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으응….”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스칼라가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거렸다.
내가 일어난 걸 알기라도 한 듯,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내 허리를 껴안는다.
다행히 그녀의 몸에는 큰 상처가 없었고, 드문드문 감아진 붕대에도 피 같은 건 묻어나지 않았었다.
그래도 혹여 모르니 이마에 손을 올리자.
“…열은 없네.”
딱 적당한 온도가 느껴진다.
다행이다.
혹여 구미호의 꼬리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거나, 한 번에 너무 많은 화기를 삼켜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는데….
스칼라 나름대로 잘 이겨 내준 모양이었다.
‘필요한 포션이나 아티팩트들도 모두 챙겨놓았으니 문제가 생겼어도 해결되었겠지만….’
화기란 결국 불에 불가하니, 선천적인 체질로 바꿀 수 없는 게 아니라면 식히는 게 가능했다.
뭐… 어찌 되었든 안 아픈 게 최고니까 지금 상태가 딱 좋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누가 묘족 아니랄까봐 작게 갸르릉 소리를 내며 내 손길을 즐겼다.
다만… 왜인지 모르게, 구미호의 불꽃을 통제하여 폭발을 막아낸 모습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분명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천재(天才)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 일을 밥 먹듯이 벌이는 종속들이다.
예시로 상식적으로 10살에 모든 육체의 성장이 끝난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누군가는 그걸 이루어낼 수 있다.
이처럼, 스칼라는 하늘인 내린 재능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구미호의 불꽃을 다룬 건, 천재 같은 말로 둘러댈 수 없어.’
여우불. 구미호가 쌓아 올린 업을 통하여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꽃.
파괴력 자체는 다른 불꽃에 비해 엄청 강하지 않을지 몰라도.
남을 현혹시켜 업을 빼앗고, 강인한 구미호의 업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불꽃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한들, 1초라도 다룰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라면 더더욱.
‘숨겨진 혈통 같은 게 있나?’
그런데 구미호는 여우고, 얘는 고양이인데.
고양이랑 여우랑 짝이라도 맞췄나?
그렇다기엔 이 애의 부모는 인간이랑 묘족인데?
‘…모르겠네.’
아니면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 혹은 더 윗선으로 올라가야 할 수도 있다.
이 세계에서 혈통이 가진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여, 웬만해선 부모의 특성을 대부분 물려받지만.
아무리 높은 확률이라고 해도, 운이 좋지 않으면 혈통이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런 경우고.’
일단 스칼라 문제는 뒷선으로 미뤄두고…….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난 이참에 잔뜩 확장된 감각을 활용해 이 근처를 둘러보았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공주가 잠든 채 누워 있었고,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아벨라와 데자트의 기척이 느껴졌다.
둘 다 잠시 내 기척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짧게 충돌하곤 사라진다.
‘열심히 하네.’
<그림자 밟기>를 이용한 전투 방식.
암살자임과 동시에 검사인 데자트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순수 암살자인 그녀는 유용하게 사용할 기술이다.
그녀 나름대로 업을 흡수하긴 한 듯, 신체 능력도 꽤 오른 게 보였다.
‘마력은…….’
그녀의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직 없었다.
아마 평생 없을 가능성도 컸다.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은밀해질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물론 단점도 많았지만 말이다.
캉!
한참을 검을 나누던 중, 아벨라가 지친 듯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데자트는 검을 늘어트렸다.
-이제 여기까지만 하죠.
-나… 아직 더 할 수….
-여기서 힘을 다 빼면, 스칼라와 라온은 누가 보살펴줘요?
아벨라가 그동안 날 보살펴준 건가?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똥오줌을 치워준 건 아니겠지?’
원래 라온 리그벨토는 화장실을 잘 가지 않았다.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력이 너무 많은 나머지 체내에 불순물 같은 게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화장실을 일주일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긴 하지만….
내가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다면?
‘……라온아. 네 몸을 믿는다.’
내가 설마 일주일이나 쓰러져 있었다곤 하지 말아줘.
“후우… 그보다 어떻게 짐승도 한 마리가 없는지.”
“그러게요. 슬슬 식량이 문제인데….”
데자트와 아벨라가 대화를 나누며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으려던 아벨라와 내 눈이 마주쳤다.
“…….”
“……아?”
배가 훤히 드러난 채로 자리에 멈춘다.
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인데 몸을 저렇게 드러내면 안 부끄럽나?
적당히 시선을 돌려주며 입을 떼었을 때
“나 아무것도 안 봤-”
“……도련님!!!”
아벨라가 마치 날다람쥐처럼 내게 파바박 달려들어 와락 안겼다.
다행히도 신체가 강화된 덕분인지 그녀를 안았는데도 별로 무겁진 않았다.
난 품에 안긴 채 울먹거리는 아벨라의 머리를 토닥이며 물었다.
“어디 다친 덴 없어?”
“흑, 네. 없어요. 도련님은요?! 도련님은 어디 아프신 데 없어요?!”
“없어.”
아, 맞다. 컨셉.
…뭐, 지금은 딱히 상관없나.
이미 컨셉 때문에 떨쳐내기엔 너무 많은 길을 와버렸으니.
난 내 가슴팍이 축축히 적셔지는 걸 느끼면서 데자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데자트, 넌?”
“저도 없어요. 아주 멀쩡해요.”
“그래?”
다행이네.
난 슬쩍 공주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양팔을 벌리고 입을 헤- 벌린 채 잠든 모습.
저거 제정신으로 잔 거 아닌 거 같은데… 약물이라도 먹인 거 아니야?
“아, 공주님은… 자꾸 안 주무시려고 하시길래, 인위로 재웠어요. 이젠 그냥 알아서 주무시더라고요.”
진짜냐?!
난 속으로 소리칠 뻔한 걸 꾹 참았다.
그래. 공주가 억지로 재우는 게 아니라면 잘 안 쉬기는 하지.
…그래도 약을 먹이는 건 좀 아닌 거 같지만.
“스칼라 몸은?”
“어제까지는 많이 아파했는데… 그래도 오늘 되니까 괜찮아졌어요. 열도 많이 내렸고요.”
‘너무 급하게 먹였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스칼라에게 필요한 업만을 먹이기 위해선, 반드시 그 꼬리를 먹어야만 했다.
다른 업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로 그녀에게 효과 있는 업은, 오로지 그 화기 하나였으니까.
“……그보다, 당신. 정말 괜찮아요?”
“?”
데자트는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 3일 동안 제일 아파했어요. 그 팔도 어젯밤이야 겨우 회복되었고… 그 등에 있는 문양도 안 지워졌고… 뇌기의 영향력도 남아있고요.”
“괜찮은데.”
팔은 아직 조금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면 침 바르면 낫는다.
뒤에 있는 문양은… 스칼라와 접촉하다 보면 알아서 사라질 터.
뇌기의 영향? 대체 뭘 보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비가 그친 순간부터 뇌기는 사라졌다.
“나 말고 너희나 신경 써.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3일이요….”
“그럼 먹을 게 없겠네. 스칼라와 공주를 업고 이동할 준비를 해. 최대한 빠르게 이 던전을 클리어한다. 아니면 몬스터를 찾던가. 아벨라. 좀 뒤로 가봐.”
난 내게 엉킨 아벨라를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누워있던 탓에 다리가 찌리리 울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조금 걸으면 금방 나았다.
가볍게 내 몸 상태를 점검한다.
멀쩡한 건 허리띠와 쇠사슬, 그리고 뱀파이어의 팔찌뿐이다.
이제야 알았는데, 마력 흡수 반지(하급)도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게 하나도 없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됐나.’
난 기지개를 쭈욱 폈다.
내가 자유자재로 팔을 움직이자, 아벨라와 데자트의 시선이 내 팔을 따라 움직인다.
“헛.”
퍼뜩 정신을 차린 아벨라는 기겁하며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았다.
“잠깐만요! 팔을 그렇게 움직이시면 안 돼요! 조금 더 쉬셔야죠!”
“이 정도면 충분해.”
충분한 게 아니라 차고 넘칠 수준이다.
근래에 이렇게 기운이 넘쳤던 적이 있던가.
난 단언 한 번도 없다고 장담할 정도로, 지금 순간이 너무나 상쾌했다.
“……아벨라. 너무 막지 말죠.”
데자트가 뒤에서 나타나 조심스럽게 아벨라를 내게서 떼어냈다.
아벨라가 울상을 지었다.
“하, 하지마안….”
“대신에…… 진심으로 여쭤볼 게 있어요.”
“뭔데?”
“왜, 당신은 저희를 대신해서 그렇게까지 희생하는 건가요?”
희생?
“내가?”
“네.”
내가 너희를 대신해 희생이라니.
아마 날 알던 사람들이라면 피식 웃었을 것이다.
내가 희생하는 이유는 이들을 위함이 아니다.
내 삶의 첫 번째 목표인 라온 리그벨토를 반드시 살려서 해피 엔딩을 보게하는 것.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목표이자 삶이다. 이는 살면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빙의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생사를 넘나들며 희생하는 것도.
이들을 위해서가 아닌, 내 자식과도 같은 라온 리그벨토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다.
‘너희가 도움이 되니까 살려놓는 거야.’
이들이 중요하긴 하지만, 중요한 이유가 모두 라온 리그벨토의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이고.
그녀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내 몸을 갈아서라도 그녀들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분명 그랬을 거야.’
새로운 목표가 생겨선 안 된다.
더 많은 짐이 생겨선 안 된다.
만약 생겨버린다면…….
짐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난 조금 더 조심해야만 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최적화된 루트를 밟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난 너희를 위해서 희생한 적 없어.”
“…거짓말.”
스칼라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렸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스칼라가, 내 바지를 붙잡고 있었다.
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오빠… 거짓말….”
“뭐야. 너 왜 일어나 있어. 더 자.”
“오빠는… 우리가 죽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자기가 다치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까….”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아무리 오래 지낸 동료라고 해도, 10년 동안 플레이 해온 ‘라온 리그벨토’보다 더 잘 아는 건 아니었다.
라온 리그벨토는 죽지 않는 이상, 마력이 폭주하지 않는 이상, 몸이 다치는 것 정도는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난 라온 리그벨토 정도로 이들을 살릴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
“아무리 라온이 저흴 위해 희생한 적이 없어도, 지금 방식은 너무 위험해요. 조금만 더 안전하게….”
“됐어. 내가 다른 건 다 들어주겠지만, 이건 안 돼. 절대.”
난 단호히 말했다.
라온 리그벨토를 플레이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절대로 내 몸을 아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라온 리그벨토의 몸뚱어리는 저주받았다.
저주를 이겨내고 한계를 넘어서 성장하기 위해선.
반드시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죽기 직전까지 몰려야 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모순인가 싶지만… 실제인 걸 어떡하는가.
따질 거면 제작자에게 따져라.
“…….”
내 단호한 뜻을 알아차린 듯, 그들은 더 이상 내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난 주제를 돌릴 구석을 찾아냈다.
음, 스칼라는 방금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잠들었고, 공주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음? 잠시만.
“…어째서 시야가 좀 높아진 기분인데.”
지구에서는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잔지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지금 보니, 시야가 갑자기 높아진 기분이었다.
나보다 쪼오끔 더 컸던 데자트의 가르마가 힐끔 보였을 정도이니.
휴지로 스칼라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둔 아벨라가 말했다.
“기분 아니에요. 진짜로 컸어요. 한 5cm?”
“내가 3일 동안 기절해 있지 않았나?”
“맞아요. 3일 동안.”
“그런데 그 정도로 컸다고?”
“네!”
…그게 되나? 아니, 아직 성장기이긴 한데 그래도….
“왜요? 혹시 싫으세요? 그동안 크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건 맞는데….”
갑자기 키가 왜 커?
원래 게임에선 모든 능력치를 89까지 올렸어도 키가 하나도 안 컸었는데….
뭐가 좀 다른가?
“…흠. 얼굴도 조금 더 잘생겨진 거 같기도.”
“그건 기분 탓이고.”
마음 같아선 상태를 더 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는 듯 했다.
[내게로 오라…….]
저 멀리서, 뭔가가 내게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 * *
지구의 종교인 기독교에선 신의 말이 적힌 성경이 대대로 내려오듯, 천마신교에도 신이 남긴 구절을 담은 책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천마신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니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유독 뚜렷하게 뇌리에 남은 구절이 있었다.
[거짓과 기만으로 점칠된 푸른 하늘을 검게 물들이고 우리들의 신께서 강림하실 것이니. 그때를 대비하여 대지를 검게 물들이라.]
구절에 이르길, 천마란 존재는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새로운 신이 될 것이라 하였다.
만일 저 구절이 사실이라면, 천마는 왕(王)급이 아닌 황(皇),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일 것이 분명했다.
퓨수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감히 대적할 수조차 없는 위대한 존재.
그러한 존재가 사용하던 무기가 바로 천마갑주와 천마신검이었다.
[그의 갑주는 하찮은 것이 하늘의 피부에 닿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며, 아무리 하늘이 벌을 내린다고 한들 뚫리지 않을 것이며, 손짓 한 번 한 번에 폭풍을 불러낼 것이니라.]
난 오늘, 이 중 천마갑주를 얻을 생각이었다.
물론 난이도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게임에서도 얻으려면 별 고생을 다 해야 했으니까.
펄럭펄럭!
……분명 그랬는데 말이지.
‘버그라도 났나?’
너 왜 나한테 친하게 대하냐?
난 강아지마냥 들러붙는 천마갑주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