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럼 다음에 또…….”
“또 보는 날엔 자네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겠는데.”
“……또 뵙지 맙시다!”
다섯 번째 가게를 벗어나면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얼마나 지갑으로 지랄하고 다녔으면, 보이는 가게마다 엘프를 눈에 불에 켜고 찾고 있었다.
공주의 지갑을 훔친 놈이 사용한 방식은 간단했다.
엘프의 모습으로 변장한 다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지갑을 맡기고 먹고 싶은 걸 모두 시킨다.
그리고 지갑을 가지고 튄다.
‘원래라면 이런 마을에선 먹히지 않을 방법이긴 하지만…….’
엘프라는 종족으로 변신한 게 문제다.
엘프는 신비로운 종족이다. 신비로움이란 없던 믿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지갑을 맡기고 돈을 나중에 내겠다는 짓거리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런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엘프는 돈이 많았다 보니 크게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믿음을 배신으로 받은 사장들이 화풀이 겸으로 마구잡이로 사람을 풀어 찾기도 했던 것이고.
어차피 부자 도시에서 장사하는 만큼 돈은 많을 것이고, 이들이 찾고자 하는 건 돈이 아닌 잃어버린 ‘신용’이었으니까.
‘이제 다 끝났지만.’
“……진짜 돈이 많나 보네요.”
“얼마 안 해.”
물론 신용도 돈으로 살 수 있다.
돈을 대충 1.2~1.5배 정도로 뿌리면 알아서 입을 닫는다.
덕분에 백금화 한 닢을 쓰긴 했지만, 이걸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면 손해는 아니었다.
“아직 많이 남으셨어요?”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대충 아벨라에게 말하라는 눈짓을 보내자, 아벨라가 나 대신 주머니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100배 정도로….”
“100배?!”
대충 내가 얼마나 낸 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엘프 둘이 크게 기겁했다.
둘은 나와 후다닥 멀어지더니, 자기들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다만, 내 청각이 그들 상상 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에 대화가 다 들렸다.
“우리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갚지? 우리가 갚으려면 몇 달은 걸릴 텐데….”
“그러니까요…… 또 엄청 단가가 쎈 거만 골라서 해야 하는데, 일단 그러려면 막노동이나 모험가 길드에서…….”
“갚을 필요 없는데.”
“?!”
내가 대화를 하자 어떻게 엿들었냐는 표정으로 경악한다.
아니…… 얘네 단체로 왜 이래?
왜 이리 하찮아진 거야?
왠지 머리가 아파졌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둘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다음은 없다.’
그리 생각하니, 아픈 머리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예전이야 캐릭터가 죽는다면 그대로 리타이어함으로서 재시작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죽는다면 두 번은 없다. 그러니 최대한 안정적으로 활동을 해야 했다.
혹은, 이들의 무력을 수준급으로 끌어올려 놓거나.
‘이번에 무기를 회수한다면…….’
아마도 천마신검이 있을 테니, 그걸 중심으로 이들을 강화해야겠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이 무기들을 회수하고, 다음 걸 회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또 메인 스토리 같은 중요한 사건은 이 시점에는 터지지 않기 때문에 강화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할 만했다.
‘그래도 신수는 이 시점에 구할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투자야.”
“투… 자…?”
“어.”
난 방음 마법을 펼쳐, 근처에서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다음 말을 이었다.
“귀하신 엘프 공주님의 호감을 사는 데 이 정도 돈은 별거 아니지.”
실제로도 별거 아니다.
아마 한 번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지구 기준으로 1억은 ‘기본’으로 태울 수 있는 이들이 수두룩할 테니.
아마 지금도 대륙 어딘가에선 그냥 엘프를 만나는 데에도 억 이상의 돈을 쓸 거부들이 많았다.
겨우 몇천만 원으로 호감?
오히려 좋아.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그… 저….”
내 말에 엘프 공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좋아. 좀 꼬셔졌나?
물론 이성적인 꼬심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나를 ‘동료’로 여기기 위해선, 인간으로서 꼬셔야 하는 건 맞았다.
이 정도면 호감이 좀 쌓였으려나.
“그… 그니까… 일단… 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야.”
존댓말을 쓸까 싶다가, 그건 라온의 성격상 맞지 않으니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엘프 공주는 그런 걸 신경 쓸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당연한 예의를 갖춘 그녀는 허리를 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말하지 않고 잠시 망설인다.
“?”
내가 뭐 더 할 말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 아니에요….”
‘왜 수줍어하지.’
엘프 공주는 더 무어라 하지 않았다.
뭐지… 어느 포인트에서 저리 부끄러워하는 거지?
‘일단 내가 대쉬하는 게 아닌 건 알 텐데.’
공주의 혈통은 고귀하다.
짧으면 몇백 년, 길면 몇천 년 동안 태어나지 않는 왕(王)의 운명.
왕이란 무엇인가?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며, 나라가 문제없이 굴러가도록 만드는 자리인가?
아니면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인가?
적어도, 엘프들의 왕은 전자에 가까웠다.
그를 편히 하기 위해 세계는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 자신을 향한 감정을 알아차릴 힘을 주었다.
아직 ‘공주’에 불가하니 완전히 다룰 순 없을 터이나, 최소한 감정의 편린 정도는 보일 터.
그러니 내 말에 그런 쪽의 욕망이 없는 건 알 테고…….
‘공주라고 불러서?’
순간 떠오른 생각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공주라고 해서 부끄러워한다고?
그 말괄량이가?
‘공… 뭐라고?’
‘공주요, 공주! 자! 빨리 절 공주님으로 모시세요!’
‘미쳤군. 그냥 갈게.’
‘자, 잠까마안! 취소, 취소! 대신에 공주라고만 불러줘요!’
‘사람들 앞에서도?’
‘……거기선 말고.’
‘공주님 행차하신다! 모두 길을 비켜라!’
‘꺄아아아아아악!’
설마 그럴 리가.
공주라고 불러주면 아주 환장하던 애였는데.
그래서 내가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꽈악-
“?”
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화 속성이 담긴 돌 하나를 완전히 먹어치운 스칼라는, 왠지 모르게 잔뜩 적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프 공주를 대상으로.
“……오빤 내꺼야.”
“난 내꺼야.”
내가 옆에서 사소하게 말했지만.
스칼라에겐 크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넘보지… 마….”
“…넘보기는 무슨! 전 인간에겐 관심없거든요?! 그리고 전 공주! 설마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리가 있겠어요?”
“그런 공주가… 지갑이나… 훔쳐지고….”
“…….”
“저, 스칼라? 그렇게 막 때리면 안 돼.”
아벨라가 소심하게 나서서 스칼라를 막아주었다.
물론 전혀 도움은 안 된 거 같지만.
야야. 애 운다.
* * *
뒤처리를 끝내고 나니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이 시간대라면 암살자가 더 활발하게 활동할 때이니, 나서는 건 좋지 않았다.
최소한 나서려면 현 시점의 엘프 공주의 무력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니…….
“……응? 저도?”
“당연하지. 그럼 밖에서 자려고?”
난 어느샌가 고급 여관으로 끌려온 탓에 눈을 깜빡이는 엘프 공주를 두고 방 두 개를 구매했다.
대충 일주일 치를 끊고, 키 하나를 데자트에게 던졌다.
탁!
“하나 편하게 써. 일단 일주일을 예약해놨으니까. 안에 물품은 다 있을 거야.”
“…여기 엄청 비싼 데 아니에요?”
“나 돈 많아.”
내 돈지랄이 상상을 넘어가자, 둘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연히 마음의 빚으로 쌓이고 있을 터.
당연히 나도 그걸 안다. 그러니 일부러 말을 덧붙였다.
“정 불안하면, 나중에 나랑 같이 돌아다니면서 갚던가.”
“……그래도 못 갚을 거 같은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난 데자트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쉬고, 내일 아침에 내 방으로 모여.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침에요…?”
“잠 안 자?”
밤에 모이라고 하면 괜한 오해를 할 거 같아서 한 말이다.
그리고 굳이 내가 오해를 피하고자 한 이유는, 당연히 엘프 공주를 동료로 영입하기 위함이다.
동료 영입 방법 두 번째.
이성적인 호감이 없음을 어필하기.
“…….”
날 바라보는 엘프 공주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일단 첫 단추는 잘 끼운 거 같고.
‘동료 영입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본래 게임에선 아무리 빨라도, 합류하는 데에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이게 게임 시간이 될 때도 있었고, 실제 시간이 됐을 때도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이왕 최대한 빠르게…….
아. 생각해보니 본래 시점보다 몇 배는 빠르구나.
이제야 게임 시작 시점에서 2개월.
이번에 무기를 얻고 천마 신교를 조금 억눌러놓는다면, 마음을 조금은 느긋하게 먹어도 될 거 같다.
* * *
“푹신하고 시원하고 안전한 침대다!”
물컹!
데자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탄력에 의해 몸이 위로 퉁 튀어 오르고, 떨어지는 몸을 푸근한 이불이 감싸 안는다.
그뿐이랴.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올라갔음에도 이불 위는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청결 마법이 적용되고 있다는 뜻!
자하라 사막에서 제일 발달하긴 했으나, 그래봤자 사막의 대도시에 불가한 아벨론에선 볼 수 없는 최첨단 시설이었다.
“헤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이불에 볼을 부비었다.
아아, 이게 천국이로구나.
이런 걸 모르고 살았다니. 인생 손해 봤어.
“그…… 데자트.”
그때 그녀의 뒤에서 엘프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천국에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트럼프 소리를 듣고 있던 데자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승으로 돌아왔다.
“헉! 네, 공주님! 공주님도 얼른 여기에 누워보세요! 여기가 진짜 천국이에요!”
“진짜?”
“네! 진짜 돈값 하네요…….”
아까 그녀는 라온이 100이라고 적힌 금화를 내민 것을 봤다.
100골드라면, 둘이 가지고 다니던 전재산에 가까웠다.
그걸 그냥 쓰다니.
심지어 공주가 잃어버린 지갑으로 사고를 치고 다닌 놈 때문에 더한 금액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라온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정확히는 귀족답게 돈을 쓰는 면모랄까.
이는 그녀가 라온과 꽤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고, 엘프 공주는 전혀 아니었다.
“그…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
“네?”
“되게 편해 보여서….”
“아… 그게 말이죠….”
데자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부담감을 느끼긴 했지만, 뭐랄까.
그의 성격을 알아서인지 엄청난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사실 부담을 느낄 거면 진작에 느꼈어야 했다.
피라미드에서 구해준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는 마치 운명을 알고 걷는 ‘선도자’처럼 그녀를 생존하는 길로 이끌어주었으니까.
‘어? 그럼 나 빚쟁이 아닌가?’
그동안 받기만 했는데?
갑작스레 떠오른 현실에 그녀가 잠시 침묵한다.
침묵을 다르게 이해한 듯, 엘프 공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가 천천히 설명해드릴게요. 저희 일단은 침대 위로 올까요?”
“응? 응.”
“아니다! 저희 목욕하죠!”
생각해보니 이미 같이 싸우고, 공주님에게까지 모셔오고 했으니 대충 된 거 아닐까?
물론 부족한 거 같긴 한데, 그건 천천히 갚으면 되고!
만약 멀리 떨어진다면 그녀도 금방 갚으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부담을 갖지 말라고 해도 빚은 빠르게 갚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같이 움직일 가능성이 컸고, 그도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했으며,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까지 생각한다면…….
그럼… 부담을 느낄게, 지금 당장 받은 것들 뿐인가?
‘생각보다 금방 갚겠다!’
고민이 해결된 데자트는 잔뜩 신난 모습으로 목욕을 준비했다.
입고 있던 로브를 집어던지고, 안에 입고 있던 얇은 가죽 갑옷도, 속옷도 벗어 던져 알몸이 된 그녀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수증기로 가득찬 욕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욕실 안에 배치된 목욕 도구들을 꺼내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공주님! 제가 오랜만에 씻겨드릴게요!”
“……샤흐.”
“네?”
“숲 밖으로 나와선 샤흐라고 부르기로 했잖아.”
“하지만 여긴 건물 안…….”
“안 돼! 샤흐라고 불러!”
“……넹.”
엘프 공주, 아니 샤흐는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손부채질로 식혔다.
자신이 공주인 걸 알았지만, 그리 불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봐온 데자트에게 불려도 부끄러운데, 심지어 오늘 처음 인간에게까지 불렸다!
‘진짜 이 호칭은 적응 안 될 거야.’
만약 데자트가 없어져서 누구도 공주라고 불러줄 사람이 없어져서 자신이 ‘결핍’을 느끼지 않는 한.
절대 그녀가 공주라고 부르라고 하는 날이 올 것 같진 않을 것 같았다.
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는 죽어도 듣기 싫었고 말이다.
“자! 얼른!”
팡팡!
데자트가 욕조를 가득 채운 물을 치며 그녀를 재촉했다.
결국 데자트와 마찬가지로 알몸이 된 샤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샤흐의 등은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두드러기나 여드름 같은 게 난 건 아니지만, 눈에 띌 정도로 피부가 상해 있었다.
데자트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의 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내가 떨어지지만 않았어도…….’
등의 피부가 상한 건 그녀가 거친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엘프란 자연의 종족으로, 거친 바닥에서 잔다고 피부가 상하지 않는다.
그녀의 피부가 상한 건, 오로지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
‘얼마나 고생하셨으면…….’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게 온몸에서 티가 났다.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피부가 꼬질꼬질했고 머리도 자세히 보면 떡져 있었으니까.
그녀는 물에 살짝 손을 담가 온도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다. 그럼 제가 이쁘게 씻겨드릴게요! 그보다, 이렇게 씻는 것도 되게 오랜만이다. 그쵸?”
“그치…….”
둘 다 숲을 벗어난 이후부터는, 자잘한 싸움에 휘말려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숲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녀는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왕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입장.
당연히 돌아갈 수 없으니, 거의 떠돌이에 가깝게 생활했어야 했다.
그나마 돈은 넉넉해서 괜찮았지만, 이번에 지갑을 분실하면서 큰일이 나버렸고 말이다.
‘이제 어떡하지…….’
지갑 말고 그냥 주머니에 넣어둔 돈이 있어서 버틸 수 있지만, 이젠 그것도 없다.
데자트와 함께 온 남자가 돈이 많아보이긴 했지만, 당연히 의지할 순 없었다.
그녀는 공주였으니까.
철퍽-
“어때요? 온도 괜찮아요?”
“응. 딱 좋아.”
“그럼… 씻는 동안 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려드릴게요. 무슨 일이 있었냐면요…….”
데자트의 이야기는 한 달 전, 그녀와 처음으로 갈라진 시점부터 시작됐다.
“공주님을 쫓던 놈들을 따돌리다가 실수로 도약을 잘못 사용해서 피라미드에 갇히고… 나가려면 피라미드 왕을 잡아야 해서 계속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한 한 달 정도 지나니까 그 사람이 들어와서….”
데자트에겐 말을 잘하는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데자트와 오래 지내온 샤흐에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재주가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데자트의 말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겨우 마을을 찾아서 쉬려 했더니 함정이고… 겨우 목욕하는데도 독이 있던 흔적이 있어서 찝찝하고… 아무튼 엄청 힘들었어요….”
“엄청 힘들었겠네….”
솔직히,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말 그대로라면, 라온의 경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신체 능력은 기껏해야 하급 기사 수준에, 다룰 수 없는 마법은 보조 마법뿐이며.
무기라고는 몸에 두르고 있던 특이한 쇠사슬과 다양한 아티팩트 정도다.
하지만 그는 상급 기사 중에서도 완숙한 경지, 다음 경지를 넘어볼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데자트를 제압했다.
그뿐이랴. 오로지 쇠사슬과 보조 마법들로만 스스로를 피라미드 왕이라 칭한 괴물을 함께 죽였으며.
뒤에 마을 전체를 함정으로 삼고 덤벼든 천마신교의 공격도 모두 막아내고, 역으로 모두 쓸어버렸다.
만약 상급 기사, 아니 중급 기사만 되어도 ‘그래. 그럴 수 있지’하고 억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마력만 많고 다른 건 다 평균 이하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마법조차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가?
‘대체 어떻게…….’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다면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그동안 엘프 공주인 샤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미지(未知)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사실 인간으로 둔갑한 엄청 커다란 괴물인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