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별은 변덕스러우며 까다롭다. 특히나 천살성이 유독 그랬다. 피 같은 걸 원하는 폭력적인 성향의 별이었다.
‘어째서…….’
암왕은 그러한 별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채워줘 왔다. 피와 살육의 현장을 보여주는 걸 넘어서, 이들을 바치는 등의 행위를 해왔다.
그에 대한 대가로 많은 힘을 받았다. 부작용으로 광증과 살의도 받아들이긴 했으나, 암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를 바탕으로 더한 강자들도 죽여왔는데.
갑자기 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닿는 게 느껴진다.
‘별이… 두 명을 주목한다고…?’
전례 없던 일이다.
별은 단 한 명에게만 시선을 준다. 시선을 주던 이의 전성기가 끝나 자신이 원하는 피와 살육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이 났을 때서야 시선을 뗀다.
‘분명 나는 이리 멀쩡하거늘!’
이런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긴 했다.
암왕이 직접 죽인 후계자.
확신이 가진 않았으나, 후계자는 그의 성장세를 뛰어넘을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고.
싸우는 중간에, 천살성이 아주 조금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으니.
‘겨우 지킨 힘이거늘!’
이렇게 뜬금없이, 시선을 돌린다고?
‘……상관없다.’
어차피 암왕의 모든 힘은 천살성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다.
홀로 강자 사냥에 성공해오면서 쌓아 올린 업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오는 힘.
아무리 천살성이 다른 이를 주목한다고 한들, 그 주목을 받는 이가 지금의 자신보다 강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격차는 곧 좁혀질 터.
‘이번 일이 끝나고 죽여야 한다……!’
아직 천살성이 그를 주목하고 있을 때!
그 순간.
피이이잉!
“!!”
머리를 노리고 쏘아진 창을 고개를 젖혀 피해냈다.
성 꼭대기의 창가에 발을 올린 채 투창 자세를 잡은 엘프의 모습이 보인다.
암왕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대체 어디로 숨어들었나 했더니… 거기 있었느냐…!”
“당신이 날 죽이라 사주한 거야?”
“나에게 의뢰를 넣은 건 다른 이다만.”
“거짓말하시네. 지금 두 눈이 얼른 날 죽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들켰나?”
샤흐의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었다.
“너 때문에 나와 데자트가 영원히 이별할 뻔했어.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하. 네가 특별한 엘프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거지?”
“어쩌긴.”
그녀를 중심으로 냉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냉기가 순식간에 암왕의 몸에 스며든다.
반응했다, 못했다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 설산에 있는 한, 반드시 걸리는 디버프!
“널 죽이는 거지.”
“……!”
몸이 둔해진 걸 느낀 암왕이 정면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샤흐의 손에서 쏘아진 창과 검이 맞부딪혔다.
콰아아앙!
“크으윽!”
상당한 파괴력이 몸이 흔들렸다.
암왕은 이대로 겉면을 타고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5층에 착지했다.
착지한 순간, 창가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
화르르르르르르륵!
불꽃에 몸이 집어삼켜졌다.
평범한 불꽃이라면 그의 육체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겠지만, 내뿜어진 불꽃은 이때까지 본 어떠한 불꽃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암왕이 다급히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대로 마법사를 노리려는 순간, 그가 숨은 자리에 검기가 쏟아부어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크으으….”
마치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읽히는 것 같다.
아니, 읽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움직임이, 전략을 짠 이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건가?
암왕은 자신이 마치 부처 손바닥 위의 원숭이처럼 놀아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모두 내게 치명적이다.’
저 창을 다루는 엘프부터 시작하여 이 설산에서 불을 다루는 미친 마법사, 그리고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이 환경까지.
모든 게 그에게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마법사를 우선 죽인다.’
이 불리한 상황을 만드는 놈들을 지워내는 수밖에!
암왕의 눈이 검게 번뜩였다. 그의 고유 능력인 <그림자 생성>.
암살자의 한정적인 은신이라는 단점을 지워내게 해주는 고유 능력.
그가 여태까지 암살에 성공하며 살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유 능이었다.
눈앞에 생겨난 그림자 안으로 숨어든 그는 마력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지 파악했다.
‘바로 저곳!’
암왕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그러자 보인 건, 불꽃에 휩싸인 한 어린 고양이 수인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쾅!
암왕의 면상에 쇠사슬이 내리꽂혔다.
“…끄흑!”
그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쇠사슬 겉면에 서리가 맺힌다.
그대로 얼어붙은 쇠사슬이 다시 한번 그를 후려갈겼다.
꽈앙!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무기로 막은 순간 폭발이 났다.
단순한 폭발로 그치는 게 아닌,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관절 사이 사이가 얼어붙는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암왕은 침음을 삼키며 다시 그림자를 만들어내려 했다. 불꽃이 그림자가 하나도 생겨나지 않도록 층 전체를 환하게 비췄다.
라온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저 녀석은 그림자가 없어도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
암왕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너…… 나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그럼, 모르는데 시비를 걸었겠냐?”
암왕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막막함이 느껴진다.
내가 이러한 걸 느낀 적이 있던가.
‘……이미 수없이 느꼈다.’
암왕은 한 번도 쉽게 사냥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비록 저 정도로 어린 놈들에게 막막함을 느낀 건 처음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끝에 살아남는 건 그였다.
그렇기에 자신을 암왕이라 칭했고, 모두가 암왕이라 인정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적을 죽이고 살아남고야 말겠다.
암왕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림자가 마치 마력처럼 꿈틀거렸다.
“다들 2페이즈 준비.”
라온이 그리 말한 순간.
세상이 그림자에 뒤덮였다.
* * *
암살자들은 대체로 기사나 마법사보다 약한 편에 속했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강해지는 이들과 다르게, 암살자들에겐 교육이란 개념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실전.
극히 드물게 운이 좋은 이들은 늙은 암살자에게 기술을 전수 받거나 기술이 적힌 책을 발견해 그를 익히거나 했다.
암왕은 전자와 후자, 모두에 속해 있었다.
그는 고독(蠱毒) 출신이었다.
후계자를 원한 한 늙은 암살자가 만든 ‘장소’로, 암살자는 빈민촌에 보이는 싹수 어린 어린 이들을 모조리 집어넣엇다.
어린 시절의 암왕은 그렇게 암살자의 눈에 띄어 고독으로 끌려왔고.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한 번 배부르게 먹기 위해 고유 능력인 <그림자 창조>를 사용해 친구들과 선배들을 죽이고 죽였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아, 고독에서 빠져나온 그는, 늙은 암살자를 죽였다.
그 과정에서 늙은 암살자가 능숙하게 펼쳐 보이는 암기들을 모두 익힘으로써, 경지를 뛰어넘었다.
이후 그는 더한 힘을 원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을 죽였고, 이를 토대로 업을 쌓아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종래엔 천살성의 시선까지 받아 ‘암왕’이란 이름을 받았으니.
그리고 얻은 능력은.
어떤 암살자도 가지지 못한, ‘고유 영역’이었다.
‘고독’이란 이름을 붙인 공간이 아닌, 아예 독립된 공간을 창조해내는 고유 능력!
[고독에 입장하였습니다.]
근처가 새까맣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건, 라온을 포함한 이들뿐이었다.
암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창조>를 바탕으로 이 공간 전체를 그림자로 덮어버리는 능력.
‘헬레나는 안 끌려왔나?’
이대로라면 계획대로다.
윗층에 숨어 있다가 강제로 끌어내려진 펭수아가 덜덜 떨었다.
“아, 안 휩쓸릴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이건 계약 위반….”
“닥쳐.”
“옙….”
라온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암왕을 직접 상대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미리 수집해둔 정보들이 있었고, 부족했던 약점 등은 헬레나가 전달해준 고급 정보로 보완했다.
그중엔 이 공간에 대한 ‘추측’도 포함되어있었으니.
[나의 영역에 온 걸 환영한다.]
‘다행히 예상이 틀어 맞았군.’
[이곳은 모든 것이 나의 뜻에 따라 통제된다. 갈라져라!]
고독.
수십, 수백 마리의 독사를 집어넣고 한 마리가 살아남을 때까지 열리지 않는 지옥의 항아리.
절망과 분노, 그리고 본질적인 감정만이 떠도는 곳.
그 말은 즉.
[일정 치 이상의 부정적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반전 세계>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난 입을 열었다.
“반전 세계.”
그 순간.
세계가 반전되었다.
“……!!”
화아아아아악!
공간을 메우고 있던 새까만 그림자가 빛으로 변한다.
강제로 동료들을 먼 곳으로 보내던 힘이 사라지고.
절망과 분노가 가득하던 세상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오른다.
강제로 끄집어내진 암왕이 기겁했다.
“대체 어떻게 내 공간을……!”
“전원 공격 준비.”
난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방어는 무시하고 공격만 퍼부어. 오로지 죽이는 데만 집중해라.”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응.”
내 눈에서 뇌기가 튀었다.
“아주 잘.”
콰르르르릉!
벼락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암왕은 다급히 그림자를 만들어내어 피했지만, 그런 그의 머리를 노리고 창이 휘둘러졌다.
캉!
창이 쳐내지자 샤흐가 순간 중심을 잃었다. 그 틈을 타 암왕이 그녀의 목에 검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장검이 끼어들며 단검을 막아낸다.
아주 짧게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 서로의 무기가 수십 번 부딪혔다.
콰르르륵-
뒤로 살짝 밀려난 암왕의 발아래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이를 인지하고 물러나기 전, 무형의 기운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뒤이어 데자트의 검격이 그에게 쏘아지고.
“불기둥.”
스칼라의 술식이 완성되며, 시뻘건 불꽃이 그를 휘감았다.
암왕이 울부짖으며 불꽃 속에서 뛰쳐나왔다.
한 명이라도 보내기 위해, 가장 약해 보이는 스칼라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닿기 직전, 그의 사방에서 공간이 열리더니 쇠사슬이 튀어나와 팔다리를 묶었다.
“!!!”
그리고.
푸우욱!
샤흐의 창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크으으으!”
암왕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자신을 묶은 힘을 떨쳐냈다.
급히 뒤로 물러나 복부를 붙잡아 지혈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지혈하면 지혈할수록 피가 더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건…….’
뚫린 상처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자그마한 마력이. 마치 독처럼 몸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내 속성이…….’
이는 샤흐도 인지했다.
그녀의 속성은 근처의 환경에 따라 바뀐다.
즉, 지금 같은 상황에선 반전 세계를 이루는 마력의 속성을 따른다는 뜻이고.
그제야 그녀는 라온의 마력 속성을 알 수 있었다.
‘무(無)··· 혼돈(混沌)···?’
무엇이든 존재하고,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이 뒤섞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걸 파괴하고 삼키려 든다.
‘대체… 이걸 어떻게 체내에…?’
이 속성은 못 다룬다. 다루려 했다간 공주인 그녀마저도 파괴시키려 들 것이다.
방금도 가볍게 담았기에 망정이지, 더 오래 담고 있었다면 그녀의 무기가 부서질 수도 있었다.
“후욱, 후우….”
아주 잠시간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 상태에 돌입한다.
그 순간.
푹!
“크흡!”
암왕의 등에 검이 박혔다.
암왕은 다급히 검을 뒤로 그었다. 하지만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있던 인기척이 온데간데 없었다.
다시 느껴진 건, 바로 옆자리.
암왕의 검과 암살자의 검이 맞부딪혔다.
콰아아아아앙!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도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암왕은 독 때문에 흐릿한 눈을 어떻게든 부릅뜨며 정면을 쳐다보았다.
온몸이 피에 젖은 마스크를 쓴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너로구나……! 내 별을 앗아간 것이……!”
자신의 별을 앗아간 자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또한 지금 등에 박힌 검으로부터 올라온 고통에 이가 악물렸다.
암왕으로서, 등을 내어주었다는 건.
이는 곧 암살자로서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뒤를 노리고 죽여야 하는 암살자가, 역으로 뒤를 내어주고 당하는 것이었으니까.
라온은 갑자기 나타난 아벨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다 죽이고 왔다고……?”
말도 안 되는데?
그때, 옆에서 샤흐가 그를 불렀다.
“…라온. 하늘을 봐요.”
“?”
굳은 표정의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달이, 보여요.”
“그럼 달이 당연히…….”
난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현 반전 세계엔 달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왜…… 지금 내 눈앞에 달… 아니, ‘별’이 보이는 거지?
[우주의 존재를 처음으로 마주하였습니다.]
[천살성이 당신을 주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