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실없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둔갑을 잘한다고 한들, 엘프 공주인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인간이었어.’
아무리 괴물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리 생각했었다.
‘아, 엘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우릴 도와주러 왔구나!’
대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엘프에 대한 존재와 중요도를 안다.
엘프는 세계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탄생시킨 종족인 만큼, 이 종족을 죽인 자는 세계의 미움을 받는다.
세계에 자신의 업적과 이름을 박아넣고, 그에 합당한 힘을 받고있는 대마법사라면 결코 엘프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니, 호의적인 관계를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저 남성분…… 공주님과 저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
대마법사라고 해도, ‘공주’와 ‘수호자’에 대한 존재를 알 순 없다.
이는 엘프들의 기밀이며,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에게 인정을 받은 대마법사라고 한들, 그 이상은 접근할 수 없을 터.
그러니 샤흐와 데자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녀와 데자트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니, 그녀의 아버지인 엘프왕 정도인데…….
‘아닌데?’
그녀의 통찰안엔, 엘프왕의 흔적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그뿐이랴?
‘대마법사가…… 맞나?’
보면 볼수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공주로서 수많은 엘프를 봐왔고, 이는 수많은 강자를 봐왔다는 뜻과 같았다.
강자들은 특유의 느낌이 있다.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롭고, 세계로부터 인정받아 존재만으로 빛나는 그 느낌이.
하지만 라온에게선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가진 분위기는 절박함에 가까웠다.
마치, 생존만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 생존자처럼.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아예 썩어 넘치는 것처럼 자연스레 툭툭 던지는 걸 보면 부자인 척 연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태도나 분위기는 결코 꾸며낼 수 없는 부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그럼 대체 왜 그런 분위기를……?
‘아니면 정말로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게 아닐까?’
데자트는 그가 여유롭게 싸웠다고 하지만, 그건 겉모습뿐이지 않는가.
실제로 정말 그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데자트를 여러 번 도와주고 구해줬다면…….
‘……데자트가 너무 크게 빚진 거 아닌가?’
피라미드에서 구해줘, 먹고 재워줘, 싸움에서 다치지 않게 도와줘…… 물론 데자트가 좀 고생하긴 했어도, 그 정도는 뭐…….
아무리 봐도 그녀의 빚이 더 큰 거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갚아야 돼.’
여기서 마음의 빚이 더 쌓인다면, 미안해서라도 그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 물론 안 갚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당연히 갚을 거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리 성숙하지 않은 건 알고 있으나, 그녀는 엄연한 ‘공주’였다.
수많은 엘프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
그런 지도자가 이런 빚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그와 별개로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보기 힘들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한 1.5배 정도로…….’
근데, 어떻게 갚지?
오늘 쓴 돈만 해도 천문학적인 금액까지는 아니어도, 몇 년은 바짝 벌어야 벌 수 있는 돈인데…….
“흥, 흐흥~”
샤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몸에 물을 끼얹어주는 데자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별걱정 없어 보이는 표정.
혹시 방법이 있을까 싶어, 샤흐가 그녀에게 물었다.
“데자트.”
“네?”
“혹시, 빚을 갚을 좋은 방법이 있어?”
“음…….”
데자트는 샤흐와 더 놀고 싶은 분위기였지만.
샤흐는, 데자트와의 해후만큼이나 이 사건도 중요했다.
노는 건 일이 끝나고 놀아도 되니까!
“일단… 같이 다니다 보면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보다 보면 그는 제 무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으니까요.”
“데자트가 도움이 돼?”
“…….”
데자트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 모습에 진심으로 미안해진 샤흐가 사과를 건넸다.
“……미안.”
“……흥. 공주님이니까 봐 드릴게요. 아무튼, 그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는 해도 실질적인 무력은 낮잖아요? 그래서 저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어요.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찍어누르거나, 상급 기사급들을 여럿 상대하거나.”
샤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럴 때마다 무력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빚을 갚는 거죠.”
“그런데, 그런 전투가 매번 있을 리가 없잖아. 평소에 우리가 밥 먹고 하는 게 더 돈이 들지 않을까?”
“아.”
그녀는 그걸 생각하지 못한 듯, 멍한 소리를 냈다.
분명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데자트는 방금보다 조금 더 쭈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적어도 이자는 갚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음….”
그런가? 대충 몸값이 얼마인지 모르니 어림짐작도 잘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인간들이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법에 능숙했지, 정체를 숨기는 마법에는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가라던가 그런 요소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단 공주님을 찾기가 목표였으니까 이 다음은 크게 생각을 안 해봐서 모르겠어요…….”
데자트가 잔뜩 시무룩해진 채로 말했다.
샤흐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우리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내일 이야기를 꺼내 보고 말해보자.”
“그럴까요?”
데자트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직 조금은 시무룩한 기분이 남아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기껏 재회했는데 분위기가 개판이 될 것이다.
샤흐는 어떻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싶다가, 욕조에 가득 담긴 물을 보곤 미소 지었다.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에잇!”
참방!
“꺅!”
뜨거운 물이 갑자기 덮쳐오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은 탓에 손으로 쓸어올린 데자트의 시야에 말괄량이 같은 미소를 지은 샤흐가 보인다.
샤흐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에 물을 가득 담고 있었고, 그 모습에 데자트가 미소를 지었다.
“뭐에요? 결투 신청?”
“응! 우리 오랜만에 물장난이나 치자!”
“좋아요! 그럼 우리 공주님, 얼마나 자랐는지 수호자인 제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아! 물론 몸은 하나도 안 컸…….”
“더 컸거든?! 둘레가 0.2cm 늘어났어!!”
오랜만에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둘은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 서로에게 물을 날렸다.
* * *
촤아악!
“으아악! 항복!”
샤흐는 잔뜩 젖은 채로 항복했다.
그에 비해 크게 젖지 않은 데자트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공주님이 아직 절 이기시려면 한참 멀었어요!”
“으으. 치사하게 마력까지 쓰는 게 어디 있어.”
“공주님도 쓰셨잖아요?”
“……그런데, 우리 여기 너무 더러워진 거 아니야?”
“네?”
그제야 둘은 욕실을 둘러보았다.
한 5명은 들어와도 넉넉할 거 같은 욕실 안이 잔뜩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른 여관이었다면 추가 비용을 청구했을 법한 상황!
하지만.
“아, 괜찮아요?”
“응?”
“이런 거 하나하나 돈으로 따지면서, 괜히 귀족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양주 하나만 시켜도 메꿔질 금액이기도 하고.”
이런 고급 여관은 ‘귀족’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이다.
당연히 귀족은 평민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돈을 쓸어 담는 위치이며, 이런 곳에 오는 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이런 자잘한 것에 신경을 써서 비용을 괜히 기분을 상하게 만들며 돈을 쓰게 만드는 것보다, 그냥 마음 편히 있도록 만들고 다른 일로 돈을 버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비싼 여관인 만큼, 웬만한 건 다 있었으니까.
“그럼 슬슬 나갈까요?”
“응? 그럴까?”
“자, 그럼 수건을 두르시고…….”
“앗. 잠만! 나 아직 안 닦았는데……!”
“에이, 얼른 나가봐요, 나가봐.”
샤흐는 몸에 수건만 두른 채 밖으로 쫓겨났다.
혹시 물이 후두둑 떨어질까 봐 조심했지만.
후우웅!
“!!!”
“어때요? 이거 짱이죠?”
마력이 몸을 쓱 지나가면서 몸과 머리, 그리고 수건의 물기까지 전부 말려버리는 기적(?)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위 마법사인 그녀는 방금 발동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았고, 마법을 담은 아티팩트가 얼마나 정교한지 알았다.
이런 게…… 겨우 객실 바닥에 깔려 있다고?
몸이랑 머리 좀 말리라고?
“…….”
충격을 먹어 할 말을 잃은 그녀와 달리 데자트는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커다란 수건을 가운처럼 두른 그녀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자! 얼른 들어와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구는 모습에, 샤흐가 말했다.
“데자트… 많이 익숙해졌구나….”
“네? 아, 그게…….”
데자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도 이걸 딱 한 번 경험해봤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펄쩍 뛰며 신기해하고 싶었지만…….
‘촌티 내지 마.’
‘……뭐, 뭐?! 촌티?! 말 다 했어요?!’
어제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 라온에게 한 소리를 들은 만큼,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공주님한테 내가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
암!
“자, 얼른요!”
“……나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럼요, 그럼요!”
아마 라온이랑 다니면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해질 것이다.
그는 이런 비싼 여관에서만 머물렀으니 말이다.
“에잇!”
“앗!”
그녀는 잔뜩 어색해하는 샤흐를 덮쳤다.
마치 자매처럼 침대 위를 뒹굴며 놀다 보니, 금세 슬슬 잘 시간이 찾아왔다.
둘 다 푹신한 이불에 몸을 누였다.
데자트가 행복한 웃음 소리를 흘렸다.
“후후… 너무 좋다….”
같이 다니면서 많이 누워본 게 아닌가?
왜 이리 처음 와본 사람처럼 행복해하지?
“혹시 어제 갔다던 곳은 별로였어?”
그래서 그리 묻자, 데자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아뇨. 여기보단 별로였지만, 나름 제일 비싼 여관이었거든요. 거기도 되게 푹신했어요.”
“그런데 왜?”
“그땐 말이죠…….”
데자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샤흐가 빠르게 벗어나려고 했지만.
“공주님이 너무 부족했어요!”
“으게엑!”
그 전에 데자트가 그녀를 꽉 껴안아 가슴으로 얼굴을 압박하는 게 더 빨랐다!
강한 힘에 버둥거리다가, 슬쩍 힘이 풀리자 숨통이 트인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좀만 더 컸으면 큰일 났겠다.’
안 그래도 힘도 센데, 여기까지 컸다면…….
그나마 좀 작아서 다행인 것 같…….
“공주님?”
“으, 응?”
“이상한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샤흐는 급히 부정하며 그녀의 품에 꼭 안겼다.
샤흐에 비해 훨씬 키도 크고, 검을 수련한 탓에 딱딱하지만 넓고 따뜻한 품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품.
그녀는 다시금 되새겼다.
‘꼭 갚아야 돼.’
데자트의 무력만 이용하는 게 아닌,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이 진 빚을 갚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그 쇠사슬…….’
그가 손목에 두르고 있던 유물(遺物)로 추정되는 쇠사슬.
예전이지만, 아버지를 통해 저 본래 쇠사슬에 달려 있어야 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걸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