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얘도 성장 속도가 미쳤네.’
설마 창을 한 번 내지르는 정도에 나무들이 날아갈 정도라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히 ‘벽’을 넘겼다.
‘다만 문제는…… 헬레나도 예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건데.’
헬레나는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지만, 빗겨냈고, 크게 데미지를 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격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대처 능력과 막아내고도 멀쩡한 신체 능력.
그리고 아벨라를 완벽히 압도하는 실력.
“호오… 이거 대단하군.”
최소 상급 기사의 완숙한 경지… 혹은 그 직전.
화르르륵!
뒤이어 뿜어진 스칼라의 불꽃이 헬레나를 덮쳤다.
서걱!
공기가 베이며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샤흐가 탁 트인 길 사이로 뛰어든다.
둘의 몸이 각자의 마력에 휘감겼다. 불꽃 속에서 엘프와 인간의 창과 검이 마구 뒤섞였다.
콰가가강!
둘이 부딪히는 여파만으로 불꽃이 걷혔다.
헬레나는 자신과 무기를 맞대는 상대를 보며 투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창술… 이 정도의 정교한 창술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는 누구인가?”
“알아서 뭐 하게?”
“그저 친우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고 싶은 사람일 뿐일세.”
“저흰 이걸 ‘무례’라고 부르기로 했… 어요!”
콰아아앙!
둘의 기운이 충돌하며 크게 폭발했다. 서로의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칼라의 불꽃이 그녀를 덮친다.
헬레나의 검이 화려한 움직임을 보였다.검로에 따라 불꽃의 움직임이 의도대로 움직였다.
검로를 따라 움직이던 불꽃이 그대로 호수에 다이빙했다.)
“뭔….”
데자트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나도 동의한다.
무슨 검사가 마법을 저런 방식으로 파훼하냐?
“이익…!”
화르르륵!
약이 오른 듯, 스칼라가 꼬리를 삐쭉 세운 채 마력을 잔뜩 방출했다.
뿜어진 마력은 조금의 낭비 하나 없이, 모두 스칼라에게 복종했다.
주홍빛 하늘 아래로 붉게 타오르는 불덩이 수십 개가 떠오른다.
“파이어 레인….”
‘어우, 네이밍 센스 구려.’
난 속으로 말을 삼켰다. 하지만 구린 네이밍 센스와 별개로 저 마법이 대단한 건 맞았다.
최소 중위 마법사 정도는 되어야 다룰 수 있는 건데, 단순히 다루는 걸 넘어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
즉. 지금 그녀는 중위 마법사 중에서도 꽤 상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보아하니 아직 10살도 안 된 거 같은데…… 이 정도의 마법이라니.”
살갗이 익어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헬레나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아주 좋은 친구를 두었군!”
저거 진짜 좀 이상해.
쾅!!
스칼라는 듣기 싫다는 듯, 불덩이들을 그녀에게 쏘아냈다.
헬레나는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날아드는 불덩이 하나하나를 베어냈다.
“왜 힘을 숨기고 있는 거지? 안에서 다른 열기가 느껴지네. 하지만 숨기고 있군. 어서 힘을 모두 드러내!”
콰아아아앙!
빈틈을 노린 불덩이가 정확히 그녀의 몸뚱어리에 꽂혔다.
하지만 불꽃은 그녀를 태우지 못하고 금세 꺼졌다.
오히려 부족하다는 듯, 헬레나가 마력으로 불꽃들을 더 키운다.
스칼라는 살짝 창백해진 안색으로 말했다.
“호조사가 저거 미친년 아니냐는데….”
“내가 봐도 좀 그래.”
“스칼라. 불 좀.”
“응….”
그 사이, 힘을 완전히 회복한 샤흐가 투창 자세를 잡았다.
창이 불꽃에 휘감긴다.
본인의 마력까지 더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창을 집어던졌다.
“흡-!”
쐐애애애액!
“그래! 와라!”
헬레나, 저 미친년은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창을 받아냈다.
콰그으으으으윽!
그녀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단순한 충격파로 바로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나무들이 싸그리 뿌리째 날아갔다.
하지만 헬레나는 맨몸으로 받아낸 채로, 두 손에서 흐르는 피를 흩뿌리며 외쳤다.
“그래! 이런 전투를 원했다! 이렇게 서로 사정을 봐주지 않고 싸우는!”
“광전사 아닌가? 저 사람 생긴 거 보면 귀족 같은데… 정신이 아픈 거 아니에요? 왜 신전에 안 갔지?”
“그러게.”
누가 보면 평생 싸움 한 번 못하고 죽은 줄 알겠다.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데자트에게 손짓했다.
“가자.”
“넵.”
“드디어 둘이 나서-”
데자트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그림자 밟기로 도약했다.
도약한 그녀가 대검을 휘둘렀다. 익숙하지 않다고 했던 주제에 대검을 다루는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쾅!!
“…크읍.”
검신으로 후려쳤건만, 헬레나는 꽤 큰 데미지를 받은 듯해 보였다. 짧게 마른 기침을 토해낸 그녀가 뒤로 쭉 밀린다.
촤르르르륵!
“!!!”
쇠사슬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쏘아졌다. 헬레나가 내 쇠사슬을 베어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으나, 검 정도로는 내 쇠사슬을 끊을 수 없었다. 또한 처음부터 쇠사슬로 그녀를 공격할 목적이 아니었다.
휘리릭!
“무슨…!”
쇠사슬이 검을 단단히 휘감는다.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걸 느낀 듯, 검이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을 냈다.
난 엄청난 저항력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와, 무슨 명검이야?’
명검이란 한 대장장이가 이때까지 자신이 쌓은 모든 업을 불어넣어 만든 검을 말한다.
최소 중반부 이후에나 만질 수 있는, 꽤 귀한 아이템인데도, 벌써 그녀의 손에 들어가 있다니.
‘지금의 강함도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투성이군.’
이러다 얼굴에 주름 생기는 건 아닌지 몰라.
평온하거나 예측 가능한 성격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강자를 보고 달려드는 성격이라면 괜히 골치만 아팠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닌가.
‘밸런스 패치 진짜 똑바로 안 하나….’
난 혀를 차면서 우선 헬레나를 제압할 계획을 짰다.
데자트가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헬레나의 허리춤에서 짧게 빛이 번뜩이며 새로운 검이 뽑혔다.
카가강!
두 상급 기사의 검이 연신 부딪혔다. 아까 샤흐와 부딪힌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과 속도.
난 둘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히 속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데자트의 속도가 그녀를 앞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빈틈!’
촤르르륵!
정확히 빈틈을 노리고 휘둘러진 쇠사슬이 그녀의 허점을 노렸다.
잠시간 뒤로 쭉 뻗어진 다리.
팔이나 검이 아닌 다리가 노려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그녀가 크게 휘청거렸고, 난 뒤에서 일어선 샤흐에게 말했다.
“한 방 더. 할 수 있지?”
“후으으… 진짜 하기 싫은데….”
샤흐는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이라는 걸 보여주듯, 그녀에게 느껴지는 마력을 티끌까지 끌어모아 창끝으로 집중한다.
헬레나는 더이상 장난치지 않겠다는 듯, 웃음기를 싹 지운 표정으로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데자트도 샤흐를 도울 모양인지, 뒤로 물러난 채 검에 마력을 모으던 상태.
‘지금이다.’
모두의 시선과 정신이 앞에 집중됐다.
지금이 바로 내가 바라던 타이밍이었다.
“아벨라.”
“네…!”
<그림자 도약>.
팟!
“일단 좀.”
아벨라의 도움으로 다시 그녀의 뒤로 도약한 난, 드러난 헬레나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잠 좀 자라.”
콰아아아앙!
뒤통수를 가격당한 헬레나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안 죽었겠지?”
너무 세게 쳤나?
* * *
“음, 손바닥이 맵군. 그동안 훈련한 게 이 발경인가?”
“아닌데.”
다행히 죽진 않았다. 얼굴 뼈도 부러지거나 하지도 않았고, 안면이 크게 움푹 파이거나 멍이 들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뒤통수에 큰 혹이 나고, 쌍코피가 터진 탓에 휴지를 꽂고 있었을 뿐.
‘겨우 저 정도만 다친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살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힘을 실어서 친 건데, 저 정도 데미지라니.
이래서 나 같은 허약한 마법사는 먹고 살겠나.
난 투덜거리면서 그녀가 가져온 차(커피맛이었다)를 입에 털었다.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아벨라가 내민 손수건으로 입가를 쓱 닦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날 왜 찾아왔다고?”
“그대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졌거든.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소문이. 대체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해서, 직접 찾아왔다네.”
“아카데미는?”
“내게 성적이란 숫자에 불가하지.”
‘땡땡이쳤구만.’
‘땡땡이네요.’
‘무슨 귀족이 땡땡이를….’
우리들이 굉장히 불경한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잠시간 손을 꼼지락거리며 무언갈 느끼던 그녀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문은 실제보다 못하군. 소문보다도 훨씬 강해. 자네를 찾아오길 잘했어.”
“네 예상보다 훨씬 강하냐?”
“그래. 설마 이 정도 경지에 다다를 줄은 몰랐는데…. 자네. 나와 약혼을 맺을 생각은 없나?”
“없어.”
아벨라와 스칼라는 ‘약혼’이라는 단어에 깜짝 놀랐다.
난 둘에게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 됐고, 내일 바로 주리남을 벗어날 준비 끝내둬. 할 일이 많으니까.”
“네. 네? 네, 네.”
“그래서 이제 볼 일을 다 봤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 할 일이 아직 남았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단 내 무례를 사과하지.”
“이런 거 필요 없….”
“난 누군가에게 크게 사과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죄를 갚아야 할지 모르네. 그러니, 일단 내가 가진 것 중에 이것들을 주지.”
헬레나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난 슬쩍 보따리 안에 담긴 금화를 확인했다.
‘미친. 백금화가 섞여 있잖아?’
얼마나 돈이 많으면….
“피, 필요 없거든요?”
“저흴 이런 거에 넘어가는 속세에 찌든 사람으로 보신 거예요?”
“그런가?”
애들의 강력한 거부 반응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었다.
쿵!
이번엔 아까보다 더 묵직한 소리.
난 슬쩍 안을 살폈다. 이번에는 백금화가 금화 사이에 섞여 있지 않았다. 백금화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건…”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해보라 배웠네. 진심으로 사과하지.”
‘애가 착한 애였구만.’
애가 좀 돌아서 그렇지.
난 애들의 상태를 살폈다. 모두 크게 다친 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아벨라. 그냥 받아.”
“그럴까요?”
“어. 계속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 김에 후딱 받아먹는 수밖에.
혹시 다시 가지고 갈까 아벨라는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고, 금화 주머니를 아공간 안에 넣은 난 그녀를 바라봤다.
“또 바라는 게 뭐지?”
“이미 말했다시피…….”
“그거 말고.”
헬레나가 픽 웃었다.
“설마 알아차렸나? 내 속마음을?”
“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
“사실 그대를 흠모…….”
“지랄.”
“장난일세.”
그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날 그대의 파티에 합류시켜주게.”
“이미 가득 찼어.”
“어떤 일이든 상관없네. 짐꾼이든, 요리 담당으로든. 조금의 돈도 대우도 바라지 않을 테니 데리고만 다녀주게.”
만약 거절한다면, 안에 있는 파티원을 밀어내서라도 끼어들겠다는 의지!
난 한숨이 나오는 걸 참았다.
사실 그녀가 끼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내 통제 범위 안에 들어오니, 그게 훨씬 낫긴 했다.
다만 문제는.
아벨라와 스칼라.
저 둘이 잔뜩 대놓고 헬레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내게 뭐라 할까 싶어서 그런 건가 싶기엔, 경계심이 좀 다른 방향이었다.
‘설마…… 내가 이 둘을 빼고 얘를 끼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