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마약왕. 범죄자들이 요한 게돌프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요한 게돌프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서, 그는 이 이름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 같은 놈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범죄자라면 모를까. 나는 엄연히 공작가 ‘리그벨토’ 가문의 직계였다.
비록 계승권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후계자 경쟁이 끝나지 않은 이상 내 위치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내가 요한 간돌프의 정체를 안다는 건. 곧 공작가에서, 혹은 황실에서도 그를 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현재 요한 간돌프가 마약왕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예우를 먼저 갖추시오.”
켄타우로스는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저걸 내가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난 그에게 압박감을 더했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반마(半馬)야. 네 떨어진 하체를 다시 찾아서 붙여버리기 전에 불러와. 아니면 하체 없이 살아볼래? 어떻게 될지 나 좀 궁금한데.”
켄타우로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티는 나지 않지만, 그가 살살 화가 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무례하군.”
“무례를 범하는 건 너고. 내가 누구인진 알아?”
“라온 리그벨토. 리그벨토 가문의 직계.”
“그래. 아주 잘 아네. 그런데 안 불러와?”
“이 영지에선 누구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소.”
켄타우로스가 창을 꺼내 들었다. 중국 신화에서 나올 법한 언월도. 이야, 비싼 거 쓰네.
“여기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힘. 그대처럼 강해 보이지 않는 이가 감히 내게 명령을 내릴 순 없소.”
강해 보이지 않아? 내가?
“푸하하핫! 아하핫!”
뒤에서 데자트가 폭소를 터트렸다.
얼마나 웃겼던 것인지, 아예 바닥에 드러누울 정도였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 너무 웃기잖아요. 우리 스칼라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것 같은 놈이 힘을 운운한다니.”
“응… 약한 놈이… 더해….”
“……무어라?”
켄타우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기사지?”
“그렇소.”
“아닌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봐. 너 기사가 아니라 투구걸이지? 이거 걸어놓는 용도.”
내가 머리를 툭툭 두들기자,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자기 머리가 멍청하다는 건 아는 모양이다.
“……자꾸 나를 모욕하려 드는데. 난 백작 각하께 직접 기사 직위를 받은 자. 그대 같은 이가 날 무시한다고 한들, 내 명예는 사라지지 않소.”
“그래. 그건 맞지. 그래서, 안 비키겠다 이거지?”
“이미 말했다시피, 충분한 성의를 보인다면 그대를 백작 각하에게 인도를…….”
난 더 듣지 않고 쇠사슬을 휘둘렀다. 벼락처럼 휘둘러진 쇠사슬이 켄타우로스를 후려갈겼다. 비명을 지른 켄타우로스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이전에 스칼라의 불꽃이 쏘아지는 게 더 빨랐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아아악!”
하체에 불이 붙은 켄타우로스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진 켄타우로스는 고개만 들어 분노 어린 눈빛으로 스칼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스칼라의 불꽃을 본 순간, 핏발 선 눈이 그대로 풀려버렸다.
‘매혹!’
여우불의 고유 능력.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홀리고 정신 방어를 무너트린다.
이는 분노로 가득 찬 켄타우로스의 머릿속조차 풀어버렸으니.
으직!
“끄아아아악!”
난 그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 엉망이 된 다리를 짓밟았다.
아마 뒤늦게 치료받는다고 한들, 이전처럼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난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뺨을 툭툭 두들겼다.
“말아, 말아.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어? 너, 저 애도 못 이겨. 저 애 올해로 7살이다?”
“날… 이렇게 만들고도 괜찮을 것 같소…? 백작 각하께서 알면 너 따위는……!”
[닥쳐라.]
그 순간, 켄타우로스에게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품 안에 들고 있던 수정구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켄타우로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배, 백작 각하.”
[멍청한 것. 귀중한 손님이니 잘 모시라고 하였거늘. 마약으로 뇌가 절여지더니, 이젠 지능도 없어진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멍청해질 만도 하지. 마약에 찌들어있으면 지능이 남아있는 것도 용한데. 아니, 애초에 지능을 기대하는 게 어불성설 아닌가?”
[무례에 사과드리오, 라온 리그벨토.]
“미안하면 찾아와.”
난 담배처럼 보이는 걸 입에 물었다. 물론 담배는 아니다. 다만, 수정구로 이곳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내게 어느 정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무는 가짜 담배였다.
“이 숲이 싸그리 타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금방 찾아가겠소.]
그 말과 함께 수정구의 빛이 잦아들었다.
켄타우로스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덜덜 떨었다.
난 데자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죽여.”
“넹.”
퍽!
켄타우로스의 머리가 박살났다. 멍청한 기사에게 어울리는 말로였다.
이히힝!
“오, 빨리도 왔군.”
말소리와 함께 마차가 다가온다.
이내 마차에서 한 사내가 내렸다. 근처엔 여러 거구의 호위 기사를 대동한 채였다.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사제복처럼 보이는 옷을 걸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냥 봤을 때는 백작이 아니라 사제라고 오해할 수준이었다.
“마약왕답게 생기지 않았군.”
내가 직설적으로 말하자, 잠시간 요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떠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답게 금세 굳었던 표정을 풀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띈 채 내게 말했다.
“칭찬에 감사드리오. 신께서 내게 내리신 은총이지.”
“그래서. 마지막 준비는 됐나?”
“……무슨 소리신지?”
“죽고 나서 가족한테 재산을 나눠줄 준비.”
스릉! 캉!
내 말에 호위 기사들이 무기를 뽑았다. 쏟아지는 적의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너희가 날 죽일 순 있을 것 같아?”
“어디서 당신을 보낸 것이오? 황실에서 보낸 것이오? 아니면 공작가에서?”
“글쎄. 어디일 거 같아?”
난 여유롭게 웃었다.
화르륵-
내 등 뒤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불꽃을 일으킨 스칼라가 말없이 그들을 노려본다.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데자트가 그들을 훑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 죽어요.”
“……!”
“……!”
상급 기사에 오른 그녀의 기세는 결코 호위 기사들 따위가 감당할 것이 아니었다.
부들부들 떨며 쓰러지려는 그들에게 요한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나와 계속 눈을 맞출 뿐이다.
“응? 내가 어디서 왔을 것 같냐니까?”
“……본 적 없는 기사와 마법사구려.”
“당연히 없지. 우린 비밀리에 운영되는 기사단….”
“그대는 황실, 공작가, 그 어느 곳에서도 보낸 사람이 아니군.”
오, 어떻게 알았지?
“무슨 근거로?”
“그대의 호위 기사들은 분명 강력하오. 하지만 낭비가 심해. 정녕 그들이 보냈다면, 당신 같은 수준의 실력자 한 명만을 보내어 말없이 불태웠겠지. 날 굳이 불러낸 이유가 있는 것 아니오?”
“눈치가 빠르군.”
난 만족스럽다는 듯 손뼉을 짝짝 쳤다. 요한은 손을 들었다. 뒤이어 호위 기사들이 마차에서 두 상자를 들고나왔다.
“내가 좋은 손님을 보고 착각할 뻔했군. 이건 사죄의 선물이오. 최상품이지.”
“감사히 받지.”
난 내가 끌고 온 마차에 상자를 실었다. 내 태도에 요한이 조금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마차를 단단히 봉쇄하고, 그를 보며 말했다.
“어디 앉을 데 없나? 영 허리가 뻐근하네.”
“좋은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소.”
* * *
요한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그가 내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나는 그의 목줄을 쥐고 있다. 나 하나 정도는 이 도시 전체의 전력을 끌어모아 잡을 수 있다고 해도, 만약에라도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황실에서 직접 나설 것이다.
아니. 설령 새어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내가 소리소문없이 죽기만 해도 직계의 죽음을 알아내기 위해 리그벨토 가문에서 나설 것이다.
이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직계의 권한을 모두 되찾은 상태이니.
“저택이 아주 화려하군.”
“신의 은총 덕분이오.”
요한은 독실한 신자였다.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말끝마다 신의 은총을 달고 살았다.
이는 그가 주로 파는 마약들에도 붙이길 망설이지 않았으니.
“이 가루들이 보이오? 이는 모두 신이 내린 은총이며, 신이 직접 점지한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싹 다 개소리다. 신이 내린 은총은 개뿔이, 신은 아마 저 요한을 싫어할 것이다.
그가 저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이 영지의 특이점 때문이었다.
다른 곳보다 유독 보름달의 힘이 강해지는 지역. 이는 달빛을 머금고 자라나는 마약초들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튼튼하게 자라나게 해주었으니.
“질이 좋군.”
“당연하오. 시장에 유통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거거든.”
난 마약이 담긴 봉투를 뒤로 던졌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그럼?”
“재배하는 걸 직접 보고 싶은데.”
과연 보여줄까? 재배하는 걸 직접 보여준다는 건, 곧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수틀려서 불이라도 지른다면, 그는 재개하는 데에 몇 년을 허비해야 했다.
“직접 좀 보자.”
“얼마든지.”
하지만 그는 기꺼이 날 받아들였다. 너무 흔쾌히 수락해서 내가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오늘 밤 직접 인도해주겠소. 단, 혼자 와야 하오.”
“얼마든지.”
그는 밤이 되자, 날 어느 곳으로 인도했다.
이 영지의 가장 높은 산. 꼭대기 근처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낸 탓이, 가림막 하나 없이 달빛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약들의 원재료는 월광초(月光草). 성스럽다고 알려진 풀이나, 재배하고 사용하는 것에 따라서 독한 마약이 될 수 있다.
그는 월광초가 자라나는 곳을 등진 채, 내게 양팔을 벌렸다.
“환영하오. 내 나라에 온 것을.”
* * *
“……나라?”
“그렇소.”
“여긴 제국의 영지일 텐데.”
“지금은 그렇소.”
그는 월광초 사이 사이를 걸었다.
이제 막 달빛을 모두 머금고 기지개를 핀 월광초 하나를 뽑는다. 요한은 월광초를 보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너무 방대하오. 다른 왕국들은 너무나 나약하지.”
“그래서?”
“그래서 난, 내 강력한 왕국을 새로이 세우기로 했소. 이 신의 은총들을 가지고.”
요한의 투명한 눈동자가 날 지그시 응시했다.
“그대는 이 마약들을 바라고 온 것일 테지. 좋소. 기꺼이 주겠소. 그대에게 이 마약들을 관리할 수 있는 힘을 주고자 하오.”
“내게 뭘 바라는 거지?”
“이 제국은 그대를 담기엔 너무나도 부족하지. 그대를 내가 세우고자 하는 나라의 왕으로 세우고 싶소.”
난 빠르게 그가 날 어떻게 보는지 알아차렸다. 나를 아주 야망 넘치는 이로 보는 것이다.
하기야. 지금 나에 대한 소문은 사교계에 널리 퍼져있다고 했다.
나무만 볼 줄 아는 이들은 나를 그저 포기한 사람으로 취급하겠지만, 숲을 볼 줄 아는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직계의 권한을 포기했다? 이는 다른 직계에게 붙거나, 새로이 세력을 키워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괜히 도전했다가 실패하여 시체가 되는 것보다는 뱀의 머리, 혹은 용의 몸통을 노리는 게 나으니.
‘벨 리그벨토’라는 후계자가 굳건한 이상. ‘라온 리그벨토’가 내린 선택은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니리라- 오히려 지금의 수치를 감수하고 미래를 보고자 한다고 볼 수 있을 터.
뱀 같이 교활한 자인 요한은 이를 캐치한 것이다.
물론 전부 다 착각이었지만.
“돈은 이미 넘쳐나오. 개돼지들이 미친 듯이 마약을 사들이는 덕분이지. 마약은 신이 내린 선물이오. 겨우 이런 가루 하나가 인간의 뇌를 망가트리고 정신을 흐트러트린다니. 이게 선물이 아니면 뭐겠소?”
“그래서?”
“내 손을 잡으시오.”
요한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제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함께 신의 은총으로 가득한 나라를 만듭시다.”
난 깨달았다. 그는 지금 마약을 둘러대기 위해 신을 꺼내드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다 진심.
그는 다른 의미로 독실한 신자(信者)이자 광신도(狂信徒)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