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망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03화 (103/124)

제103화

난 그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좀 꼬였군.’

이전에 협약을 맺었을 때 한 이야기랑 지금 하는 이야기랑 다르다.

그땐 분명히 성녀에 대한 언급도 없었고. 신전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즉.

‘용사 파티에 대한 정보가 열리면서, 이 녀석의 기억도 건드려졌다는 이야기인데.’

다르게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서 재의 영웅의 기억이 건드려진다는 이야기 아닌가.

‘심각한데.’

보통은 정보에 대해 말하지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알지 못하거나 락이 걸려 있어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기억이 건드려졌다.’

즉.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개입하여 기억을 건드릴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재의 영웅이 주는 정보가 세계에 의해 조작되었는지, 조작되지 않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이게 죽은 자의 말로인가?

죽은 자는 세계로부터 존재가 귀속된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한들, 본래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아 흐름을 거슬렀으니, 세계는 이를 내버려 두는 대신에 꼭두각시로 둔다.

죽는 순간 힘을 각성하여 되살아난 이가 극의에 다다른 경우는 있지만, 반대로 죽음을 맞이한 후로 극의에 다다른 이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그야말로 끝을 의미해야만 한다.

[신전이…… 그냥 가만히 있다고? 얌전히?]

“그래.”

[내가 활동할 때만 해도 뭘 하던 지랄 하던 새끼들이……!]

한참을 분노하던 재의 영웅이 숨을 골랐다.

“예전에는 어땠는데?”

[그들은 방대한 힘을 바탕으로 온갖 대륙의 정세에 개입하고, 멋대로 주무를 정도로 막무가내이나 그만큼 강한 놈들이었다. 게다가 어느 한 곳에 거점을 두지 않아 반란 같은 게 일어날 수조차 없었지. 내가 배신당해 죽을 때만 해도 용사에게 멋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정도였단 말이다.]

“그냥 용사가 병신인 거 같은데.”

[닥쳐라!]

용사가 병신인 걸 인정하면, 병신에게 배신당해 죽은 꼴이 되어서 그런 건지 사납게 반응했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재의 영웅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찌 신전이 그리 얌전할 수 있는지…… 힘을 숨기고 있나? 아니면…….]

“아니면?”

[누가… 신전의 업을 앗아갔나?]

업을 뺏는 건 가능한 일이다. 다른 가문을 흡수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그런 짓을 할만한 이들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황실.

그들은 위대한 업을 쌓아 공작가보다도 윗 반열에 섰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업을 쌓았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만약 그게 신전의 업을 앗아간 거라면?

아니, 신전뿐만 아니라 수많은 강대국의 업을 흡수한 거라면?

“할만한 놈들이 있긴 하지.”

[그게 누구……!]

“제국의 황실에서나 그런 짓을 하겠지.”

압도적이진 않으나, 엄연히 공작가의 우위에 서 있는 제국의 지배자.

그들이 정말로 용사들의 후손이라면.

“아무래도 이 대륙은 망할 모양이다.”

아무리 나라도, 황실이 직접 나서서 사고를 친다면 막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걸 막겠는가.

심지어 시스템이 직접 예고할 수준이라면, 작정하고 치는 사고일 텐데.

내가 싸그리 죽여버리지 않는 한, 막는 건 요긴한 일이다.

설령 전부 죽여서 막는다고 해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사고이고 말이다.

“골 때리네.”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담배가 마려웠다.

[아니… 그래서 내 복수는….]

“닥쳐, 이 무능한 놈아. 기억이나 건드려지는 놈이 어딜 씨부려. 입 닥치고 있어.”

[…….]

* * *

결국 소득 하나 없이 에이드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은 빠르게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던 복도는 하인, 하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래층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어이 거기! 아직 먼지가 남아있지 않나! 제대로 청소하게!”

“겨우 며칠 쉬었다고 전부 감을 다 잃은 거야?! 빨리 움직여!”

게다가 다들 실직 위기를 벗어나서 그런가, 다들 힘들기는 해도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아, 참. 라온 공자.’

‘?’

‘저희 가문의 사용인들이 모두 라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브루아이의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왠지 가슴이 간지러웠다. 피부가 간지러운 게 아니었다. 보다 안쪽이 간지러운 느낌.

‘왜 이래 이거?’

난 처음 느끼는 기분에 가슴을 문지르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내가 다가가자 알아서 다들 숙덕거리더니 길을 턴다.

신기한 건, 그 누구도 내게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라온이 좋아하겠군.’

모두에게 미움과 혐오, 경멸을 받던 라온이다. 내가 빙의한 이후로는 복도에서 감히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하녀들은 없어졌지만, 그 시선 안에는 지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감히 내게 그런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긍정적인 감정을 보내면 보냈지, 부정적인 감정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탁!

어린 하녀 한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시만요!”

“?”

“얘! 비키렴! 길을 막으면 어떡해!”

“하, 하지만…… 서, 선물을 꼭 드리고 싶어서!”

선물?

난 하녀의 작은 손에 쥐어진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직접 포장이라도 한 듯 엉성한 포장지.

그녀의 교육을 담당하는 이로 보이는 하녀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 달려와 어린 하녀를 붙잡았다.

“얘! 뭐 하는 거니! 공자님께 무례하게……!”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

난 그녀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고맙구나. 아주 좋은 선물이야.”

“! 저, 정말요?”

“그럼.”

난 주머니 안을 뒤적거렸다.

호조사의 전투에서 물건들이 거의 다 타버린 탓에 텅 비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에게 줄 간식 정도는 남아있었다.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그만한 걸 주어야겠지. 자. 선물이란다.”

“와!”

기뻐하며 간식을 받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아직 컨셉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미소를 지우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 열심히 하렴.”

“네에…!”

“그쪽들도 열심히 하고.”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감사? 왜 감사하다는 거지.

영문 모를 감사 인사를 받고 나니, 또 가슴이 간지러웠다.

안에 모기라도 물었나.

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누르는 채로 빠른 발걸음으로 브루아이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라온입니다.”

“들어오셔도 좋아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꼬리가 아주 귀에 걸린 채 일을 하는 브루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럼요!”

브루아이는 드물게 높은 톤으로 말했다.

“공자께서 마력 포식자를 빠르게 잡아주신 덕분에, 손해는 최소화하고 이익은 최대화할 수 있었어요. 지금 자리에서 다시 감사 인사를 올릴게요. 정말 감사드려요, 공자.”

“제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죠.”

“아니에요. 공자께선 이렇게까지 빨리 일을 처리할 의무가 없으셨어요. 게다가 재봉인이 아닌 완전 제거라니. 저흰 요청한 것 이상으로 받았습니다.”

브루아이는 처리하던 서류를 내밀었다.

“이 서류에는 본래 공자께 드릴 보상이 적혀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보상은 가문으로 갈 예정이었어요.”

“그렇군요.”

“그러니, 전 서류를 하나 더 처리하려고 합니다.”

탁!

브루아이는 서류 위에 서류 한 장을 더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고 빈칸이 가득한 종이. 그녀가 미소 지었다.

“여기에 원하는 모든 걸 적어주세요.”

“……모든 걸 말씀이십니까?”

“네. 저희 가문의 힘이 닿는 끝까지, 모든 걸 돕겠습니다. 아. 혹시 말하지만 반란 같은 건 안 돼요.”

웃음기 섞인 말투에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상 이상이다.’

보상을 따로 챙겨주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나설 줄은 몰랐다.

하긴. 마력 포식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이 세워진 초기부터 내려온 의무이자 무게이니, 그걸 없애준 값으로 이 정도는 내어주어야 한다는 거겠지.

원한다면 더 받아낼 순 있겠지만.

‘이상은 잘못하면 가문이 무너진다. 괜히 친분을 쌓은 가문을 버릴 필요는 없겠지.’

일단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세력이 필요해.’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가진 정보들도 충분한 양이지만, 부족하다. 이 이상으로 많고 질 좋은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보만 받아내기엔 너무 아깝지.’

난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은 미루기로 했다. 지금 고민해봤자 촉박한 시간에 쫓겨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만 나올 테니.

“지금 당장 정해야 합니까?”

“아뇨. 천천히 생각해보셔도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거, 무서운걸요? 아주 가문의 뿌리까지 뽑히겠어요.”

그리 말하는 것치곤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짧은 웃음을 내뱉은 그녀가 말했다.

“참. 그거 아시나요?”

“?”

“요새 사교회에 공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답니다. 직계가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하고, 대마법사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다고 널리널리 퍼졌다고요.”

난 눈살을 찌푸렸다. 소문이 퍼졌다고? 그 일이? 미쳤다고 가문에서 내버려 뒀다고?

“누가 퍼트렸습니까?”

“글쎄요…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인지라.”

“가문에서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그래서 다른 귀족들도 최대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중이에요.”

“그런데도 널리 퍼지고 있다고요?”

“네. 저도 이해가 안 가요. 이 정도면 리그벨토 가에서 직접 퍼트리는 게 아닌지…….”

“설마요.”

그 늙은이들이 있는데도 감히 나에 대한 소문을 퍼트릴 이가 있을 리가 없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면 직접 쑤셔 넣어줄 작자들이니 말이다.

대체 누가 퍼트리는 거야?

* * *

암왕(暗王).

암살자들의 왕이자, 제국의 뒷 세계를 지배하는 폭군.

암왕은 언제나 기사만을 암살해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사는 너무 시시해서.

마법사는 암살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즉시 도망치거나 근처 공간을 엎어버려 제대로 싸우지 않지만, 기사는 감히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를 직접 죽이려 든다.

이 과정에서 기사를 역으로 죽이는 것이 재밌다고 하여 그는 기사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그는 마법사만을 죽이기 시작했다. 마탑에서 활동하는 정식 마법사부터 시작하여 추방당한 마법사, 그리고 몸을 숨긴 은둔 마법사들까지.

“감히 암살자 따위가 이 대마법사 하오른을!!!”

쿠구구구구!

상위 마법사 하오른도 이번에 암왕이 노리는 대상 중 하나였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스스로 작은 던전을 만들어 연구를 거듭하는 은둔 마법사.

사회성 같은 부분은 떨어진다고 하나,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마법만을 연구하는 만큼 실력은 확실했다.

더군다나 던전은 마법사가 직접 조율하고 만든 공간. 마법사와 연동되어 몸의 일부라 보아도 무방했다.

몸을 숨기고 비수를 날리는 암살자들에겐 너무나도 불리한 공간.

이에 하오른은 손쉽게 승리를 예상했지만.

“그렇군. 알았어.”

바로 발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급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너희 마법사들은 모두 여기가 취약하구나.”

서걱!

“크아아아아아!”

마력이 마법으로 화하기 이전에 흩어진다. 잘려 나간 하오른의 발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하오른의 입과 눈에서 물이 질질 새어 나왔다.

“아, 아파……! 아프다고……!”

“마법사들은 이래서 재미가 없어. 기껏해야 발 아닌가. 그거 하나 잘렸다고 이리 아프다고 소리치다니.”

쯧쯧쯧, 혀를 찬 암왕은 그림자에서 기어 올라왔다.

하오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암왕을 쳐다보았다.

“이, 이 공간 안의 그림자는 모두 없앴는데… 어떻게….”

“자네가 알 바는 아니지.”

서걱!

암왕의 검이 하오른의 목을 베었다. 경악한 표정 그대로 잘려나간 하오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암왕은 혈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양팔을 벌렸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는 마법사들을 암살하면서, 마법사들이 가지는 공통화된 패턴과 약점을 분석했다.

비록 직접 몸으로 전투를 벌이는 전투 마법사를 만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리그벨토 가문은 육체를 사용하는 가문이 아니니 상관없을 터.

즉. 지금 그에게 있어서, 마법사란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암살하기 쉬운 상대라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리그벨토 가문의 혈통을 암살하는 데에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

아무리 강한 암왕이 나오더라도, 세력이 커지더라도, 적을 약에 중독시키더라도, 다른 가문으로부터 힘을 빌려도.

그 어떤 칼날도 리그벨토 가문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노리는 건, 이미 한 번 무너졌던 벽. 아무리 바뀌고 활발히 활동하며 업을 쌓아 다시 벽을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한들.

이미 오랜 시간 강자를 죽여오며 업을 쌓아온 그에 비견할 바는 아닐 터.

“짐승들도 제 자식은 아낀다고 하지. 과연 너는 어떠할까.”

자신이 죽이지 않고 살려둔 암살자가, 자신의 자식을 죽였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암왕은 괴물, 리그벨토 가주의 반응을 상상하며 킬킬 웃었다.

암왕. 암살자들의 왕이자, 가주를 제외한 모든 목표물을 제거한 역대 최강의 암살자.

그의 칼날이 ‘라온 리그벨토’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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