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스가아아악!
정면에서 치솟은 붉은 검기가 돌덩어리들을 베어낸다.
반으로 갈라진 돌덩어리들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암살자에 의해 또다시 잘려 나갔다. 잘린 조각들이 정면으로 내질러진 광범위한 창기에 휩쓸려 사라졌다.
차마 없애지 못한 조각들은 마차를 둘러싼 불꽃에 닿아 재가 되어버렸다.
‘훌륭하도다.’
거인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래도 나름 업을 쌓은 이들이라 진심으로 날렸거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돌덩이들을 없앨 줄이야.
‘인간 종족도 겨우 두 명이고.’
저들을 이끄는 리더는 인간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저런 몸뚱이에 저 정도의 마력을 담고 있으려면 인간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마 인간을 닮은 어느 종족이겠지.
그것만으로도 거인에겐 합격점이었다.
인간을 혐오하는 그로선, 그냥 인간을 보기만 해도 화가 들끓었으니까.
‘마녀시어. 저들의 방문을 허락합니까?’
거인이 자신의 주인에게 허락을 요청한다.
마녀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거인의 얼굴이 묘해졌다.
‘…한 번 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 번 더. 아주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의문이 들긴 하지만, 거인은 군말 없이 명령에 따랐다.
그의 주인인 마녀는 세상을 관조하고, 독창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자.
그런 위대한 자의 말이니, 무슨 뜻이 있겠지. 감히 자신 같은 일개 거인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쿠구우우.
육중한 몸집을 움직여 다시 돌덩이를 쥔다. 작은 산 하나가 통째로 소멸했다.
으드득!
산을 이룬 묵직한 돌덩이가 손에서 으스러졌다.
거인이 투척 자세를 취했다.
다른 거인들보다도 몸도 크고, 유독 팔다리가 긴 그는 뭔갈 던지는 걸 잘했다.
마녀에게 목숨을 구원받고 난 후로 그가 맡은 역할은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막아내고, 들어올 자격이 있는 이를 걸러내는 것.
만일 이번에도 저들이 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면.
‘너희는 충분히 들어갈 자격이 있다.’
그때엔 그의 태도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불청객일 뿐이나, 이러한 시련을 이겨낸 그들은 초대를 받고 찾아온 ‘손님’이었으니까.
우드득!
팔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쭉 내뻗어졌다. 저 밑에서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리더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회색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
[막아내보거라-!]
쐐애애애애애액!
그의 손에서 돌덩이가 내던져진 순간.
다시 돌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아까보다도 더 작으나, 그만큼 많은 양!
영혼에서 투기가 느껴지는 붉은 머리의 인간이 검기를 크게 뽑아내며 돌덩이들을 베어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두 암살자가 나타나 돌덩이를 더 잘게 자르고, 밑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남은 조각들을 태워낸다.
하지만, 아무리 셋이 선전한다고 한들 한계가 뚜렷했다.
‘과연 이걸 막아낼 수 있을까?’
만약 저 리더가 나선다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남자가 가진 마력은 거인을 훨씬 상회하는바. 단순히 양만 따진다면, ‘극의’에 이른 이보다 더 많은 것 같으니.
하지만 저 남자는 나서지 않았다. 마치 뭔갈 기다리듯이. 그저 마차를 모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동자를 보아도 전혀 읽을 수 없는 회색빛만 가득했다.
“으으으….”
거인의 귓가에 소녀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앓는 소리와 함께 더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부스러기들을 막아낸다.
힘이 드는 듯, 안색까지 창백해진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주 잠깐, 남자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저 모습을 본 거인은 그가 나서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슬슬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걸 본다면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거인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뭘 얻기 위해서 저러는가?
이히히힝!
결국 돌덩이 하나가 그들에게 닿았다. 말 한 마리가 돌에 얻어맞아 목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차의 바퀴가 꼬이기 직전.
말을 옆으로 치운 남자는 말을 대신해서 마차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의 동료들이 당황한 듯 무어라 외치지만, 남자는 고개를 내젓고 말과 속도를 맞추며 달리기 시작했다.
[……!]
저렇게까지 해서 멈추지 않는다고?
그 순간, 거인의 뇌리에 한 가지 구절이 떠올랐다.
그의 동족이 한참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고대에 전해지던 구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내게 닿는 이에겐 나의 축복이 있을 지어니.」
살면서 처음으로 마녀를 만나고자 하는 이가 저 구절대로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면, 마녀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고대를 지배하던 왕(王)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위대한 존재인 마녀만이 내릴 수 있는 축복.
분명 이 시대엔 기억하는 이가 남아있지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쿠구구!
[!]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급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분명 속도는 느려졌으나, 한 번도 멈추지 않은 마차가 어느새 그의 발치 끝자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색 눈과 거인의 눈이 마주친다.
[……!]
거인은 더한 소름을 느꼈다.
분명 아까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고 느꼈는데, 가까이서 보고서야 알았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가진 열망이 너무나도 거대해, 그 그림자에 모든 게 가려져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의지인가……!’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목숨까지 불사지를 수 있는 의지.
인간을 위대한 위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던 단 하나의 신이 내린 축복.
거대한 육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은 거인을 멸족까지 몰아넣은 인간의 힘이었다.
“거인 아쿠루샤.”
[……어떻게 내 진명을…….]
잔뜩 충혈되어 붉어진 흰자 때문에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회색 눈이 그를 응시한다.
“인제 그만 문을 열어라. 너의 역할은 끝났으니.”
[……아니. 아직은…….]
「그만.」
[!]
동시에 들린 목소리에 거인과 라온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귀로 들리기보다는 머릿속에 문장이 ‘새겨진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느낌.
마치 신의 목소리를 영접한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거인에겐 신을 영접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녀시어…!]
「너는 할 일을 다했다, 아쿠루샤. 문을 열어주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웬만한 산맥을 움켜쥐어도 남을 듯한 거대한 손이 허공, 아니 ‘문’을 쥔다.
으드드드득……!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아, 이제는 완전히 굳게 닫힌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가 힐끔 보이기 시작하자, 스칼라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마력에 예민한 마법사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
그리고, 문에서 튀어나온 보랏빛이 그들을 덮쳤다.
* * *
잠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난 본능적으로 몸 상태를 점검했다. 방금 뿜어져 나온 보랏빛은 순간적으로 가주를 떠올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혹여나 영향을 받았다면…….
“일부러 신경 써서 초대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목소리에 몸 상태를 점검하기를 그만두고 고개를 올렸다.
완전히 되돌아와 뚜렷해진 시야에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자연과 동조된 듯한 나무줄기와 넝쿨로 가득한 방 안에 놓여진 나무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은 여인.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을 덮은 여인, 아니 마녀가 날 보며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아니,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뭐지? 난 원래 봤던 것과 다른 반응에 잠시 당황했다.
마녀가 모든 걸 읽으며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건 알고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세계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반응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이건 마치…….
“여전히 그 어두운 심연에선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
게임에서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마녀가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네 소망은 이게 다냐? 죽은 후에 무덤에 묻히고 누군가가 꽃을 올려주는 거라니…… 참으로 초라하구나.”
‘네 소망은 이게 다냐? 죽은 후에 무덤에 묻히고 누군가가 꽃을 올려주는 거라니…… 참으로 초라하구나.’
“안쓰럽도다. 어두운 앞길을 걸어야만 하는 그대의 앞길이.”
‘안쓰럽도다. 어두운 앞길을 걸어야만 하는 그대의 앞길이.’
게임에서의 대사와 지금 그녀가 내뱉는 대사가 겹친다.
대체… 어떻게?
“그대가 만난 ‘나’ 또한 ‘나’. 비록 그대가 체험한 세계의 나는 지금의 나를 읽지 못하나, 지금의 나는 당신이 체험한 세계의 ‘나’를 읽을 수 있죠.”
“…어려운 말이군요.”
“네. 저조차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니, 이해합니다. 잠시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그대의 동료들은 모두 적당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있으니 안심하시길.”
그녀는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마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습니다. 당신도 저에게 궁금한 게 많을 거고요.”
“…예. 맞습니다.”
“우선 저부터 질문을 해도 될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덮은 책을 옆의 책상에 올려놓은 그녀는 의자를 끌어 나와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까지 온 무지갯빛 눈동자가 날 꿰뚫었다.
“당신의, 그 소망엔 가까워졌나요?”
“…….”
지금의 그녀는 모든 사실을 안다. 저 무지갯빛 눈동자는 나의 과거, 그리고 현재, 또한 과거라 해야 할지 현재라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대까지 모두 통찰하고 있었으니.
아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직 확신은 없군요.”
“예. 뭐든지 확신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
“좋은 습관이에요. 맞아요. 지금의 당신은 수백, 아니 수천… 세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길’들의 앞에 서 있어요. 숨 한 번 내쉴 때마다, 말을 한 번 할 때마다, 수많은 길이 사라지고 새로이 생겨나죠. 적어도 지금의 당신은 절대 길을 확신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왔고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나에게 다가온 자여. 그대는 내게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녀는 내 양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지금 당신의 앞에 놓인 길 중 70%는 파멸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는 시작이 될 수도, 중간이 될 수도, 끝이 될 수도 있죠.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그대로 그 길은 당신에게 파멸을 선고할 것입니다.”
“…….”
“전 그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도와드리죠.”
“어째서입니까? 왜 저를 그렇게 도와주시려는 거죠?”
“전 당신의 끝이 행복하길 원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라온에게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다니.
아니. 이건 ‘라온’을 향한 행복이 아니다.
이건…….
“그대에게 축복을 내리죠.”
‘나’.
그녀가 행복한 끝을 맞이하길 원한다하는 이는, 내가 빙의한 라온 리그벨토가 아닌.
온전한 ‘나’였다.
[<창세의 마녀>가 내린 축복이 몸에 스며듭니다.]
[축복: ???]
창세(創世).
‘고대’보다도 더 오래 전, 세상 자체가 탄생했을 때를 지칭하는 단어.
이는 마녀는 종족조차 구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의미했으니.
“지금 당신은 나머지 30%의 길로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세요. 조금의 실수로, 70% 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의 몸이 흐릿해지고, 무지개가 사라지는 게 보인다.
그녀와의 만남이 곧 끝남을 의미한다는 이야기.
“이제 당신은 나가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마녀는 흐릿해진 손을 올렸다.
“제가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세계의 기준으로 48시간. 그 안에 많은 걸 얻고 가야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흐릿한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주는 것만으로도, 저흰 너무나 감사한걸요.”
‘저흰?’
“이런. 시간이 다 됐군요.”
내 의문에 대해 물을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완전히 흐릿해진다.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마녀가 빙긋 웃었다.
“부디 그대의 끝에 광휘가 있길.”
시야가 아득해졌다.
* * *
“도련님! 도련님!”
“라온! 괜찮아요?!”
“라온! 정신 차려봐!”
다시 눈을 뜨고 나니, 아까 보았던 익숙한 하늘이 보였다.
난 내게 달라붙은 애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적당히 떼어냈다.
머리와 몸이 상쾌했다. 그 어느 때보다, 근심 걱정도, 모든 피로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래. 지금 나는 길을 잘 걷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정해져 있다.
확신을 가질 순 없으나, 자신감은 가져야 한다.
그래야 발을 삐끗하지 않고, 제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터이니.
“마녀는 잘 만났어요?”
“응. 덕분에 내 계획을 확신할 수 있게 됐어.”
“확신?”
“어. 암왕을 제대로 죽이는 방법.”
암살자 주제에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지키는 암왕의 성격을 철저히 이용한다.
그가 어느 강자를 사냥할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정확히 알 필요도 없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지.’
내가 어느 강자와 함께 있던.
그렇다면, 이를 이용한다. 그리고 찾아온 암왕을 죽여버린다.
우리 중 누구도 다치지 않고.
완벽하게.
그러기 위해선 모두가 강해져야 한다.
당연히 모두엔 나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쿵, 쿵, 쿵.
[드디어 일어났군.]
거인이 어깨에 거대한 뱀을 걸친 채 나타났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거인 아쿠루샤.”
[……?]
난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당신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남은 시간은 48시간.
이 안에 모든 걸 뽑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