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대륙의 가장 높은 설산에는 한 전설이 있다.
한 왕자가 성 하나를 세우고 조용히 살고 있다는 전설.
“……그걸 퍼트린 게, 저기 사는 왕자병, 아니 마법사라는 이야기죠?”
“응.”
사실 말만 전설이지, 퍼진 지는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설이라 불리는 이유는, 마을이 워낙에 사람이 적고, 그 적은 사람에게 돈과 식량을 먹인 덕분이다.
오늘부로 그 전설은 끝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에 이야기가 안 통한다면.’
죽이고, 대역을 세우거나 내가 그를 연기하는 수밖에.
휘이이잉-
설산을 오를수록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거세지며 눈송이가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뽀각, 뽀각.
한 발자국 앞으로 내밀 때마다, 눈이 더 깊어진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스칼라가 꼬리와 귀를 파르르 떨었다.
묘족이라 그런지, 아니면 화 속성의 마법사라 그런지.
유독 추위에 약한 그녀는 날 애절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다… 녹이면 안 돼…?”
“조금만 참아.”
여기서 스칼라의 마력은 쓰기엔 아깝다.
“너희는 괜찮지?”
“네!”
“네. 눈 위를 걷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네요. 공주님도 괜찮죠?”
“응.”
“눈 위에서 걷는 훈련도 많이 했었지. 원래 이런 데에서 몬스터를 사냥해야 짜릿한….”
“닥쳐요, 좀.”
“알겠다.”
그럼 스칼라만 문제라 이거지.
난 몸이 반쯤 파묻힌 스칼라를 뽑았다.
마치 인형 뽑기에서 뽑히는 인형처럼 뽑힌 스칼라를, 데자트에게 넘겨주었다.
“자. 네가 목마 좀 태워.”
“넹. 어때요. 탈만 해요?”
“응… 근데 마력이 맛없어….”
“…제 마력은 깨끗하거든요?”
맛이 없다고 했지, 더럽다곤 안 했는데.
그래도 혼자 뭔가에 찔려서 말한 것 같아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샤흐가 의문 어린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그보다, 라온은 왜 눈 위를 안 걸어요?”
“난 마력을 못 쓴다니까.”
“아.”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난 마력을 못 쓴다.
사실 지금 상황에선 못 써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내 몸은 눈 따위에 파묻히지 않으니까.
“…눈이 녹네요?”
“마력이 많으면 이래.”
사실 나만 그런 거지만 말이다.
“그보다 모두 고개 들어. 슬슬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와…… 얼음으로 이루어진 성이…….”
“무슨 이런 설산에 성을… 왕국에나 세워질 것처럼 생겼네요.”
구름을 뚫고 높이 솟은 봉우리의 중간 즈음에 자리 잡은 얼음의 성을 말이다.
유X브 영상으로 많이 봤던 성인데, 이를 직접 두 눈으로 보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예쁘긴 더럽게 이쁘네.’
설산에 성이 있지만,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삐이이이-
하늘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헬레나가 검집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뭔…….”
하늘엔, 얼음으로 이루어진 새가 날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온몸이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신수(神獸)를 연상시켰으니.
“신수인가?”
“신수처럼 보이는 정령.”
난 손을 들었다.
순간 정령과 내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삐이이이…….
정령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다신 내려오지 않았다.
“…….”
“가자.”
원래라면 저 새를 치우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을 허비해야 하지만, 그건 내가 있으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웬만한 정령은 날 보자마자 도망치니까.
이걸로 난이도는 절반가량 낮아졌다고 무방하다.
그럼에도 내가 오지 않은 이유는.
‘얻을 게 없어서지.’
이런 설산에 세운 성 하나에 살고 있어서 모두가 얕보고 있지만.
저 왕자병 걸린 마법사는 상당히 돈이 많았다.
그만큼 좋은 아티팩트가 성에 가득 쌓여 있었고, 이는 내가 올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구냐? 감히 나의 왕국에 발을 들이려는 자들이.]
산기슭 바로 앞에 있는 얼어붙은 강에 멈춰 서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발로 얼음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손님. 문 열어라.”
[대체 어느 손님이 자기를 손님이라 칭한단 말이냐! 내 정령을 돌려보낸 건 훌륭하나, 그뿐이다. 다치고 싶지 않다면 물러서라!]
휘이이잉!
순간적으로 눈보라가 거세졌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걸로 경계심을 가지겠지만.
씨익.
“쟤 지금 쿨타임 걸렸다. 돌진.”
“네!”
파밧!
다른 유저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모두 꿰차고 있는 내겐 아니었다.
데자트가 정면으로 달린다. 눈 위를 뛰어다니는 특이한 보법에 마법사가 기겁한다.
[무슨!]
원래라면 이런 설산에서 냉기 마법사와 싸우는 건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끝없이 다시 차오르는 냉기와 넘쳐나는 대기의 마력.
이곳은 곧 냉기 마법사들의 영역과 다름없었으니.
‘우리한텐 아니지만.’
“샤흐.”
“네.”
샤흐가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엘프 공주로서 근처의 환경에 따라 속성이 변경한다.
즉 지금 그녀는 냉기 마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말도 안 돼……!]
다급히 마법사가 마법을 캐스팅했다. 얼음의 벽이 정면에 세워지며 동선을 방해한다.
하지만 샤흐가 손을 내저은 순간, 얼음의 벽이 허물어졌다.
[!!!]
정면에서 캐스팅한 마법과 멀리서 캐스팅한 마법의 위력은 다르다.
하지만 여기가 설산인데다가 눈앞의 마법사의 ‘고위’ 마법사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멀리서 캐스팅한 마법이라고 한들 쉽게 파훼할 수 없었다.
이는 샤흐의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음을 의미했으니.
마법사가 다급히 수많은 마법을 캐스팅한다. 많은 장애물이 나타나 앞길을 방해했지만, 우리에게 닿기 전에 샤흐의 손짓에 막혀 사라진다.
쿠워어어어!
결국 마지막에 나타난 건, 샤흐의 마법으론 한 번에 없앨 수 없는 거대한 얼음 골렘.
[나의 왕국에 발을 들이는 건 허락하지 않-!]
“스칼라.”
“응.”
지금이다.
스칼라의 꼬리 끝으로부터 불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꽃이 그대로 얼음 골렘을 녹여버린다.
하지만 불꽃은 그에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미친 듯이 몸집을 부풀렸다.
쿠우우우우……!
“싸그리 태워버려.”
불꽃의 새가 강림했다.
사라진 얼음의 정령만큼이나 강렬한 불꽃의 새!
마법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우릴 불렀다.
[……저, 저 잠시만요? 저희 잠시 이야기를…….]
“10초 준다. 나한테 당장 날아와.”
[전 펭귄 수인이라고요! 펭귄은 못 날아요!]
“얼음 날개라도 만들어와.”
난 스칼라에게 턱짓했다.
스칼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불꽃 새의 크기를 더 키웠다.
결국 펭귄 마법사가 엉엉 울며 항복 선언을 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원하는 건 다 드릴 테니, 그 불꽃 새는 좀 치워주십시오!]
“정말 다 줄 거지?”
[예, 예! 물론입니다!]
“그럼 널 내놔.”
[……네?]
* * *
냉기 마법사는 펭귄 수인답게 굉장히 귀여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뒤뚱거리는 발걸음과 살짝 툭 튀어나온 뱃살,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외모까지.
‘귀엽다.’
‘귀엽네.’
‘귀엽군.’
그리고 그는 덜덜 떨며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둘의 외형 차이 때문일까, 그 모습이 유독 라온이 악독하게 보였다.
‘저러니까 마왕 같아…….’
회색 머리카락에 살벌한 눈매까지.
상당히 잘생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나, 지금 분위기 때문에 그가 유독 못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 그래서 제 성에는 무슨 일로….”
“널 도와주러 왔다.”
“?”
펭귄 수인이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왕좌에 앉은 라온이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라온의 쇠사슬이 절그럭 소리를 냈다.
“힉! 죄, 죄송합니다!”
‘너무 못되게 보여….’
‘분명 우린 좋은 짓 하려고 온 건데….’
…아닌가?
“암왕이 곧 널 죽이러 올 거다.”
“예?!”
펭귄 수인이 펄쩍 뛰었다.
못 난다고 한 것치곤 상당한 점프력이었다.
“어, 어째서 이 몸, 아니 저를……!”
“네가 만만했나 보지.”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암왕은 강자 사냥만 한다고 알려진 놈! 그런 놈이 절 노린다는 건, 제가 인정할만한 강자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상당히 기뻐 보였다. 그 모습이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암왕에게 노려진 게 그리 기쁜가?
두려워해야 정상 아닌가?
‘좀 정신 상태가 이상한 거 같죠?’
‘응… 조금….’
‘자존심은 클수록 좋은 거지.’
“후후,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암왕 같은 암살자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슴을 쭉 펴며 외쳤다.
“이 펭수리나버스리아의 마법이라면, 아무리 암왕이 강하다고 한들, 저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오.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말이죠…….”
그는 잔뜩 신이 난 채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들이 듣기에도 질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꽤 방대하고 철저한 계획이었다.
왜 여기에 찾아왔다고 알 것 같다고 생각이 들 때 즈음, 라온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
“그렇……! ……그런데 제가 왜 이리 설명을?”
“펭수아야.”
“예? 전 펭수리나버스리아…….”
“수아야.”
“페, 펭은 제 성….”
“‘아’야.”
“펴,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그럼 펭고기야.”
“저, 전 사람입니다, 사람!”
“됐고 일 하나만 하자.”
“뭐, 뭡니까?”
“도전장을 보내라.”
라온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던졌다.
두 손으로 종이를 잡은 펭귄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누, 누구에게 도전장을….”
“암왕에게.”
라온이 씨익 웃었다. 그 미소는 마왕의 것처럼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너에게 도전한다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펭수아는 눈을 까뒤집은 채로 기절했다. 물론 스칼라가 불을 내뿜자마자 1초 만에 정신을 차렸지만 말이다.
* * *
현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자는 누구인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묶인 게 많은 가주?
혹은 대륙을 통치하는 황제?
수많은 이들이 강자들을 위험 요소로 꼽으나, 그중 누구나 인정하는 위험한 자가 있다.
“내게 편지가 왔다고?”
“예.”
암왕(暗王) 바스트리아.
마약촌의 주인이자, 뒷세계의 왕이라 불리는 범죄자들의 지배자.
본래라면 후계자에게 죽음을 맞이했어야 하나, 나비 효과로 살아남은 그는 날아온 도전장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근래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직접 도전장을 보낼 줄이야. 뭘 믿고 내게 도전장을 내민 것 같으냐?”
“그, 그건 저도 잘….”
얼음 요새의 주인인 펭수리나버스리아. 그는 암왕 같은 암살자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설산이라는 위험도가 높은 지리에 자리 잡은 성, 앞길을 가로막는 정령과 수많은 얼음 마법, 인조 생명체.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몸을 얼어붙게 하는 성의 특수 능력까지.
‘이놈을 뚫어서 죽인다면, 어떤 변수가 있던 죽일 수 있다.’
현재 그의 최종 목표는 라온 리그벨토.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탓에 쫓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어디서 비명횡사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치를 알게 되는 순간, 죽이러 찾아가리라.
그러기 위해선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강자 사냥을 통한 업 수집과 경험을.
“모든 암살자를 소집하라.”
암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방진 놈을 죽이러 간다.”
그의 입가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절대로 자신이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지어진 미소.
이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은,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