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원래 남자 사이에선 ‘너를 달라’라는 말은 딱 두 가지 경우에 쓰인다.
하나는 악마가 영혼을 요구할 때, 또 하나는 그쪽 취향일 때.
“오해는 절대 안 하겠네….”
그리고 라온은 전자에 속해 있었다.
“똑바로 일 안 해?”
“히, 히익! 죄송합니다!”
라온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무릎 위에 앉은 스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면서 걸레질 한 번 안 해봤을 거 같은 펭수아는, 힐끔힐끔 둘의 눈치를 보며 식탁을 벅벅 닦았다.
라온은 아벨라에게 손짓했다.
“이제 요리해도 돼, 아벨라. 그리고 펭수아. 냉기 잘 조절해. 조금이라도 차갑다는 소리 나오면, 그날 넌 암왕이 아니라 내 손에 죽는다.”
“네, 네!”
암왕이 찾아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
그동안 펭수아와 지내야 하는데, 실수라도 해서 다치면 큰일나니 이 정도 경고는 필수였다.
“저….”
“?”
샤흐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나와 펭수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렇게… 험하게 다뤄도 괜찮은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고위 마법사인데…….”
“이렇게 해야 딴짓을 안 해.”
펭수아는 나 이외의 다른 유저와의 접점이 많았고, 꽤 중요한 캐릭 중 하나이다 보니 공략법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를 다루기 위해선,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고 통제해야 한다.
‘마법사’답게 괴짜이다 보니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변수를 통제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했다.
반드시.
“그래도….”
“사람마다 다뤄야 하는 방식이 달라. 누구는 스스로 자유 의지를 두어야 좋은 결과는 내는 반면에, 또 누군가는 뒤에서 누가 밀어야 좋은 결과를 내지. 자유가 완벽한 건 아니야.”
물론, 그렇다고 자유를 없애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덧붙인 말에, 샤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대견했다.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콧물과 눈물을 질질 짜며 훌쩍거리는 펭수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달래는 거야 쉬우니까.’
“펭수아.”
“예, 옙….”
“만약 일을 잘하면 선물을 하나 주지.”
“……?”
“냉기의 극의. 보고 싶지 않나? 네가 이 설산에서 찾는 거,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데.”
“……!”
극의. 마법의 끝. 모든 마법사가 닿고자 하는 경지.
현 대륙에서 이 경지에 닿은 이는 대마법사인 가주뿐. 다른 대마법사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만큼 높고도 위대한 경지를 보게 해준다는 말에, 펭수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어, 어떻게 당신이 그걸…….”
“마력 서약서라도 써줘?”
“써, 써주십시오!”
보통이라면, 목숨이 걸려 있으니 써달라고 못 할 텐데.
난 피식 웃으며 서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펭수아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아, 서약서를 어기면 내 마력이 모두 사라지니 이득이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이미 해봤다.
결과는 죽음.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간 몸뚱어리는 더 이상 신체로서 작동하지 못했다.
일반인으로 따지자면… 몸의 모든 영양소가 빠져나간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요리나 해와. X같은 얼음 가져오지 말고.”
“……예…….”
“아벨라, 넌 쉬어.”
그러니, 이제 진짜 노예도 생겼겠다.
그동안 잔뜩 부려 먹어야겠다.
&
“여기가 안 되어있잖아. 다시.”
다음 날, 난 곧바로 성을 보수했다.
이미 지금 이 성은 하나의 요새였다.
하지만, 언제나 빈틈은 있었다. 그래서 펭수아가 몇 번이고 공략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유저들이 찾아냈던 빈틈을 하나도 빠짐없이 메꿨다. 아티팩트들도 깔고, 그가 소중하게 아끼던 시약들까지 사용해서 정령들을 불러냈다.
“일단 1차 준비는 끝.”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만약 암왕 혼자 온다면 이걸로도 충분하지만, 아마 그는 혼자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그는 높은 확률로 암살자들을 끌고 정면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를 죽일 확률이 더 올라갈 뿐이지, 문제가 생기진 않으니까.
“헬레나.”
“음?”
“몬스터를 좀 끌고 와야 할 거 같은데.”
“난 사냥하는 데에 특화되어있다만.”
“이번에 새로 도전해봐. 너희는 내가 아까 시킨 거 하고 있어.”
샤흐와 데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은 무슨 역할을 하길래?”
“일부러 길을 만들어놓을 거야. 놈들의 동선을 유도하려고. 자, 가자.”
“……라온, 그대도 가나?”
“당연히 나도 가지.”
몬스터를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헬레나가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몬스터를 짓누르거나, 내가 쇠사슬을 날려 움직임을 묶었고, 나와 눈을 마주쳐 마력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몬스터들은 수준에 맞춰 층에 각기 집어넣었다. 날 통해서 끝없이 복구되는 마력으로 스칼라가 목줄을 채운 상태로.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찾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날, 암왕은 내게 죽는다.
아니.
정확히는, 아벨라에게 죽을 것이다.
* * *
밤이 되었다.
햇빛에 의해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가 대륙 전역을 뒤덮는다.
그리고, 암살자들이 각자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설산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두 모였나?”
“네.”
암살자 180명.
그중 상급 기사 수준에 이르는 자는 10명이나 되고, 나머지는 적당한 계기만 있다면 다음 경지로 넘어갈 수준의 인재들.
암왕은 씨익 웃으며,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얼음의 성을 가리켰다.
“전원, 돌격. 안에 있는 놈들 모두 죽여버려라. 여자든 남자든, 겁탈해도 좋다.”
“예!”
본래 암살자들은 모두 따로 움직이는 존재다.
하지만 암왕은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력하나, 인간의 욕망이란 힘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묶인 것이 곧 터질 순간까지 다가오고 있었고, 암왕은 이를 알고 그들의 야성을 폭발시켰다.
모든 암살자의 시선이 성에 닿은 순간.
키이이이잉!
“!!!”
“!!!”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고개를 퍼뜩 위로 들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네 마리의 새가 보인다.
한 암살자가 다급히 외쳤다.
“누, 눈보라의 지배자!”
그와 동시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암살자들이 눈보라에 휘말린다.
눈치 빠른 암살자들은 이미 그림자에 숨어들었으나, 다른 암살자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보라에 휩쓸렸다.
날아가는 암살자들의 목에서 선이 그어졌다.
핏! 피비빗-!
“무, 무슨…….”
곧이어 눈보라 속에서 몇 개의 희미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로지 눈보라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희귀 정령이자, 모든 생명체를 증오하여 죽이려 드는 악(惡) 성향의 정령.
저 정령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상급 기사는 되어야 하기에, 모두가 다급히 숨으려 들었으나.
“비, 빛이…….”
눈보라의 눈발들이 모두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코끼리 형태의 정령. 그가 밟고 선 눈은 모두 반짝 빛을 낸다.
딱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하위 정령이나, 지금 상황에선 상당히 위험한 존재였다.
스가아악!
한 암살자가 날린 검기에 정령이 짧은 단말마와 함께 역소환됐다.
뒤이어 여러 상급 기사 급의 암살자가 동시에 나서 정령들을 베어내자, 눈보라가 조금씩 그치기 시작했다.
암왕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성을 노려보았다.
‘도달하기 전에 힘을 빼겠다 이건가.’
전략 싸움인가.
암왕은 전략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략을 써서 싸운다는 건, 곧 힘이 부족함을 의미했으니.
전략 싸움에서 승리하는 건, 더 강한 힘을 가진 이다.
‘더한 힘을 보여주마.’
암왕은 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도약할 준비를 하고 두 다리에 힘을 준다.
그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
투쾅!
골렘들이 내던진 얼음 덩어리들이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꽂혔다.
암왕은 얼음 조각을 털며 성을 바라봤다.
성 바로 앞에 서 있는 수십 마리의 골렘이, 동시에 돌을 던질 자세를 취했다.
‘…생각보다 어려울 순 있겠어.’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마 지금 싸움은 그 어느 싸움보다도 험난한 싸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를 제외한 모든 암살자가 전멸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그일 것이다.
‘이걸로, 난 더 높은 곳에 닿는다.’
“전원.”
암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암살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돌진.”
* * *
달이 중천에 떠올랐을 때 즈음에서야, 라온이 미리 준비한 모든 함정이 돌파되었다.
암왕은 얼어붙은 자신의 팔을 미리 챙겨온 아티팩트로 녹였다.
마지막에 달에서 튀어나온 새 형태의 정령이 뿜어낸 얼음 숨결에 당한 여파.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하지만 충분한 건 그 혼자였던 모양이었다.
다른 암살자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으으으…….”
“허억, 허억, 허억……”
“후우… 후… 조금… 휴식을…”
촤아아악!
휴식이라 말한 암살자의 목이 베였다.
암왕이 피가 묻은 검을 털어내며 그들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쉬고 싶은 사람?”
“……우, 우와아아아!”
암살자들이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안정적으로 힘을 유지하는 건, 그와 상급 기사 수준의 실력자 10명.
모두 각자 세력을 이끄는 수장들로, 모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암왕을 죽이고 새로운 암왕이 되기 위해 힘을 아끼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한 번에 문을 박살냈다.
쿠워어어어어!
설산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울부짖으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준 낮은 암살자들은 기겁하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실력자들은 적당히 밟으며 다음 층으로 오른다.
그리고 암왕은 성의 겉면을 살폈다.
‘난 갈 수 있겠군.’
완숙한 경지, 그 이상에 오른 암왕만이 볼 수 있는 루트.
다만, 문제는 그림자가 전혀 지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스르륵-
그의 능력이 있다면, 그건 조금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암왕이 ‘생겨난’ 그림자에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스르륵.
수준 낮은 암살자들만 남은 층에, 아벨라가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단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짧게 빛났다.
그리고.
촤악! 촥!
눈 깜짝할 사이에, 암살자 모두의 목에 잘려 나갔다.
모두 목이 잘려 나가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으니.
“이, 개, 같은 년이….”
낮은 온도 때문에 피가 얼어붙어 늦게 죽은 암살자 몇 명을 제외하곤, 모두 한순간에 전멸했다.
남은 시체들은 몬스터들이 달려들며 우걱우걱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벌써부터 힘이….’
9층으로 구성된 얼음 성, 아니 요새의 1층에 묶인 수준의 암살자들은 말 그대로 고기 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놈들을 죽이는 데에만 벌써 힘이 드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다음은?
‘데자트 언니를 데리고 왔어야….’
아니. 아니다. 그녀는 떠오른 생각을 치워냈다.
자신은 혼자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홀로 그가 말한 ‘업’을 먹어 치워 성장할 수 있으니까.
꽈아악-
그녀는 단검을 꽉 쥐었다.
라온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스르르륵-
아벨라는 다음 층으로 넘어갔다.
2층에 역류된 몇몇 암살자들의 약점을 단숨에 파악한다.
그리고.
촤아아아아악!
빈틈을 내어주지 않고, 한 번에 베어냈다.
하지만 이번엔 모두를 전멸시키진 못했다.
한 암살자가 검을 막아내고 아벨라에게 역으로 검을 휘둘렀다.
둘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상대 암살자의 단검이 목에 닿기 직전, 아벨라의 눈에서 검은 빛이 번뜩였다.
그 순간, 공간 사이의 마력에 팔이 숨어들었다.
“뭣?!”
푹!
일부 신체만을 공간 도약시켜 급소를 노리는 기술.
목젖에 검이 박힌 암살자는 소리 없이 절명했다.
아벨라는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걸 느끼면서, 다음 층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세 명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가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상대방을 죽였다. 마지막에 상대방의 단검이 목에 닿을 뻔했지만, 라온이 준비해준 마스크 덕분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층.
“……대단하군. 설마 그런 어린 나이에 나와 비슷한 수준에 오를 줄이야. 너라면 나의 아이를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최소 중급 기사의 끝자락에 다다른 암살자와 검을 맞부딪혔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인지했다.
태생적인 신체의 한계에서 오는 차이와 서로가 쌓은 경험의 차이.
욕망으로 번뜩이는 두 눈이 너무나 기분이 나빴지만, 힘이 부족해 온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힘이…… 힘이 부족해……!’
더한 힘이 필요했다.
아벨라의 머릿속에 라온이 넘겨준 아티팩트가 떠올랐다.
라온을 떠올리고 입을 조금이라도 뻥긋거리는 순간, 신호가 가는 아티팩트.
하지만 그녀는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암왕이라는 절대적인 강자를 상대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여긴 내가 해내야 해.’
내가 죽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한 힘이 필요했다.
그 어떤 대가를 바치더라도!
그 순간, 천장을 뚫고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뭐-”
촤아아아악!
시뻘건 검기가 그의 목을 베어냈다.
붉은색. 아니, 핏빛의 검기가 그녀의 검에서 희미하게 번뜩인다.
아벨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전부 죽여. 전부 죽이고 먹어 치워. 모든 게 내 거야.
머릿속에 스며드는 목소리, 그리고 광증. 차오르는 살의.
‘이게… 천살성….’
그녀가 힘을 원하는 것을 듣고 시선을 준 것이다.
그 대가로 광증이 스며든다. 살의가 치솟는다.
머릿속에서 살의로 얼룩진 목소리와 거인이 남긴 말이 뒤섞였다.
[광증을 너무 이겨내려고 하지 말거라. 받아들이되, 다스려야 한다. 단단함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니.]
키야아아악!
그녀가 방심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핏빛이 번뜩이며, 몬스터들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마구잡이로 튄 피를 뒤집어 쓴 아벨라가 얼굴을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으…… 으…….”
손바닥으로 가려진 그녀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의 천살성이?”
암왕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