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어떻게 알았지?
난 순간 당황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저 구미호는 이때까지 내가 알던 구미호와 조금 달랐으니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바로 부정했으나, 그녀는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듯 내 말을 무시했다.
[……흥미롭구나, 흥미로워.]
그녀의 입에는 어느새 곰방대가 물려 있었다.
곰방대에서 나오는 쾌쾌한 연기가 대기를 뒤덮고, 근처 숲을 휘감았다.
동시에 여우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여우불은 마치 의지를 품은 것처럼 미친 듯이 나무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재규어와 코끼리는 다급히 자리를 피하고, 지룡은 서둘러 땅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근처의 나무들이 싸그리 불태워지고, 나와 구미호는 눈앞에 나무 한 그루도 두지 않은 텅 빈 공동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후우우…….]
입에서 연기를 뿜은 구미호가 웃었다.
[어째서 나서지 않는가 했더니, 기운을 다룰 줄 모를 줄이야.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느냐?]
“글쎄. 애초에 나는 하늘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좋다. 그럼 새롭게 제안하지.]
“?”
[그대에게 천기를 내려주겠노라.]
“천기?”
[그렇다. 그대가 그리된 것은 하늘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건, 하늘이 인간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지. 아무래도 그대는 하늘의 동정심을 사지 못한 모양이지만, 상관없다. 천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하늘이 그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엉망인 몸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줄 터이니.]
“???”
내 옆의 애들은 구미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당연하다.
하늘과 천기. 판타지가 아닌 무림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 나오는 용어들이니,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더군다나 ‘영웅의 문’ 개발자는 완전히 다른 세계 출신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저런 단어들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지구 출신인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리고 게임에서 내가 저 대사를 몇 번이나 들었는데.’
생각 외로 천기… 그러니까 신과 밀접한 관계였던 구미호인 모양이지만.
그래봤자 던전에 갇혀 몬스터로 타락한 놈.
들을 가치조차 없었다.
“네 노예가 되라고?”
[…방금 말했을 터인데- 하늘이란 너희 세계의 신 같은 존재다. 천기는 너희들이 다루는 기운보다 더 정순한-]
“그 하늘이 여기까지 와있을 리가. 그리고, 천기를 너를 통해 받아야 하잖아?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난 그녀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그 수작으로 몇 명이나 망가트린 주제에.”
구미호가 되기 위해선 9개의 꼬리를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꼬리가 이루어지는 조건은 무엇인가.
흔히들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에서 수련하며 기운을 쌓는다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꼬리 하나하나가 생겨나는 조건이 다르며, 구미호는 이를 채우기 위해 업을 쌓는다.
‘그 중 하나가 수십 명의 강자를 죽이는 것.’
저 구미호가 꼬리를 9개나 달고 있는 한.
씨익!
내 정보는 틀릴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그대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어쩌라고.”
난 슬슬 전투를 준비했다.
잠시 도망쳤던 우두머리들도 다시 돌아온 상태.
잠시나마 도망쳤다는 것에 굉장히 자신감이 상한 듯해 보였다.
‘내 예상보다 훨씬 약하지만.’
그래도 숫자엔 장사 없다고, 내가 이 레이드를 주도한다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하늘로부터 버림받아서 던전 안에 갇혀있던 년을 어떻게 믿어?”
[…본녀의 모독은 이제 그만하도록 하지.]
구미호는 곰방대를 내던지고, 다시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정말 더 듣다간, 그 입을 찢어버릴 거 같으니.]
“찢어보던가.”
난 히죽 웃으며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한 판 붙자, 여우야.”
[오냐.]
우우우웅!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몸 근처로 수십 개의 여우불이 떠올랐다.
그리고 머리 위로, 제일 거대한 여우 불이 떠오른다.
아니, 여우 불이 아니었다.
여우 구슬.
구미호의 심장과도 같은 귀중한 것이자, 증폭해주는 아이템과 같으며,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는 상징.
[어디 한 번 내게서 살아남아 보거라, 아 해야. 살아남는다면 널 친히 침대로 데려가 주마.]
“왜 자꾸 침대에 데려간대? 너 같은 X이랑은 싫다니까?”
쿠구우우우!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해, 여우불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팟! 팟! 팟!
데자트가 날 잡고 마력 흐름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넘으면서 크게 도약했다.
<그림자 넘기>. 흔한 도약 기술 중 하나로, 잠시나마 마력의 휘몰아침에서 벗어나자 울렁거리는 속이 줄어든다.
화르르르륵!
우리가 있는 마력의 틈을 불꽃이 집고 들어왔다.
데자트가 횡으로 검을 휘두르자,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 사이를 또 다른 불덩이가 날아오며 틈을 채우며 억지로 마력의 흐름을 비틀었다.
“흐으으……!”
결국 마력의 틈 사이에 숨어있기 버겁다고 판단한 듯, 데자트가 내 몸을 강하게 잡으며 틈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머리 위로 여우불이 쏟아져 내린다.
데자트가 급히 무기를 들려고 했으나, 그 전에 내가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고개 숙여.”
동시에 허공으로 쇠사슬을 빙빙 돌렸다.
카우보이가 말에게 밧줄을 날리기 전 돌리는 것 마냥 빙빙 돌아가는 쇠사슬에 불꽃이 빨려 들어온다.
아까처럼 마력은 모두 빨려 들어왔지만, 화기는 남은 채 쇠사슬 겉면에 남아있었고.
그 덕에 마치 쥐불놀이를 하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흐읍!”
<포착>
난 쇠사슬에 마법을 걸면서 구미호에게로 날렸다.
불꽃에 휘감긴 쇠사슬이 구미호에게 닿기 전, 구미호의 부채가 쇠사슬을 쳐 내었다.
[크읏.]
꽤 강하게 맞은 모양이다.
그녀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난 순간, 불꽃 때문에 밝아졌던 세상이 잠시 어둑해졌다.
[감히 날 날려?!]
아까 공격받고 추락했던 라우르.
잔뜩 분노한 공작새의 날갯짓에 마치 폭풍처럼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에 구미호가 부채를 활짝 펼친다.
부채가 휘둘러지기 전, 폭풍을 뚫고 접근한 재규어가 발톱을 휘둘렀다.
깡, 깡, 깡!
부채와 발톱이 맞닿는다.
마치 태풍 안에서 검사와 검사가 검을 나누듯, 치열한 공방을 나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태풍의 영향을 받는 건 구미호뿐만 아니라 재규어도 마찬가지.
크그그으으윽!
[어머, 아직 발톱이 덜 여물었네. 100년은 살았니?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아쉽구나. 본녀를 넘으려면 천 년은 지내야 할 테니 말이야-!]
결국 재규어가 밀리기 시작하자,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공주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나무줄기가 움직인다.
구미호가 발톱을 튕겨내고 목을 베어 내버리기 직전.
쿠구우우욱!
땅에서 치솟은 나무줄기가 부채를 붙잡았다.
잠시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잡은 재규어의 팔이 그녀의 다른 팔을 짓누른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순간.
[음모오오오오오오!!!]
온몸에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코끼리가 다시 돌진했다.
몬스터 출신답게 조금도 정돈되지 않고 잔뜩 거친 운용이었으나, 이는 파괴력을 상상 이상으로 이끌어 내었다.
쿠우우우우우웅!
[아, 정말 자꾸 거슬리게…….]
이번엔 여우불로 막지 못한 구미호가 뒤로 밀려났다.
밀려나는 그녀를 향해 쇠사슬을 휘두른다.
쇠사슬이 그녀의 팔을 휘감기 직전, 활짝 펼쳐진 부채에 의해 막혔다.
챙!
[자꾸 깔짝깔짝…….]
구미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곤 여우불을 연상시키는 시뻘건 눈동자로 날 노려보았다.
[쫄았니?]
“설마.”
난 어깨를 으쓱이며 데자트와 함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다만 날 잡으려면 쟤네부터 이기라 이거지.”
콰아아아아아앙!
동시에 지룡이 그녀의 발아래 지반을 뒤집었다.
구미호가 허공으로 붕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작새가 온몸에 마력을 두른 채 돌진하고, 지룡도 입을 쩍 벌린 채 브레스를 쏘아냈다.
콰아앙아아아아앙!
천재지변(天災地變)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을 것 같은 전투.
하늘에서 비만 내리지 않을 뿐이지, 먹구름이 모여 하늘을 어둡게 만들고, 한 번 충돌할 때마다 나무들이 우후죽순 쓸려나간다.
그림자 속에 숨어 이 장면을 모두 지켜보던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왜 천마신교는 안 오는 거지?’
상상 이상으로 전투의 규모가 크다.
더군다나 싹 다 몬스터 출신이라 그런지 무식하게 힘으로만 부딪혀 여파가 더 강했다.
아마 스칼라를 아벨라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휩쓸려 실종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
이 정도 규모면 당연히 눈에 띌 텐데…….
‘결계?’
…아마 아닐 거다.
이 전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의 결계가 펼쳐졌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뿐더러.
그 정도의 실력자는 이 자리에 없고, 천마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신다고 자부하는 대주교의 실력이라면 결계를 뚫고 안을 볼 수 있을 테니.
‘왜 안 오는 거지?’
아니면 나서지 못하는 건가?
설마 그 정도의 강자가, 겨우 이 정도 싸움에 끼지 못할 리는 없었다.
정말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거나, 이미 왔음에도 내가 모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아벨라.
난 아벨라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벨라가 그림자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녀에게 신호기를 건네준 나는 꼭대기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저 근처에서 누가 다가오지 않는지 자세히 잘 살펴봐. 만약 누가 온다면 절대 나서지 말고 날 불러. 알았어? 만약 위험한 상황이면 무조건 도망쳐. 네 목숨을 최우선시해.
끄덕.
-좋아. 그럼 누가 나타나면 날 불러.
끄덕끄덕!
고개를 연신 끄덕인 아벨라가 그림자에 스르륵 녹아내렸다.
한 번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고 다시 구미호와 우두머리들의 결투를 쳐다본다.
쿠구우우우!
[크으으으으윽-!]
[겨우 지룡 주제에-! 감히 나를 우롱해?!]
아까보다 훨씬 크기가 거대해진 구미호가 지룡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등을 노리고 코끼리가 돌진하지만, 그녀가 뒤로 손을 뻗은 순간 브레스처럼 쏘아진 여우불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갔다.
재규어 또한 마찬가지.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습격하려 했으나, 여우불이 이 근처를 싸그리 불사질러 그림자를 없애버리고 튀어나온 재규어의 면상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크르으으으…….]
[하아아…… 정말 이 미개한 것들이. 본녀가 이때까지 놀아주니 할 만할 거 같으냐?]
‘아니, 무슨…….’
난 눈살을 찌푸렸다.
쟤 왜 저리 쎄냐?
아니, 그보다 지룡은 왜 저리 약해?
‘저래서 전생엔 못 봤던 건가?’
둘의 파워 자체는 그리 차이나는 거 같지 않지만, 마력 운용과 활용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지룡은 나름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거 같긴 했지만, 압도적인 숙련도를 가진 구미호의 앞에서 조금도 마법을 다루지 못했으니.
괜히 기대했다.
일단 저놈들이 알아서 잡아주는 건 불가능하다.
즉,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
“데자트.”
“네?”
“필살기 좀 날려봐. 저 녀석이 본체로 돌아가면 골치 아파진다.”
그래서 데자트에게 말해보지만.
데자트는 날아드는 여우불을 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는 안 돼요. 최소한 둘은 되어야 해요. 제 전력을 다 따라잡을 수 있는.”
“…….”
“원래 제 전력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일 때 발휘돼서… 원래 수호자들이 다 그래요…”
혹시 내가 실망했을까 봐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별 실망은 하지 않았다.
기대하긴 했지만, 그걸 못 충족시킨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녀를 뒤받쳐줄 사람이 그나마 나라는 점인데.
‘전력은 못 따라잡는다.’
이전에 그녀를 이겼을 때도, 그녀는 그때 지친 상태이기도 했고, 우선 제압해보겠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하지만 전력으로 온다면?
이길 자신은 물론 속도를 맞춰줄 자신도 없다.
‘이대로면 못 잡겠는데.’
튀어야 하나?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면, 이대로 물러나 강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
하지만 그래선 업이 나누어진다. 저 구미호를 잡고 온전히 업을 나누어야 하는데, 다른 이들이 끼어들어 업이 분배되는 건 너무 큰 손해였다.
성장하기 위해선, 무리해서라도 우리끼리 잡아야 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거나, 아니면 천마신교에게 빼앗길 수 있어.’
그러니 천마신교가 접근하지 못한 지금, 잡을 거면 반드시 지금 해내야 했다.
그나마 이길 수 있는 수는…….
치이이익!
“…….”
난 불이 꺼지며 일어난 수증기를 쳐다보았다.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당장이라도 비가 올 거 같았다.
…그렇다면.
“공주.”
“헥, 헥… 네?”
“물 좀 뿌려봐. 아주 거하게.”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