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천마갑주.
8년 전 즈음, 어떻게든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화산에서 얻은 아이템이었다.
[천마갑주]
[지금의 하늘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하늘로 채울 이가 내려올 때, 다시 이 갑주가 발견되리라.]
내가 발견했을 당시엔 꽤 살벌한 문장이 새겨진 나무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심지어 천마갑주, 아니 ‘천마신교’에 대한 소문도 제대로 퍼져있지 않던 시절이라.
난 혹여나 이 캐릭터가 또 죽을까 봐, 또 세계관이 갑자기 뒤바뀌거나 확장될 걸 염려해서 아이템을 얻고 한 번도 열지 않았다.
1년 동안 말이다.
‘그러다가 GM에게 메시지를 받았었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친구이자 GM, 가르곤입니다! …(요약) 현재 플레이어님이 보유하신 ‘천마갑주’는 절대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님이 당당하게 얻으신 아이템이니 꼭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게임을 통합하여, 단 한 개만 존재하는 아이템이라 내가 열질 않는다면 진행이 안 된단다.
그래서 제발 열어달라고.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제발 한 번만 열어달라고 내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에는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악의는 없던 지라 순순히 열어주었고.
[새로운 이벤트가 개방되었습니다.]
[이벤트 난이도 : 메인]
[이벤트 이름: 천마신교.]
[또 다른 신을 찬양하는 이들이 모인 이들의 폭주를 막으십시오.]
새로운 이벤트가 열림과 동시에.
“와, 성능 개사기인데?”
처음으로 ‘초월’급 아이템을 얻게 되었다.
다만, 엄청난 등급답게 착용 제한이 엄청나게 빡세기는 했지만.
[착용 제한: 마력 90 이상.]
하필이면 그 빡센 조건이 ‘마력’인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착용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휙!
“야! 갑자기 어딜… 컥!”
[사망하였습니다!]
휘릭!
“컥, 켁! 수, 숨이… 이 시발 미친 새끼가….”
[사망하였습니다!]
자꾸 날 죽인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날 보호하지 않고 도망쳐서 죽게 만들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던 도중, 갑자기 바다 아래로 집어던진 적도 있고.
‘아무튼 개 같았지.’
그 뒤로는 한참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연구했다.
겨우 알아낸 방식은, 요행이라고는 조금도 바랄 수 없는 방식.
게임에서야 실패하면 다시 하면 그만이지만, 여기선 그게 안 되니 확실하게 굴복시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왜 이리 얌전하지?”
갸웃?
내게 적의는커녕, 자기가 무슨 골든리트리버라도 되는 것마냥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분명히 겉모습은 평범한 로브인데, 마치 누가 쓰고 있는 것마냥 후드가 올라가 있는 탓에 작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도 이런 모습이긴 해서, 익숙하긴 익숙했다.
다만 내가 익숙하지 않은 건.
후다닥!
바로 지금처럼, 내가 손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후드가 달린 부분으로 손에 부비적거리는 행동이다.
예전에는 다가가기만 해도 뺨따구를 날리던 놈이었는데, 갑자기 순해졌다.
이거 천마로브 맞나? 아니, 분명 맞는데?
‘진짜 버그 났나?’
아니, 그래. 행동은 100번 양보해서 갑자기 착해졌다고 치자.
‘상자에는 왜 안 담겨있어?’
원래 이건 ‘봉인’이라는 이름 하에 묶여있었는데….
뭔가 좀 많이 이상했다.
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 싶어서 던전 안을 쭉 둘러봤지만.
애초에 상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느 곳에도 상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야. 너 어디서 왔어.”
???
내 질문에 천마갑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주인이 강아지에게 앉아! 라고 외쳤더니, 아직 앉아! 의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같았다.
설마….
‘지능이… 내려갔나?’
겨우 2년 차이인데?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난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니 잘 써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내가 마음에 들어?”
끄덕끄덕!
난 강아지, 아니 천마갑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랑 갈래?”
끄덕끄덕끄덕!
천마갑주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너무 좋다는 듯 매달린다.
물론 이 모습에 속지 않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목을 조르거나 어디서 이상한 저주를 가지고 오면, 그대로 요단강행이다.
지금은 다시 돌아올 뱃길도 없으니, 할 거면 지금 확실히 해야 했다.
“맹세해.”
갸웃?
“내게 충성을 다하고, 절대 내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내 동료들까지도. 그럼 데려갈게.”
끄덕!
천마갑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서약서를 내밀자, 소매 부분을 툭 내밀더니 마나를 새긴다.
아. 왜 아티팩트가 이런 게 가능한지는 묻지 마라.
그냥 되더라.
‘……마나도 천마갑주 것이 맞고.’
이걸 이리 쉽게 하네.
분명 좋다. 분명히 좋은데…….
왜 이리 찝찝하지?
화아아악!
내 찝찝함과 별개로 마나 서약서는 잘 새겨졌다.
나와 천마갑주 사이에 귀속이 맺어지는 게 느껴진다.
천마갑주도 이를 느낀 것인지, 잔뜩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원래 이리 쉽게 얻는 게 아닌데.”
난 내 볼에 부비적거리는 천마갑주를 여러 의미가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원래 이놈을 길들이려고 했던 개고생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모두 지금을 위함이었던 건가?
“…일단 일반 폼.”
난 천마갑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마갑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다가오더니, 이내 팔부터 시작하여 금세 온몸에 로브가 장착되었다.
자동 착용 기능.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천마갑주를 착용하였습니다.]
[현재 천마갑주와 마나 서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귀속 상태인 ‘천마갑주’의 상태창 열람이 가능합니다.]
[마력이 10 하락하였습니다.]
[천마갑주(초월)]
[???]
[현재 ‘천마’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업데이트된 이후 다시 열람해주세요.]
[착용 제한: 마력 90 이상.]
[효과:
- 재생력 증가(당신의 마력을 흡수하여 신체를 빠르게 재생 / 보조합니다. 이는 on / off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현재 OFF)
- 수납공간(최대 100X100까지 수납할 수 있습니다.)
- 보호(갑주의 본래 기능은 주인을 보호하는 것. 물리와 마법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해주며, 마법의 여파가 몸에 닿지 않도록 해줍니다. 마력을 불어넣을 시, 보호 기능이 더 강화됩니다.)
- 자동 착용(어디에 있든, 어떤 자세든 자동으로 착용할 수 있습니다.)
- 자아(천마갑주는 신물로서 뚜렷한 자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 같은 갑주와 함께 지내어보세요.)
- 모든 기능은 플레이어의 마력을 사용하여 활성화됩니다. 플레이어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일반폼’ 상태입니다. 다른 ‘???’는 개방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개방 조건: ???
※현재 ‘라온 리그벨토’에게 귀속된 상태입니다. 라온 리그벨토 및 동료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현 마력 상태가 ‘안정’ 상태입니다.
‘성능은 확실하네. 성능은 확실한데…….’
뭔가 많이 달랐다.
원래는 설명창에 ‘미래에 찾아올 재앙인 천마를 보호하던 갑주. 현재는 왜 이런 상태인지 모르나, 로브의 형태로 남아 천마가 다시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직 천마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가 안 됐다고?
‘무슨 게임도 아니고….’
아무런 제한이 없던 게 아닌 건가?
아니면 아직 천마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2년 뒤에 일어나는 천마신교의 대테러 사건.
그동안 조용히 음지에서만 교리를 퍼트리던 천마신교가 처음으로 지금의 사제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사건이 있으며.
그 후로 모두가 천마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그건 최대한 막아야 하긴 하는데.’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발화점을 없앨 순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대주교가 더 이상 모두가 천마에 대해 모른다는 걸 참지 못해 폭주한다는 것이고.
만약 정말로 막을 거라면, 대주교를 죽여야만 했다.
‘대마법사 경지에 올라도 아슬아슬한데…….’
2년도 아니고 그 이전에 죽여야 하니, 더 아슬아슬하다.
문제는 게임에서도 대주교를 직접 잡아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즉, 내 장점 중 하나인 정보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니, 승률이 ‘최소’ 20%가 내려갈 터.
‘……뭐, 아직은 잠잠하니까.’
일단 전제 자체가 대마법사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아직 생각하기엔 좀 남았다는 것.
뭐, 정 안 되면 가주에게 애교라도 부려서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
아무리 대주교라고 한들, 일개 인간이 쌓아 올린 경지는 리그벨토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온 역사를 이겨낼 순 없으니까.
실제로 원래 게임에서 대주교가 죽음을 맞이하던 이유 대부분이 나, 혹은 가주였으니 말이다.
툭툭.
“?”
후드가 내 볼을 콕콕 찔렀다.
왜 찌르냐는 눈빛을 보내자, 천마로브 아니 천마갑주가 어딘갈 가리켰다.
혹여 천마갑주가 폭주할 걸 대비해 아벨라와 스칼라가 보내놓은 방향.
“저기에 누가 있다고?”
끄덕끄덕!
천마갑주는 용케도 둘의 인기척을 느낀 채, 적인지 아니면 동료인지 물어보고 있었다.
“아군이야.”
천마갑주는 알겠다는 듯 후드를 동그랗게 만다.
아, 왜 귀엽지?
난 평소에 스칼라를 쓰다듬듯이 후드를 쓰다듬었다.
천마갑주가 기분 좋은 듯 작게 몸을 부르르 떤다.
음. 이름 정도는 붙여줄까.
“넌 천갑이다.”
???
천갑이가 그게 무슨 이름이냐고 갸웃거렸지만.
뜻을 말하면 화낼 거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들 슬슬 돌…… 아. 나 전음을 못 쓰지.’
마력을 저장해둔 팔찌가 박살난 걸 깜빡했다.
천갑이에게 데리고 오라고 할까 하다가, 데자트에게 발견되면 베일 거 같아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알아서 오겠지, 뭐.
자박, 자박-
그리고 내 예상대로 둘 다 내 쪽으로 금방 귀환했다.
“거긴 뭐 있어?”
“아뇨. 아무것도 없었어요.”
“상자 같은 건?”
“진짜 아무것도 없던데요?”
“전 누가 청소 마법이라도 쓴 줄 알았다니까요.”
혹여 천갑이가 갇혀있던 상자가 있었을까 해서 물어봤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데자트마저도 발견 못했다는 건, 그냥 없다고 봐도 무방한데…….
천마갑주의 특성을 생각하면, 담아두거나 봉인해둔 매체가 없다는 게 이사했다.
그렇다면.
‘이 동굴 자체가 상자 안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몬스터 같은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됐다.
겨우 갑주 하나 보관하는 데에 ‘고위 던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해가 되었고.
내가 천마갑주를 최초로 발견했던 화산은, 고위 던전이라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니 말이다.
“으응… 오빠….”
“앗. 또 깬다.”
아벨라의 등에 업힌 스칼라가 짧게 중얼거렸다.
난 그녀에게 다가가 스칼라를 넘겨받았다.
불편한 듯 뒤척거리던 그녀는 내게 안기자마자 금세 안색을 편안히 한 채 품에 기대었다.
그르르….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마치 적을 경계하는 강아지마냥 후드를 바싹 세운 천갑.
난 천갑의 후드를 후려쳤다.
퍽!
“아가리.”
…….
시무룩.
눈에 띄게 축 늘어지지만, 그래도 버릇은 지금 고쳐놔야 했다.
안 그랬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보다 그 로브는 뭐예요?”
“아, 이거?”
난 짤막하게 천마갑주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내가 찾던 물건이자, 자아를 가진 신물이며, 이제 이 던전 안의 볼일은 모두 끝났다는 것까지.
“그런데 왜 ‘갑주’에요?”
“몰라. 자기가 갑주….”
꼬르륵-
당연한 데자트의 의문에 대답해주려는 사이.
어딘가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벨라를 힐끔 보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마냥 붉게 변해 있었다.
난 일부러 못 들은 척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데자트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해주기로 했는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보다 조금 더 쉬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가면 우두머리들이랑 부딪혀야 하는데.”
“그건 그렇지.”
난 순순히 인정했다.
원래라면 벗어나기 위해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
원래라면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달라졌….”
꽈악-
“?”
내 옷자락을 천갑이가 잡아당겼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천갑이가 강렬한 의지를 담은 채 후드를 양 옆으로 내저었다.
휙휙!
“여기.”
휙!
“있으면.”
X.
“안 돼?”
끄덕끄덕!
“왜?”
내 말에 천마갑주가 몸의 형태를 바꾸었다.
검의 형태를 하고 → 모양으로 바꾸더니,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난 금세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두면 너랑 검의 위치가 바뀐다고?”
끄덕끄덕!
천갑이는 바로 그거야! 라는 느낌으로 고개를 주왁거렸다.
그래서 원래 게임에서 천마갑주가 아니라 천마신검이 있던 건가?
대충 이해가 갔다.
‘좀만 늦게 왔으면 천마갑주가 아니라 천마신검이 있었으려나.’
지금 필요한 건 그거긴 한데…….
?
‘뭐, 나쁘지 않으려나.’
나름 귀엽기도 하고, 지금 내게 부족한 방어력을 채워줄 중요한 아이템이니.
그리고 또 다행인 점이라면.
“그럼 바로 나가자.”
“……네?”
“이제 우두머리들은 내 상대가 안 돼.”
내가 여길 벗어날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하지 못한 건.
오로지 신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다.
보조 마법을 쓸 수 있는 팔찌는 없어졌지만, 천마갑주는 얻었으니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그냥 다 같이 상처 입지 않고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고.
끄덕끄덕끄덕!
천갑이가 얼른 벗어나자는 듯, 후드를 끄덕이며 내게 휘리릭 감겼다.
이때까지 내가 둘렀던 그 어떤 로브와 명품보다도 편안한 착용감.
어떻게 다루든 절대 늘어나지도, 찢어질 것 같지도 않은!
펄럭펄럭!
천마갑주가 어서 나가자고 재촉하며 팔을 파닥거렸다.
난 피식 웃으면서도, 곧 나갈 준비를 끝냈다.
자…… 밖은 어떠려나.
사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적이 오던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