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물론 그렇다고 내 목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혹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지금의 나는 마약을 탐내어 찾아온 라온 리그벨토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왕이 되면? 네겐 뭐가 남지?”
내 의심에 요한이 웃어 보였다.
“물론, 당신에게 모든 걸 주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오. 은총은 내가 직접 유통하는 건 내가 하고 싶소. 안타깝게도 나는 왕이 될 대목이 아닌지라. 그대같이 뛰어난 이가 오기만을 기다렸소.”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겠다 이거군.’
하지만 사람에 따라 매력적이라고 느껴질 만도 했다. 마약으로 세워진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이미 마약은 제국 전역에 스며들었다. 뿌리째 뽑는다고 한들, 수요자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현 제일 큰 수요자들은, 범죄자가 아닌 귀족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월광초를 태우는 것.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었다.
‘일단은 속아 넘어 가줄까.’
지금의 나는 야망 넘치는 귀족 자제다. 힘은 충분하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용기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똑똑하지는 않은.
미리 정해놓은 캐릭터 컨셉에 따라, 허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군.”
요한이 날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린 서로에게 모든 걸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 드는 상황이었다.
지금부터 눈치싸움의 시작이었다.
* * *
“그보다 같이 온 여인들, 모두 용모가 아름답던데. 동료들입니까?”
“내 애인들이지.”
저택으로 돌아온 후. 슬쩍 욕망을 보이는 요한의 눈에 데자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데자트가 순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이전에 내가 어떤 짓을 하던 알아서 장단을 맞추라고 했었기 때문에, 데자트는 얼굴을 붉히며 눈치껏 연기했다.
“그, 그… 여기서 그리 말씀하시면 부끄러운….”
“저 아이들도 말이오?”
“다들 성인이거든.”
“분명히 7살이라고…….”
“그대는 적이 한 모든 말을 믿나?”
“내가 너무 곧이곧대며 받아들였구려.”
그는 내가 거부감을 보이자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응당 훌륭한 남자라면 여러 여자를 데리고 다닐 줄 알아야 하오. 가장 위대한 자리에 오를 왕이, 여러 배우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면 더 이상하지.”
“그보다 여러 여인을 두는 데에 거부감이 없어 보이는군.”
“열등한 씨앗보다는 훌륭한 씨앗이 퍼지는 게 훨씬 나으니 말이오. 열등한 종자의 씨앗은 퍼질 이유가 없지. 우리가 세울 왕국에는 당신처럼 훌륭한 씨앗만이 남을 것이오.”
리그벨토 혈통의 힘을 모르네. 우린 방계를 만들고 싶어도 쉽게 못 만드는데 말이지.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그냥 웃어주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지.”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요한이 멀어지자, 데자트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 양반, 사제 맞아요?”
“맞긴 한데, 좀 달라.”
믿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해야 하나.
나름 신앙심은 투철한 거 같은데 말이지.
사실 뭐가 됐던 나랑은 별 상관이 없었다.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데자트와 달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동자를 굴리는 애들을 쳐다봤다.
“방금 말은 어쩔 수 없어서 한 거니까 그냥 잊어. 굳이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야.”
“…붙어 다닐까요?”
“샤흐는 붙어 다니고, 나머지는 여기에 있어. 너무 우르르 데리고 다니면 곤란하니까.”
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샤흐에게 손을 내밀었다.
“샤흐. 가자.”
“…네.”
샤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 * *
요한 간돌프가 통치하는 영지 <간돌프> 도시는 꽤 큰 크기였다.
하지만 건물과 나무의 숫자가 비슷할 정도로 나무가 많았고, 인프라가 조성되어있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채 도로를 걷던 샤흐가 코를 막았다.
“으으… 냄새가….”
“냄새가 왜?”
“엄청 탁해요…….”
샤흐는 질색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나무가… 마치 생기를 머금고 자라난 게 아니라… 꼭 약을 찌들며 자라난 거 같아요.”
그 정도인가?
“공기에는?”
“공기는… 멀쩡해요.”
“공기까지 개판이었으면 어떡하나 했네. 그래도 다들 돌아가면 마스크 쓰고 다녀. 나무가 좀 이상한 거 말곤 다 괜찮아?”
“……되게 애매하긴 한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도마뱀 냄새…? 지난번에 만난 지룡과 비슷한 냄새가 나요.”
“지룡?”
“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정순한 걸 보면… 높은 존재 같아요.”
지룡보다 높다라…….
‘진짜 용의 아종인가?’
지룡은 이름만 용이지, 실제로는 그냥 지렁이다. 용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뱀인 이무기조차 되지 못한 놈이다.
하지만, 실제론 이무기만큼이나 용에 가까운 존재들이 있다.
해종룡이라던가, 와이번이라던가, 폭풍룡이라던가, 천룡이라던가…….
‘그게 왜 여기에?’
그들은 용이란 이름답게 상당히 강력했다. 웬만한 플레이어는 레이드에 도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난이도!
최소 중반부 이후, 그것도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나올 법한 녀석이지만…….
‘이미 그런 건 의미가 없어졌다.’
중반부가 지나야 ‘갑자기 용이 탄생했다!’도 아니고, 그냥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니.
지금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
‘안 될 거 같은데.’
현재 내 스펙은 어찌어찌 되더라도 나머지가 문제다. 데자트는 나와 합을 맞출 만했지만, 나머지는 전투를 시작하는 순간 즉사할 게 뻔했다.
“정확해?”
“정확한 건 아니에요. 다만 숲에서는 이런 게 전혀 안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숲에서 벗어난 지금, 뚜렷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숲을 지배하고 있다?”
“네. 아마도….”
“성격은?”
“좀 포악한 거 같은데….”
그래서 이때까지 요한이 안전할 수 있던 건가?
찾아오는 적을 모조리 없애서?
‘그럼 나는 왜 건드리지 않은 거지?’
만약 용에 가까운 존재라면, 내가 마력이 무식하게 많을 뿐이지, 다룰 수는 없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짐승과 신수들의 왕, 신에 가장 가까운 완벽한 생명체인 용(龍)에 가깝다면 천리안 혹은 혜안 정도는 가졌을 테니.
더군다나 포악한 성격이라면, 절대 나 같은 이방인의 접근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는 건.
‘나설 수 없는 상태인가?’
혹은.
‘숲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그냥 근처에 사는 건가?’
뭐든 확실하지 않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외지의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주리남은 라온 리그벨토와는 전혀 엮일 가능성이 없던 도시이자 이벤트.
다른 캐릭들도 대부분 아카데미에 묶여 있을 시간대였으니.
‘어쩌면 요한과 거래 관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도 대비를 해야겠지.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할 만하다.
난 날 올려다보는 샤흐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샤흐.”
“?”
“이제부터 좀 끔찍한 걸 볼 거야. 괜찮겠어?”
“……네. 이미, 모두 각오했어요.”
“날 원망해도 좋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좋아. 그럼 마법 좀 써줘.”
보조 마법을 쓸 수 없는 날 대신하여, 샤흐가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사용한다.
이미 우릴 따라오던 미행은 따돌린 지 오래다.
‘내가 하는 것보단 부족하겠지만.’
경지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그 직전까진 도달했으니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기척이 지워진 걸 느낀 나는 샤흐의 손을 잡은 채 이동했다.
인적이 드물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향하자, 마약에 취한 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모습은 마치 좀비와도 같았다. 생기 없는 눈동자와 힘없이 축 늘어진 팔, 입에서 질질 흐르는 입까지.
난 충격에 짧게 경악하는 샤흐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낡은 공장 같은 폐건물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가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직접 주도하면서 이끄는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두꺼운 문이 굉음과 함께 쿵! 닫혔다.
창문 틈 사이로 바라보자.
짜악! 짝!
“다들 똑바로 움직여!”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놈에게 오늘 밥은 없다! 하지만 잘하는 놈에겐 포상을 주겠다!”
“거기 쓰러진 놈! 저리 치워!”
거기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탈을 쓴 노예와 지배자만 존재할 뿐.
잔뜩 야윈 시체 한 구가 쓰레기처럼 대충 구석으로 치워지는 것을 본 샤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말도 안 돼…….”
“왕이라면 이런 어두운 면을 볼 줄 알아야 해. 나라에 제대로 된 법도, 규칙도, 힘이 없다면 이런 건 계속 나타날 거니까. 넌 앞으로 몇백 년간 나라를 다스리게 될 거야. 개체수가 적은 엘프라고 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사실 난 알고 있다. 이종족 전쟁 이후, 엘프는. 아니, 정확히는 유일하게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왕’은 모든 종족을 다스리게 된다.
그녀는 왕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녀에게 이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성군이 되길 원했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그녀를 왕으로 만들어주리라.
“어때?”
“……밑바닥이 이런 곳이군요…….”
“맞아.”
“……이런 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네가 강해져야지.”
왕은 모든 것이 능해야 했다. 지력이든, 무력이든.
강한 왕은 백성을 보살피고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힘이 없는 왕은 모든 책임을 지고 욕을 먹는 역할밖에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말해줘. 왜 넌 창을 쓰지 않지?”
“!”
내 말에 샤흐가 놀란 듯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았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저에겐. 자격이 없어요.”
“무슨 자격?”
“전… 데자트를 잃을 뻔했어요. 자신의 호위 기사도 지키지 못할 공주에게, 창을 들 자격 따위….”
“호위 기사는 널 지키기 위해 있는 역할인데. 왜 네가 지키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하지만 아버지, 아니 폐하께서….”
“개소리하지 말라 그래.”
“!!!”
“네 역할을 잊지 마라, 공주. 넌 공주야. 네가 호위 기사를 지키는 게 아니라, 호위 기사가 널 지키는 거라고.”
난 흠칫 떠는 샤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내가 살려왔잖아.”
“……!”
“그러니까 그냥 써. 그런 거에 묶이지 말고.”
하여간, 그 늙은이. 쓸데없는 가스라이팅만 해놔서.
“…….”
난 혀를 쯧 차며 샤흐에게서 시선을 뗐다. 잠시간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잠시간 건물을 훑었다.
‘여기가 제작 공장.’
마약이 만들어지는 장소다. 마약이 자라나는 곳을 불태운다고 해도, 이런 장소에 마약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 태울 거라면 이곳도 태워야 했다.
“가자. 아직 둘러볼 곳이 많아.”
“…네.”
뒤이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장소를 총 세 군데 발견했다.
나머지는 더 없는 걸 확인했고.
‘창고는 없나. 바로바로 만드는 모양이군.’
하긴 그게 제일 품질이 좋긴 하다. 만드는 즉시 팔려나가니 재고 처리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파악은 전부 끝났다.’
그렇다면 내일. 여길 싹 다 불태운다.
요한에겐 시간을 더 주어선 안 됐다.
내 약점을 알 수 있는 시간만 더 제공하는 꼴이었으니.
‘아직 나도 그놈의 전력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요한의 무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실제로 요한을 죽여본 유저가 직접 말한 말이고, 사냥당하는 장면을 봤으니 가질 수 있는 확신이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변수가 문제이긴 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내겐 자신이 있었다.
용에 가까운 존재가 찾아온다고 한들.
살아남는 걸 넘어서, 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이.
오늘 밤이라는 짧은 시간만 있다면 말이다.
* * *
그리고 다음 날 밤.
유독 달이 강한 날, 그가 다시 날 찾아왔다.
“이야기할 게 있어서 찾아왔소.”
“무슨 일이지?”
“일단 따라오시오.”
날 다급히 재촉한 요한이 날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곳엔.
한 왕좌가 놓여 있었다.
“이건?”
“그대가 앉을 자리오. 왕이라면 응당 자신의 왕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이리 빨리?
그는 지금 내 힘이 얼마나 되는지, 세력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나선다는 건…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건데.
“좀 수상하군. 왜 이리 빨리 나를 신용하고 모든 걸 내어주려는 거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응?”
“솔직히 말하겠소. 당신의 뒷조사를 했소.”
“무슨 조사?”
“그대가 쌓은 인맥과 힘, 그리고 위치까지.”
“아주 별걸 다 파헤쳤군.”
“군주로 모실 이를 한 번 보았다고 생각해주시오.”
난 이 정도면 의심을 거두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거두고, 왕좌를 바라봤다. 달빛이 내리쬐는 장소에 놓인 왕자는 어느 것보다 위대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내가 앉을 자리라… 여기에 앉는다면, 내가 왕이 되는 건가?”
“요한 간돌프가 새로운 왕을 뵈오.”
요한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난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
저벅, 저벅.
왕자에 다가갔다. 여전히 찬란히 빛나는 왕좌다. 난 왕좌의 손잡이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대의 제안을 바로 받지는 않겠어. 내가 그대를 뭘 믿고? 하지만 성의를 봐서 한 번 앉아보는 보지.”
그리 말하며 난 왕좌에 앉았다. 순간 요한이 씨익 웃음 짓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 유물의 힘이 어떤지 알게 되었다.
마력이 쭉 빨아들이고 독을 주입하여 노예로 만든다. 이는 본래 가진 저항력을 무시했다.
마력은 다시 차오르려는 성질이 있다. 다시 채우기 위해 대기의 마력을 흡수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이는 이를 이용해 체내 깊숙한 곳까지 독을 집어넣어 뒤섞이게 만들었다.
절대로 빠지지 않을 독!
이런 걸 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다고?
‘유물이군.’
왜 저리 당당하게 나설 수 있나 했더니, 이걸 믿은 모양이다.
“어떠하오?”
“나쁘지 않군.”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내 쪽엔 유물이 두 개나 있다.
신으로 추앙받는 천마의 갑주.
그리고 내 쇠사슬까지.
쩌저저적-!
천갑과 쇠사슬의 저항에 왕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요한의 표정이 굳었다.
“왕으로서 첫 번째 법을 만들겠다.”
난 그를 내려다보며 턱을 괴었다.
“마약 유통의 유통을 금하며, 유통한 이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
“법에 따라, 마약을 유통한 요한 간돌프. 너를 처형한다.”
“……분명히 대마법사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래. 난 대마법사가 아니지. 하지만, 아쉽게도 자네가 아는 정보가 전부는 아니야. 유물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야.”
“……!”
어느샌가 갑주처럼 변한 천갑이와 쇠사슬을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하지만 금세 눈가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입가가 서늘함을 담은 채 휘어졌다.
“……그래도 빨리 알아차려서 다행이군. 덕분에 손해는 보지 않게 되었어. 좋소. 그대가 강한 건 인정하겠소. 설마, 대마법사 직전의 실력자에게까지 통하는 그 유물을 버텨낼 줄이야. 하지만.”
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달이 움직였다.
…아니. 달이 아니었다.
달과 착각할 정도로, 온몸이 은빛으로 뒤덮인 고귀한 생명체.
용(龍). 아니, 용에 누구보다 가까운 생명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우웅-!
바람과 함께, 은빛의 뱀이 하늘에 멈춰 선다. 오만한 빛이 감도는 파충류의 동공이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요한 간돌프. 우리의 거래는 끝난 지 얼마 안 되었거늘.]
“새로운 거래요. 저자를 죽이시오.”
그가 날 힐끔 쳐다봤다.
[……흠. 강한 인간이로군. 이때까지 네가 지급한 대금으로는 양이 맞지 않겠는데?]
“3톤을 드리겠소.”
[오호라. 그 정도를 지급한다라. 그만큼 급한가 보구나, 인간. 좋다! 받아주겠다! 하지만 명심해라. 한 달 이내로 지급하지 않는다면, 넌 죽는다.]
설마 마약으로 용, 아니 이무기와 거래를 한 거야?
어이가 없네.
“마약 중독자 이무기라… 이건 좀 참신한데.”
“아무리 그대가 강하다고 한들 용을 이길 순 없소.”
“그래. 용은 못 이기지. 하지만, 저놈 같은 가짜 용을 못 이기진 않아.”
[입을 조심해라, 인간. 고통 없이 가고 싶다면.]
“그건 내가 하고픈 말인데.”
나 또한 손을 들었다.
“얘들아.”
스르륵-!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샤흐와 데자트, 아벨라와 스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완전히 전투 무방을 한 채로.
난 천갑이의 형태를 온몸을 두른 코트 형태로 바꾸면서, 쇠사슬을 길게 잡았다.
“샤흐. 내가 하나 더 가르쳐주지.”
촤르르륵-
“왕이 제일 잘해야 하는 건, 아군을 잘 두는 거야. 무능한 아군이야말로 위험한 적이 없어.”
난 이무기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그걸 보여줄게.”
동시에, 이무기가 내게 입을 쩍 벌렸다.
<브레스>
콰아아아아앙!
은빛의 광선이 내게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