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델 리그벨토입니다.”
‘뭐?’
난 의외의 이름에 놀랐다.
기껏해야 원로나 벨, 세르바, 마벨 리그벨토 정도가 힘을 쓴 줄 알았는데…….
델 리그벨토라고?
델 리그벨토가 가진 호칭은 다양했다. 떠돌이, 방랑자 등등. 그러나 근본적으로 품은 뜻은 모두 일치했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영혼.’
고위 귀족의 직계임에도, 권력 다툼에 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떠돌아다니며, 은거 기인이나 숨은 힘을 찾아다니는 마법사.
형제들 중에서 현재로서는 제일 얌전한 이였다.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이고, 권력을 향한 탐욕은 웬만한 고위 귀족 못지않지만.
아무튼, 현재로서는 본심을 숨기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지금 나설 이유가 전혀 없는데…….
‘아직 그가 제대로 본심을 드러내려면 1년이 남았는데.’
내가 직계로서 완전히 파문당하기 직전에 방랑하면서 쌓아온 인맥으로 강력한 후계자인 벨 리그벨토에게 도전장을 날렸다.
아직 그 정도로 세력이 쌓이지 않았을 테니 가만히 있는 게 당연했는데…….
‘뭔가 꼬였나?’
대체 어디서부터?
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껏 싸그리 정리해놓은 본래 흐름대로 흘러가는 게 전투밖에 없으니, 뭔가 허무하달까.
그냥 좀 원작대로 진행시켜주지, 참.
“또 다른 명령은.”
“어, 없습니다.”
“날 사막에 떨어트리라고만 했나?”
“예, 예…….”
난 그를 내려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칠 뻔한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잔뜩 겁을 먹은 모습.
저 모습이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묻는 건 의미가 없겠지.’
델 리그벨토의 성격상, 이 이상 완전히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을 터.
이미 나를 사막에 던져놓으라고 한 것부터 선을 넘었다고 할 순 있지만.
그 정도는, 고위 귀족 특성상 ‘시련’이라 넘길 수 있다.
만약 이 이상 넘어가 나를 죽이라고 했다면 골치 아파지지만, 딱 이 정도 선은 정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물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어차피 시켰어도 침묵의 마법을 걸었겠지.’
아무리 나라도 계약 방식의 마법은 풀 수 없다.
그건 체내의 마력을 흡수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약을 맺을 때 걸었던 조건을 채워야 했다.
‘이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그럼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죽여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니다. 그건 나비 효과가 아니다 드래곤 효과였다.
그렇다면…….
“하던 대로 해.”
“……예?”
그가 귀를 의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본래라면 이대로 내가 그의 목을 베어도 이상하지 않다.
고위 귀족의 직계. 심지어 리그벨토라는 성을 이은 이상, 웬만한 고위 귀족과 동급으로 취급을 받으며, 감히 워프 게이트를 조작해 죽이려든 것은 고위 귀족 시해와 같은 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나름 황실의 지원을 받는다고 한들, 목이 날아가는 건 피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건 평범한 귀족의 이야기였고.
그가 원작에서 얼마나 이 도시를 잘 통제했는지 아는 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괜히 죽였다가 큰일날라.
“하던 대로 하라는 얘기다. 오늘 있던 일은 없던 일로 생각하고, 다스리던 그대로 해.”
“그러면……!”
“단.”
난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한 번 더 수작을 부리면, 그날로 이 도시뿐만 아니라 네 가문을 멸망시킬 거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일 워프 게이트를 쓸 거니까 준비해두고.”
“어, 어디로…….”
“천관산.”
“알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차게 외쳤다.
난 손을 내저었다.
“이제 나가.”
“예, 예! 그럼!”
그는 후다닥 문밖으로 나갔다.
쾅!
얼마나 급하게 나갔으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힐 정도였다.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소심한 변명을 남기고 사라졌다.
‘바, 바람 때문에 세게 닫힌 겁니다!’
피식-
저 아저씨 웃기네.
난 피식 웃으면서 내 손을 품으로 끌어들인 스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대로 있으면 불편할 테니, 그녀를 안아 들어 여분의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따뜻하게 이불까지 덮어주고, 혹시 모르니 몸 상태까지 체크한 다음 아벨라에게 다가갔다.
‘목에 흉터가 남을 거라고 했지.’
암살에 특화되어있다고는 하나 상급 기사에 오른 이가 남긴 상처다.
아벨라의 육체는 아직 제대로 단련되지 않았으니 재생력이 부족했고, 포션을 들이붓고 사제가 신성력을 쓰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선물이라도 줘야 하나…….’
괜히 나 때문에 흉한 흉터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흉터가 빛나는 아벨라의 외모를 가릴 수도 있고, 나중에 괜한 구설수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기 위해 남자라도 만나거나 할 때, 목의 흉터 때문에 무슨 소리를 듣는다면…….
마음이 좀 아플 것 같았다. 물론 그 남자 놈은 나한테 뒤질 거고.
“……이제 다 끝났죠?”
“어.”
데자트의 말에 무심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왠지 모르게 잔뜩 긴장한 눈빛.
아까까지는 따뜻한 곳에서 씻을 수 있다고 잔뜩 좋아하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그… 그게… 으으음….”
그녀는 한 번에 질문하지 않고 잠시간 망설였다.
하지만 대충 그녀가 뭘 물어볼지는 예상이 갔다.
“왜. 내 성이 궁금해?”
“……네.”
“이미 들었잖아.”
난 이 몸의 풀네임을 말했다.
“라온 리그벨토.”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데자트가 뒤로 주춤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것을!
“……당신, 진짜로 그, 그 괴물 가문이었어요?!”
“…….”
* * *
“…안 먹어요, 데자트?”
“으, 응? 아니. 먹어야지.”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자트가 내 눈치를 보면서 깨작거렸다.
내 성이 드러난 이후로 저 반응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해놨길레, 나름 수호자 직위까지 가진 그녀가 겁을 먹는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
정확히는 ‘성’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
본래 데자트는 정신이 완전히 마모된 상태였기에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고.
내가 유일하게 친밀도를 쌓아,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했을 때 즈음엔.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끄으응….”
“왜 그래요?”
“아니에요… 스, 스칼라. 이거 더 먹을래요?”
“맛… 없어….”
“앗….”
내가 스칼라를 아끼는 걸 아는지, 더 챙겨주려고 하기까지!
아무래도 내가 고위 귀족이라는 걸 듣고 아예 쫄은 모양이다.
고위 귀족, 특히나 리그벨토 가문처럼 명가로 불리는 가문은 엘프와 비견된다.
한 명이 오랜 세월을 지내며 쌓아올리는 업적을, 가문과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속해서 계승하며 따라잡는 것!
그뿐만 아니라, 현재 대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건 인간이 세운 제국이니, 제국의 공작을 상대로 일개 엘프가 쪼는 건 이상한 게 아니긴 했다.
‘그래도 뭔 나를 괴물 보듯이…….’
너 원래 그렇게 나 안 봤잖아?
쨍그랑!
“아, 앗! 죄, 죄송합니다악!”
아예 긴장해서 포크까지 떨어트리곤, 내 눈치를 보며 바로 도게자를 박을 준비를 했다.
참내……
난 고개를 내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계속 신경 쓰면 가문 지하 감옥에다가 넣어버린다.”
“히이익!”
“평소처럼 굴어.”
“네, 넵….”
저래도 좀 걸리려나.
그보다 저것도 참 의외다. 공작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런 걸 신경 쓸 줄이야.
아니면 ‘공주’를 직접 모시는 수호자이기 때문에, 이런 직위에 더 예민한 걸 수도 있었다.
“다 먹었어?”
“네에….”
“아벨라, 이리 와봐.”
난 아벨라에게 손짓했다.
목에 붕대를 두른 아벨라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밥은 어때. 맛은 느껴져?”
“네에에.”
“침 삼킬 때는 안 아프고?”
“괜찮아요….”
“막 쓰라리거나 하진 않지?”
“네에….”
흉만 졌지, 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사람 일이 그렇듯, 말한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확인은 필수였다.
난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붕대를 풀었다.
붕대를 풀자, 목을 가로지른 기다란 흉터가 보인다.
난 조심스럽게 흉터를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
내가 사과하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미안해해요….”
“괜한 흉터가 남았으니까. 괜히 네 예쁜 외모에 흉이 졌잖아.”
“예, 예쁜……?”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뭐야. 괜찮아?”
“괘, 괜찮아요!!”
아벨라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얼굴뿐만 아니라 아예 귀까지 빨개져 있다.
어디 아픈가?
“……뭐지. 일부러 한 게 아닌가?”
옆에서 데자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시선을 돌리자, 데자트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대체 뭐야?
“…오빠….”
“응?”
“…아니야….”
어느샌가 내 무릎에 앉은 스칼라가 날 불렀지만.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야, 단체 몰카인가.
‘별거 아니겠지.’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벨라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은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나중에 흉터를 가릴 수 있는 걸 줄게. 계속 붕대를 두르고 다닐 수 없으니까.”
“네, 네….”
“너 괜찮은 거 맞지?”
“무, 물론이죠!”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영 믿음이 가질 않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좀 아프면 내가 금세 발견할 수 있으니까.
“만약 또 아프면 말해.”
“약… 속…”
아래에서 스칼라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벨라는 그녀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스칼라는 그대로 내 손을 잡더니,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 아벨라와 새끼 손가락을 걸게 했다.
“???”
“약속… 꼭꼭….”
그러곤 데자트를 바라본다.
슬쩍 사막 케이크(이름이다)를 입에 넣던 그녀가 새끼 손가락을 들었다.
“……약속?”
“넌 뭐야.”
* * *
천관산.
현 대륙에서 제일 ‘위험한’ 산 중 하나다.
무법지대로 지정된 곳은 아니나, 나무가 울창하고 산길이 험해 짐승이 돌아다니며, 오랜 시간 인간의 손길이 없어 마력에 노출되어 진화한 몬스터들이 지내는 곳이다.
그러나 위험한 만큼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듯이, 보존된 자연의 광경은 아름다웠고, 제일 높은 폭포라 알려진 곳은 비싼 돈을 주고서 고위 마법사를 호위 삼아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덕분에 천관산 바로 앞에는 큰 도시가 세워져 번창할 정도였다. 이 지리와 장소를 탐낸 황금명가에서 거액을 투자한 덕분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미리 말해놓은 물건들로 가득 찬 보따리를 든 마르딘이 내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보따리에서 화 속성의 돌을 하나 꺼내어 스칼라에게 건네준 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조작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내가 던진 농에 깜짝 놀라 펄쩍 뛴다.
난 피식 웃으며 워프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진입 시기가 원작보다 훨씬 이르다.’
천관산은 유명한 위험도만큼이나, 학생 신분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본래 내가 접근하는 건, 튜토리얼 이후로 2년 뒤의 시점.
당연히, 내 정보도 2년 뒤의 시점이었다.
‘아마 정보가 다를 건 없을 거야.’
거대한 집단의 위치 같은 건 겨우 2년만에 바뀌지 않는다.
그 안에 큰 사건이 있으면 모를까, 내 기억에 그런 사건은 없었다.
정말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참가해봤을 테니까.
‘몬스터들도 약하면 약하지, 더 강하진 않을 거고.’
그러니, 가서 일어날 변수는 오로지 천마신교뿐이다.
그들의 세력이야 큰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크지만.
날 죽이기 위해 마을을 통째로 옮긴 놈처럼, 어떤 변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은 얼마나 위험할까.’
바로 천관산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다.
천마신교의 본부는 천관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날 가능성이 적었다.
천관산은 엄연히 다른 귀족의 구역이었으며.
앞에 나름 고위 귀족들이 만들어낸 결계에 보호받는 도시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든 변수가 일어나는 법.
또 얼마나 큰 위험을 찾아올지, 난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는 안 한다.’
다시는 아벨라와 스칼라를 죽음에 밀어 넣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예상 밖의 일이라고 해도, 나름 고인물의 자존심이 있지, 다시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 대처도 필수지만, 둘의 성장도 중요했다.
천관산이라면 더욱더 쉽게 할 수 있을 테니. 아이템은 둘째로 미루고 엘프 공주를 찾은 후, 다음에 수련한 다음에 충분히 준비가 됐을 때 천관산에 들어간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번쩍-!
워프 게이트가 발동되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도착하고서 본 것은.
“으에엥…….”
‘……뭐지, 저 하찮은 생물체는?’
골목길의 쓰레기통 바로 옆에 쭈그려 앉아있는 꼬마 엘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