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황금 명가는 쌓아 올린 부만큼이나 수많은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가진 아티팩트도 많고, 여러 이유로 성능은 좋으나 유통은 되지 않는 아티팩트도 여럿 있었다.
“제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주시길.”
잠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운 아펠니오스를 대신하여 집사가 고풍스러운 상자를 내민다.
안에 담긴 물건은 초커. 지구에서는 패션용으로도 자주 사용하던 아이템.
디자인은 평범했다. 다만 상처를 가리기 위한 용도이다 보니 면적이 살짝 컸는데, 이 정도면 불편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난 초커의 정보창도 확인했다.
[유동의 초커]
뛰어난 대장장이가 목에 큰 흉터가 남은 친우를 위해 만들어낸 아티팩트다.
성능은 좋으나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고 들어가는 재료가 비싸 양산이 힘들어 양산되지 않았다.
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황금명가에 바친 완성품.
효과:
일반폼 / 전투폼 변경이 가능하다.
(일반폼 – 아무런 효과 없는 초커 상태.)
(전투폼 – 마스크 형태로 바뀌어 호흡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고 마력 순환을 도와준다. 단단한 소재로 이루어져 목을 보호할 수 있다.)
오, 괜찮은데?
신체 강화나 마력 강화 기능은 없지만, 대장장이가 만든 아티팩트치고 꽤 괜찮다.
다만 들어가는 재료가 비싸다는 걸 보면 양산될 만한 아이템은 아니다.
그걸 감수하고 만들 정도도 아니고.
그래도 선물 받은 입장으로서 보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보다 이건?”
난 초커 옆에 놓인 다른 초커를 가리켰다.
방금 내가 본 게 가죽 재질이라면,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훨씬 부드럽고 살짝 헐렁해 보였다.
잠잘 때 특화된 듯한 모습이랄까?
집사가 미소 지으며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옆은 잠자실 때 사용하시면 됩니다. 목에 자국이나 흉터를 없앨 때 도움을 주지요. 서비스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런 걸 그냥 줘? 심지어 서비스라고 덧붙여서 선물 중 일부로 취급했다.
‘일 잘하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그에 합당한 물건을 주는 것.
역시 돈을 괜히 잘 버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초커를 꺼내었다. 그리고 아벨라에게 손짓했다.
“아벨라.”
“네, 네?”
“자.”
난 다가온 아벨라에게 초커를 내밀었다.
“목에 차. 흉터를 가려줄 거야.”
“그…… 이걸 왜…….”
“나 때문에 생긴 상처니까.”
아벨라는 너무 비싼 아티팩트라 그런지 살짝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거 하나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랑 가격이 비슷할 텐데….
옷은 받으면서 왜 이건 안 받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인 디자인으로 가져왔습니다. 부담 없이 착용하시길.”
옆에서 집사가 웃으며 말을 거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벨라는 초커를 받지 않았다.
‘너무 비싸 보이나?’
그런 느낌은 아닌 거 같은데…….
나에 대한 부담감은 느껴지면서도 다른 감정도 느껴진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태도에서 대충 느낌이 온달까.
시선은 나와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귀 끝은 붉게 물들어 있으며, 두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왜?
꾹, 꾹.
내 손을 강하게 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스칼라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변태…….”
아니, 왜.
“……그, 전 잘 모르지만.”
뒤에서 데자트가 소심하게 말했다.
“원래 남자가 여자한테 초커를 주는 게 보통 의미는 아닌 걸로 아는데….”
“이 날씨에 목도리를 줄 순 없잖아.”
참고로 지금 날씨는 여름이다.
여름에 목도리?
그건 그냥 암살이다, 암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문제없지? 아벨라. 이리 와.”
“…….”
“빨리.”
“……네에…….”
잔뜩 쭈그려진 채 다가온 아벨라의 고개를 살짝 숙이게 했다.
어차피 내가 차라고 해도 안 찰 테니, 직접 채워주는 수밖에.
드러난 흰 목에 초커를 채웠다. 꽤 긴 흉터가 가려지도록 적당히 위치를 잡아주자, 목까지 붉어지는 게 보였다.
아니 왜 이리 부끄러워하는지…….
난 속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살짝 뒤로 물러나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괜찮네.”
“너무… 부끄러운데….”
“익숙해져. 그보다 착용감은 어때.”
“편해요….”
그녀는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새하얀 피부에 검은 초커라…… 나름 괜찮네.
“전투폼 해봐. 말로는 안 해도 되고 속으로만.”
철컥.
어디서 기계음이 들리더니 아벨라의 초커가 뒤바뀌었다.
초커의 면적이 순식간에 넓어지며 목 전체를 둘러싸고 입까지 가린다.
목과 입까지 완전히 가려주는 마스크 형태.
통통.
살짝 손등으로 두들겨보자 꽤 단단한 소리가 났다.
이 정도면 중급 기사의 검을 한 번 정도는 막아낼 순 있을 것 같다.
딱 한 번도 완벽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우와….”
마스크를 쓴 아벨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달랐다. 여기서 옷만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는다면, 만화 속에 나오는 암살자의 모습 그대로일 거 같다.
음, 전체 이용가에선 못 나오려나?
“진짜 암살자 같은데요? 나중에 마력 다루는 법까지 알려주면 딱 되겠다.”
“아직 마력 활용 기술은 안 알려줬지?”
“네. 원래 암살자는 마력을 잘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배워두어야겠지만.”
“나중에 이게 도움이 될 거야. 만약 싸우는 일이 생기면 그걸 꼭 전투폼으로 바꿔.”
아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도 잘 되고, 돌리는 것도 잘 되고.
“이제 다시 되돌려도 돼.”
내 말에 아벨라가 다시 초커를 일반폼으로 되돌렸다. 그녀는 숨쉬기가 버거웠던 듯, 입을 살짝 크게 벌리며 혀를 내밀었다.
“헤엑….”
“숨이 안 쉬어져?”
“아뇨… 그건 아닌데, 다만 느낌이 이상해서 아직 적응이 안 됐어요….”
“그럼 천천히 적응해. 아, 그리고 이건 잘 때 착용하는 거.”
“네….”
그녀는 내가 내민 수면용 초커를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이젠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받기로 다짐했는지 눈이 빛났다.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간직이 아니라 쓰라고.”
그래도 기뻐하니 기분은 좋네.
아, 참.
“그래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중에 여기다가 내 이름 새겨줄게.”
난 그녀의 초커를 쓱 만지며 말했다.
너무 크면 이상하니까… 로고 식으로 작게만 붙여놔야겠다.
펑!
그런데 아벨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 말에 갑자기 얼굴과 목이 시뻘게지더니, 머리 위로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예 연기가 푸쉬익- 피어오를 정도로.
“???”
“오빠….”
내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스칼라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초커에 이름을 새겨놓고… 여자한테 채우는 건… 소유욕을… 드러내는… 행위랬어….”
“너 그거 어디서 배웠어.”
“데자트 언니가 읽는 소설에서….”
난 데자트를 노려보았다.
데자트는 소심하게 시선을 피했다.
“너네 그거 압수야.”
“헉.”
“힉.”
…공주 너도 읽었냐?
* * *
아무튼 이즈벨라 가에서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
금세 일을 끝내고 돌아온 아펠니오스에게 돌아갈 뜻을 밝히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또 좋은 만남이 있으면 좋겠군요.”
“일을 마친 뒤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친우를 기다리는 건 즐거운 일이지요. 아, 그리고 친우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친우까지 할 사이인가?
‘천관산도 너무 쉽게 허락했고.’
그냥 떠보기식으로 말해본 건데, 전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 했습니다,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즉, 눈감아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의 혜택을 왜…….
아무튼 그는 날 친우라 생각하기로 한 듯인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내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원래 성욕이란 스트레스와 같아서 제때제때 풀어주어야 건강한 법이지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내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길.”
“나중에는 알론 님과도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군요.”
“좋은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내 겉치레에 그녀 또한 겉치레로 응답한다.
사실 마음 같아선 둘 다 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관계는 터놔야 하니 다시 만나는 건 정해진 셈.
어차피 해야 할 거, 최대한 좋게 하는 게 좋겠지.
“그럼.”
우린 별장을 벗어났다. 기사의 인도에 따라 나가니, 금세 탁 트인 거리로 나갈 수 있었다.
길 안내를 하던 기사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보도록.”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제야 이즈벨라 가문과의 대면이 끝났다는 사실이 체감되었다.
‘진짜 짧게 끝났네.’
원래 게임에선 실속 없는 대화만 나누는 데에
‘뭔갈 원하고 있는 건가?’
아펠니오스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라온이 빠르게 성장하는 루트에서 아펠니오스, 아니 황금 명가와의 엮임은 거의 없는 편이며 있다고 해도 방해만 될 뿐이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멀어지는 방법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 나올 줄이야…….
‘이제 원작 흐름은 크게 의미가 없나?’
아니,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
아직 메인이벤트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곧, 내가 가진 정보가 쓸모없어질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많은 걸 얻어야 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대비할 수 있도록.
“그럼 가자.”
“어디로요?”
“숙소로 가서 짐 챙겨야지. 먹을 것도 잔뜩 챙겨놔. 짧아도 2주일 정도는 노숙해야 하니까.”
“헉…….”
공주와 데자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처음엔 부담스럽다느니 뭐니 하더니, 이젠 아예 익숙해졌나 봐?”
“그, 그게-”
“아, 아니에요! 저흰 노숙도 잘 해요! 자! 얼른 가죠!”
데자트가 순순히 인정하기 전, 공주가 데자트의 손을 잡고 서둘러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거기 길 아닌데.”
“앗.”
에휴.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은 아벨라가 물었다.
“저… 그럼 음식은 어떻게 챙길까요? 채식 위주로?”
“그냥 고기로 잔뜩 챙겨. 쟤네 고기를 더 좋아하니까.”
“……네? 억지로 먹은 거 아니었어요?”
“설마.”
엘프도 고기 다 먹는다.
애초에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종족이라면 둘 다 안 먹어야 정상 아닌가?
식물과도 교감하고 대화하는 애들이 채식을 고집하는 것도 이상한 거다.
“누가 그래?”
“책에서…….”
“책들이 다 엉터리네. 됐고 쟤네나 다시 불러와.”
“언니들…! 빨리… 와…!”
공주와 데자트가 다시 돌아오고.
오늘 살 걸 미리 기록해놓는 아벨라의 메모지를 힐끔 보고, 내일 향할 곳을 말해주었다.
“내일, 천관산으로 간다.”
“네? 거긴 왜요? 출입 금지 지역이잖아요!”
“방금 허락받고 왔잖아.”
“아.”
“그리고 가서 찾을 게 있어.”
“뭔데요?”
난 궁금증이 가득한 공주를 보며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천마신검.”
“오옹…. 단검? 장검? 대검?”
“근데 지팡이야.”
“……네?”
그럼 그게 왜 검이야.
공주의 표정은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 * *
푸드드득!
나뭇가지 위에 앉아 쉬고 있던 새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날아왔다.
이내, 나무 아래에 키가 큰 노인이 걸어온다.
험한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도 아니구만.”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는데…….
아무래도 이 고위 던전에는 그가 찾는 것이 없는 듯했다.
잊혀진 신의 추종자, 퓨수아.
그가 찾는 것은 오로지 실종된 신의 흔적뿐이었으니.
‘다음 장소는…….’
그의 기감이 대륙 전체를 훑었다.
안에 담긴 생명 하나하나를 살필 순 없으나, 적어도 고위 던전처럼 공간을 일그러트리고 마력을 빨아들이는 존재가 있다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직 열린 데는 없어 보인다.
그럼 이 근처의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구만.
황금 명가, 이즈벨라 가(家)가 크게 후원하며 쌓아올린 아즈벨라 도시.
거기라면 충분히 즐길거리가 있을 테니까.
‘나중에 신께서 돌아오신다면 올 곳 리스트에 적어놔야겠어.’
그는 마음 속의 리스트에 아즈벨라 도시를 기록한 후.
도시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흠.”
느낌이 좋았던 게 이거였나?
“이거 참 우연이로군. ”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을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