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고밀라가 온 곳은 우주.’
최종 보스의 컨셉 자체가 우주에서 온 생명체. 그중에서도 행성을 파괴하는 ‘파괴자’들의 수장이었으니.
사실 별은 의지가 있던 외계의 존재였습니다! 라고 해도 어이는 없어도 납득은 할 수준이라는 거였다.
다만, 의아한 건 이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별이 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가였다.
‘…아벨라가 말한 거와 연관이 있나?’
별이 자신을 미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 미쳐버린다면 죽여달라.
난 이 말을 무시했다.
최소한 내가 가진 정보와 지식, 그리고 상식 안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녀가 말한 일이 가능하다면?
저 별이 그 원인이라면?
‘……지금 나는 별에 대해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별은 물론 천살성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다른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나름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지만.
퓨수엘에게도, 가주에게도, 정보만 수집하던 유저들에게도.
별이란 존재는 조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벨라에게 들었을 때, 그때 찾아봤어야 했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무 급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우왕좌왕하지는 않았다.
차갑게 식은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저 별의 목표를 알아내는 것.’
난 별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난 다급히 목을 더듬었다.
뭐야. 왜 말이 안 나와?
말해보기 위해 여러 번 입을 열어보지만.
“■■, ■■■……!”
목소리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난 다급히 옆을 돌아봤다.
‘뭐야.’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샤흐가 없어진 상태였다.
근처를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샌가 내 옆에 서 있던 인간…… 아니.
[천살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살성.
그는 핏물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태를 한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달싹인다.
-건방진 인간이여.
[천살성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울컥!
목소리를 들은 순간,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난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시뻘건 핏물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체내의 마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폭주도가 상승합니다!]
[현 폭주도: 99%]
[경고! 경고! 조금의 자극이 주어질 시, 폭주도가 상승하여 육체가 폭발합니다.]
‘미친…….’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머릿속이 헤집어진다.
누군가가 내 머리 안에 피 같은 걸 들이부은 기분이었다.
뇌가 타인의 피에 적셔져 오염되는 듯한 느낌.
머리를 부여잡은 내게 천살성이 입을 연다.
-감히 나의 일에 끼어들지 말지어다.
그건, 마치 신이 직접 말하는 듯한 거룩한 목소리였다.
“……허억!”
나는 거칠게 숨을 내뱉으면서 정신을 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몸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라온?! 괜찮아요?!”
샤흐가 다급히 날 옆에서 부축했다.
눈짓으로 샤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보낸 후, 내 몸 상태를 살폈다.
[폭주도: 42%]
폭주도는 멀쩡했다. 분명 피를 잔뜩 토했는데, 피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흘렀던 흔적도 사라졌다.
‘환각?’
난 고개를 들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붉었던 달이거늘.
지금 보이는 하늘엔, 은빛의 달 하나만이 고고히 떠 있을 뿐이었다.
‘……단순한 착각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뇌가 피에 담가진 듯한 끔찍한 감각은 아직도 뚜렷했다.
이게 가짜라면, 지금 느껴지는 이 모든 걸 의심해야 했다.
그 정도로 뚜렷하고 고통스러웠으니까.
‘대체 내게 왜 그런 짓을?’
난 천살성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건….’
카가가강!
‘저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거겠지.’
살벌하게 검을 맞대고 있는 두 암살자.
아벨라와 암왕.
지금은 암왕이 앞서고 있으나, 검이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벨라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성장 속도대로라면, 아무리 늦어도 3시간 안에는 암왕을 넘어설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그때, 아벨라의 공격에 목에서 피를 흘린 암왕이 그녀에게 으르렁거렸다.
“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너와 검을 맞부딪힐 때마다 힘이……!”
“닥쳐.”
순간 아벨라가 내뱉은 살벌한 말에 귀를 의심했지만.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방금 내뱉은 암왕의 말을 곱씹었다.
‘아벨라가 암왕의 힘을 흡수하고 있다.’
아벨라의 능력인가?
그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힘을 빼앗는다는 건, 곧 상대방의 업을 흡수한다는 건데.
그런 능력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세계’가 허락할 가능성도 없었고.
‘그렇다면 저 일도 천살성의 개입 때문이라는 건데…….’
“네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천살성이 내 힘을……!!”
“그건 처음부터 네 힘이 아니야.”
아. 조금 알 거 같다.
‘천살성이 원래 힘을 주던 이는 암왕이었다.’
다만, 지금은 그 대상이 아벨라로 바뀐 듯했고.
둘이 검을 부딪칠 때마다, 암왕에게로 가 있던 천살성의 힘이 아벨라에게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냥 조용히 넘겨주면 좋을 것을, 굳이 이런 방법을 택하다니.
대체 왜?
단순한 유희? 취향? 아니면 무슨 목표가 있는 건가?
“천살성에 대해 알아?”
“네?”
내 질문에 샤흐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본 적 있어요.”
“아는 점에 대해서 전부 다 말해줘.”
“제가 아는 바로는….”
샤흐는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내게 정보를 정리해서 전달했다.
“미치게 하여 이 세상을 쓸어버리는 게 목표라…….”
피와 살육을 사랑하는 별.
굳이 저렇게 싸워야만 힘이 넘어가게 만든 것도 그 성향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왜 날 안 죽였을까.”
“네?”
엘프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천살성이 ‘주목’한 이는 피와 살육에 미쳐버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천살성이 주목한 이는 누구인가.
‘아벨라.’
그렇다면 천살성 입장에선 나를 죽이는 게 이득이었다. 아벨라의 정신은 이미 불안정한 상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죽는다면, 그녀는 높은 확률로 무너질 것이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몰라서 그런 거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천살성에 대해 말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마력을 폭주시켜 인간을 미쳐버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겨우 그런 것 하나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왜 날 죽이지 않았는가?’
난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해서?’
아니. 이건 아니다.
그렇다면 ‘끼어들지 말라’가 아니라, 다른 말을 했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살아있어야 하거나.’
혹은.
‘날 못 죽이거나.’
난 씨익 미소 지었다.
둘 중 뭐가 됐든 상관없다. 결국 결론은 같지 않은가.
천살성은, 나를 죽일 수 없다.
즉 내가 아무리 나대도 방금처럼 경고하는 일 이상은 못 할 가능성이 컸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그걸로 아벨라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대놓고 티가 나잖아.”
“네…? 갑자기 왜 그리 혼잣말을…?”
“결정했어.”
내가 할 일은 정해졌다.
이게 정말로 마녀가 말한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길 중 하나일진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우린 아벨라를 방해한다.”
-네?!
-…뭐?
-미, 미치셨습니까?
아니더라도, 난 해내야 했다.
이대로 두어서 아벨라가 미치게 할 순 없으니까.
“아벨라가 암왕을 죽여선 안 돼.”
아벨라는 암왕의 힘을 흡수할수록 더욱 미쳐갈 것이다.
지금만 해도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일단 둘을 떨어트려 놓는 게 우선이다.
[반전 세계 - 거인]
반전 세계를 가득 채운 마력에 따라 거인의 형태가 생겨났다.
거인의 힘을 느낀 암왕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 틈을 노린 아벨라의 단검이 그의 목을 노린다.
닿기 직전.
쿠구우우!
내가 움직이는 거인의 손바닥이 땅거죽을 뒤엎어버렸다.
“!!!”
땅이 엎어지며 강제로 공격이 틀어진 아벨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아래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듯이 땅이 위로 들어 올려진다. 갑작스러운 지형 변화에 아벨라가 비틀거렸다.
지금이다. 난 쇠사슬을 길게 휘둘렀다.
촤르르륵!
“도련…… 님……?!”
“아벨라. 넌 쉬고 있어.”
나는 당혹스러워 하는 아벨라에게 말했다.
“넌 암왕과 싸워선 안 돼.”
“…왜요? 제가 쓸모없어서?”
순간, 안 그래도 붉은 그녀의 눈동자가 더 붉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얼굴을 찡그린다.
난 그녀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럼 왜요…?! …아니. 왜요?”
“널 미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게 무슨….”
“잘 생각해봐. 지금 네 상태가 멀쩡한지.”
그녀는 내 말에 더 크게 눈을 찌푸렸다.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는 건 콧대와 눈뿐이지만, 고통스러워한다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저는… 지금… 멀쩡…!! 해… 요.”
“아니.”
난 말하던 틈을 노리고 아벨라에게 달려들려는 암왕을 손바닥으로 찍어 눌러버렸다.
그림자 속으로 공격을 피했다가 다시 튀어나온 암왕에게 데자트가 검을 휘둘렀다.
쾅!
공격을 막아낸 암왕이 뒤로 날아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건만, 아벨라의 눈은 암왕을 따라가고 있었다.
“봐.”
난 그녀가 정신을 차리도록 다시 말을 걸었다.
아벨라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녀가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지금 네가 생각해도 아니잖아.”
“저는… 저 새끼를… 아니, 암왕을 난도질… 아니 죽여야….”
“조금만 눈 감고 쉬고 있어.”
“싫어!!!”
“부탁이야.”
흠칫.
내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크게 들썩인다.
아주 조금이지만, 눈동자의 색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마스크를 해제하고, 피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어요. 가만히 있을게요.”
“내가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응.”
난 다시 달려오는 암왕에게 벼락을 떨어트렸다.
쿠릉-!
검은 벼락이 그대로 암왕의 머리에 꽂혔다.
상당히 지친 모양인지, 아니면 아벨라에게 힘을 빨린 영향 때문인지.
결국 공격을 허용하고만 암왕이 크게 휘청거렸다.
동시에 스칼라의 불꽃과 샤흐의 창이 그를 덮쳤다.
“크아아아아아아!”
난 더 이상 암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고개를 올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듯한 달.
나는 달을 보며 한껏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왜. 한 번 더 해보던가.”
하지만, 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공간도 바뀌는 바가 전혀 없었고.
‘역시.’
천살성은 이 이상으로 날 건드리지 못한다.
아마 세계의 개입 때문이 아닐까.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상상 이상의 큰 개입을 하고 있었다.
천살성 같은 이방인 때문에 세계가 망쳐지는 걸 원하지 않을 터.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짧고 굵게. 그리고 확실하게.
“암왕.”
난 그림자에 몸을 숨겨 겨우 목숨을 건진 암왕에게 말했다.
“원래는 널 내 하녀에게 죽게 만들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뭐…?”
“넌 우리에게 죽는다.”
난 손을 들었다.
내 바로 옆자리에 선 샤흐와 스칼라가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암왕과 마찬가지로 암기를 사용할 수 있는 데자트도 공격 자세를 준비했다.
“빌어먹을 자식들이…….”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이를 인지한 암왕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거라!”
“응.”
파직!
천둥이 울려 퍼지면서, 하늘이 갈라졌다.
그리고.
“헬레나. 그대로 날려버려.”
-알겠네.
여태까지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던 헬레나가.
하늘에서 검을 휘둘렀다.
[섬멸]
헬레나 글라스크를 대표하는 광역기가.
오로지 암왕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암왕이 서 있던 자리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