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나르아가 떠나고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끄응…. 허리가….”
“으으응….”
아벨라와 스칼라가 끙끙 앓으며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멍하니 앉아있다가, 서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데, 누가 보면 쌍둥이인 줄 알 것 같았다.
난 펴지도 못하고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무릎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이것들아. 내 무릎이 다 녹겠다. 대체 왜 멀쩡한 베개를 두고 내 무릎을 베고 자는 거야?”
“!!”
“!!!”
내 목소리에 그제야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아차린 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으아앙! 도련님!”
“오빠아…!”
난 무슨 죽다 살아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달려드는 둘을 품에 안아주면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얘네 왜 이래?”
“흐아암….”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데자트가 크게 하품하며 우릴 바라봤다.
눈곱이 낀 눈을 끔뻑거리다가, 손가락으로 눈곱을 떼 낸 그녀가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말해주었다.
“당신, 열 엄청 펄펄 끓었어. 난 몸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니까.”
“크흥….”
“맞아요… 몇 손수건은 아예 못 쓸 정도가 되어버렸어요….”
아벨라는 코를 훌쩍거리며 품에서 몇 손수건을 꺼냈다.
확실히 뜨거운 열에 노출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망가진 게 보인다.
애초에 얇은 재질이긴 했어도, 겨우 인간의 몸에서 열에 노출됐다고 될 정도는 아닌데….
아, 설마 마력의 영향을 받은 건가? 둘은 그것도 모르고 내 몸에서 나는 열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거고?
난 피식 웃으며 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었다.
“겨우 이 정도에 안 죽어.”
“그래도… 크흥.”
“너 감기 걸렸어?”
“킁… 네… 저만….”
“나는… 멀쩡한데….”
“얘는 훈련을 더 해야겠네.”
난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두둑 소리가 나자, 둘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 무릎에 착 달라붙었다.
둘이 마사지해주는 걸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에 좀 많이 느낀 거 있었지?”
“…네.”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설마, 그런 싸움을 할 수 있을 줄 몰랐어요. 그, 특히 마지막에 이상한 구체에서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단검을 휘감은 것도 그렇고….”
“나중에 네가 다 배울 거야. 그래도 오늘 잘했어. 둘 다 한 번도 안 들키고 잘 숨어있었고.”
“스칼라가 말을 잘 들은 덕분이죠.”
갑작스런 칭찬에 스칼라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난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귀를 쫑긋거리며 내 손길을 받던 그녀가 날 올려다보았다.
“…나도… 빨리… 강해져서… 오빠… 지킬 거야….”
“그래, 그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그래, 그래.”
아직 한참 멀었는데,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귀엽다.
이게 제자를 키우는 기분인가?
“아, 참.”
“?”
“그보다. 엄마를 봤는데, 기분이 어때?”
“…….”
“그 여자가 트라우마의 원인일 수도 있어.”
원래라면 묻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직접 나르아를 보고 엄마라고 말한 이상.
이 정도는 당연히 물어야 했다.
만약 스칼라가 나르아를 보고 죽이고 싶다거나 복수하고 싶다거나 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서 잡아 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도망칠 길은 훤히 꿰고 있다. 고양이가 도망쳐봤자 고양이지.
“괜찮아…….”
스칼라는 별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놀라기만… 했으니까….”
“속성 사용해봐.”
스칼라는 끙끙대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은 분명히 잘 흐르지만, 이상하게 속성이 나오지 않았다.
“안 나오네….”
“천천히 해. 아직 스칼라가 어려서 그래.”
그 여자가 스칼라의 트라우마 대상이 아닌 건가?
하긴, 버려진 게 대충 1~2살 즈음인 걸로 아는데, 엄마라는 건 알아도 그 이상의 감정은 없을지도….
그럼 누가 트라우마의 대상인 거지?
“나도… 얼른… 클 거야…!”
“그래, 그래. 그보다, 날 보면 이상한 생각 안 들어?”
“?”
스칼라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그래?”
‘적대감 1 정도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호감도가 높다든지.
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됐어. 그럼 슬슬, 여길 나갈 준비를 하자.”
“네!”
“응…!”
이제 이 지긋지긋한 피라미드를 나갈 때가 되었다.
* * *
“내, 내가 입을 벌린 채 잤다고?!”
“입 안에 모래 애벌레 들어가던데.”
“거짓말!!!”
퉤퉤 뱉는 그녀를 놀리며 준비를 하다 보니, 금세 나갈 준비가 끝났다.
내가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있긴 했지만, 깡그리 대비해놓아 짐을 챙기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쓰레기야 뭐… 알아서 치우겠지.
난 쓰레기는 대충 구석에 처박아두고, 아까 일어나자마자 모래로 덮어놓았던 팔찌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구도가 일부 수리되었습니다. 새로운 모래가 필요로 합니다.]
[수리된 내구도: 46%]
너무 과열되게 사용한 탓에 팔찌가 아주 너덜너덜했다.
모래로 내구도를 수리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겨 바로 수리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옆에서 같이 팔찌를 파주던(의미는 없지만) 스칼라가 안쓰럽다는 눈으로 팔찌를 바라보았다.
“팔찌… 아파 보여….”
“그래서 지금 고쳐주잖아.”
“묻어주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직 얘는 가면 안 돼.”
대체품을 찾을 때까지 절대 잃으면 안 된다.
이거 하나 덕분에 본래라면 깰 수 없는 것들도 싸그리 깨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런 거치고 너무 대접이 박한 거 같긴 한데…….
[죽여… 줘….]
“이미 죽어놓고선 뭘.”
뭐 어쩌겠어. 꼬우면 본인이 대체품을 알아서 찾아오겠지.
일단 나머지는 나가서 채우자.
난 팔찌를 다시 찼다. 벗고 있는 김에 잠시 쉬라는 의미로 벗어두었던 허리띠도 다시 찼다.
물론 허리띠도 내구도 보충을 마친 상태였다.
“준비 전부 끝났나?”
“네…!”
“응…!”
“그럼 슬슬 나가자.”
“드디어… 이 답답한 곳을…!”
데자트가 양 주먹을 꽉 쥔 채 환희를 토했다.
미치지 않고 멀쩡한 상태로 탈출하는 건가?
만약 이걸 공략집으로 쓸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난 그리 생각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문지기.”
[…….]
“네가 찾던 왕을 찾아내었다. 그러니 우릴 이제 그만 내보내 줘.”
[……승낙한다. 너희들은 나의 숨겨진 왕을 찾아내었다.]
쿠구우우우!
벽이 무너지면서, 들어올 때 보았던 문지기의 머리가 보였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마치 풍화된 것처럼 머리통의 절반이 사라졌다는 점이었고.
날 보는 시선에는 안식을 향한 염원이 담겨있다는 점이었다.
[찾고 나서야 모든 것이 떠올랐다. 나 또한 이미 사라졌어야 할 망자였거늘…….]
“…….”
[이름 모를 마법사여. 그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나는… 잊고 있던 걸 드디어 떠올리게 되었어.]
게임에서 본 적 없던 대사다.
내가 꾼 꿈과 영향이 있는 건가?
가만히 듣고 있자, 날 보는 문지기의 시선이 잠시나마 강렬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고대의 산물.]
“고대에 대해 잘 아나?”
[알고 있지만, 세계는 내게 그에 대해 말할 권한을 주지 않았지. 보다시피 나는 그저 왕을 찾아다니던 어리석은 문지기일 뿐이니.]
결론만 말하자면 아무 말도 못 해준다는 이야기다.
문지기는 그걸 알고 있는 듯, 더이상 분량을 끌지 않고 눈을 감았다.
[왕이 사라졌으니…… 이제 이 어리석은 신하 또한… 왕을 따라가는 것이 옳겠지.]
쿠구우우우-
천장이 무너지는 것이 보인다.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층.
꼭대기가 열리며, 며칠 만에 바라보는 태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를 활짝 열어젖힌 문지기가 말을 남겼다.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쿠구우우우우!
동시에, 피라미드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피라미드에서 벗어납니다!]
[피라미드의 문지기, 아누비스의 조각에게 영원한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최초로 문지기에게 안식을 주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세계에 당신에 대한 정보가 기록됩니다.]
[고대의 기록을 엿보았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의 마력 제어력이 1 올랐습니다.]
[피라미드의 문지기가 당신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봉인된 신체 능력치의 ‘감각’이 해방됩니다. 본래 당신의 능력치만큼 감각이 확장됩니다.]
팟!
피라미드가 무너지며, 맑고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와…… 이게 얼마 만이지?
생각 외로 그리 오래 있지 않았는데, 한 몇 년 만에 밖을 본 기분이었다.
전생에서 자가격리 당했을 때도 못 느낀 감정을 이리 느낄 줄이야.
“바깥…! 바깥이다아아!”
겨우 며칠 동안 하늘을 보지 못한 나도 그런데, 한 달이란 시간 넘게 갇혀 있던 데자트는 어쩌겠는가.
그녀는 무기를 허리춤에 집어넣을 생각도 못 하고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돌발 이벤트 클리어!]
[유일한 수호자, 데자트가 성공적으로 생존한 상태로 피라미드를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상태가 아주 양호합니다.]
[보상으로 마력 제어력이 2 올랐습니다!]
[보상으로 엘프 공주 ‘???’의 흔적을 획득하였습니다. 데자트를 통하여 보상을 확인하세요!]
총 합쳐서 마력 제어력 3!
난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라온 리그벨토]
힘: 47(일부 봉인)
민첩: 42(일부 봉인)
체력: 48(일부 봉인)
마력: 115(-30)(-1)(-0.2)(-0.5)(사용 불가능)
마력 제어: 5.5 (통제 가능 수치: 0.1~2-마력 사용 혹은 폭주할 시,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신성력: 0
[특이사항: 마력 수치에 비해 마력 제어 능력치가 굉장히 낮습니다. 마력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마력 흡수 쇠사슬’에 의해 모든 능력치가 일부 극히 제한된 상태입니다.
※마력이 일부 감소하였습니다(-30)(-1)
※폭주까지 60%(근처의 마력 영향에 받는다.)
※‘뇌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날씨가 ‘비’이어야만 합니다.)
※현 신체 능력치: 30
※감각이 해방되었습니다.
상태창 내용이 꽤 화려해져 있었다.
빙의 이전을 생각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빙의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감각이 해방됐다는 것도.’
쉽게 말해, 지금 내 능력치는 30대이지만, 감각만큼은 본래 능력치인 40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거라면 싸움을 훨씬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이보다 좋은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미 필요한 아이템 대부분을 얻었고, 남은 건 오로지 ‘천마신검’과 ‘천마갑주’뿐.
이걸 얻고 난다면…….
‘동료와 신수만 남았다.’
전부 얻고 난다면 이전처럼 메인 스토리를 진행해도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간을 더 투자해 좋은 조건을 갖추어도 좋을 터.
메인 스토리는 아무리 내가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홀로 밀기는 힘들다.
최소한 10번 이상은 반복해봤어야 클리어가 가능한 난이도.
그렇다면, 10번 반복한 것보다 더 철저히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죽지 않으려면.
난 하늘을 보며 순수히 기뻐하는 이들을 보며 물었다.
“또 피라미드 가자고 하면 화낼 거지?”
“뭐?! 절대 안 가! 아니, 못 가! 그 답답한 곳을 또 가라고?”
당연히 데자트는 펄쩍 뛰었다.
그럼 아벨라와 스칼라는?
둘에게 슬쩍 시선을 주자, 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기는 싫은데, 또 내가 가자 하면 가기는 할 거 같은 분위기…….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한 말이야. 나도 갈 생각 없어.”
“휴…….”
“후….”
‘어차피 보상은 중복되지 않는다. 다시 들어가도 의미는 없어.’
난 피라미드가 무너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 피라미드 같이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음에도 흔적도 남지 않은 자리.
이걸 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떠올랐다.
처음엔 제대로 기억이 안 났는데…….
‘지금은 알겠어.’
내가 누굴 떠올렸는지.
…그래.
“평온히 쉬길.”
잊혀진 신의 추종자, 푸슈엘.
마치 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나르아는 달렸다. 외모고 뭐고 따질 게 없었다. 오로지 그녀는 피라미드로부터 멀어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는 유독 길을 찾는 능력에 특화되어있었다.
덕분에 무작정 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목적지로 했던 배에 금세 도달한다. 배를 목격한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동안 방치되어있었지만, 다행히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 외각.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배에 올라타는 계단 위에 발을 올린 그녀가 독기 어린 눈동자를 했다.
‘일단… 휴식을 취해야 해.’
그리고 나서 그를 죽이려 들어도 늦지 않다.
피라미드의 왕…… 그녀가 그토록 찾던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의 존재.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걸 이뤄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죽인 건 놀랍지만.
‘그만큼 상처가 크겠지.’
겨우 하루 이틀 쉬어서는 회복되지 않을 상처다.
더군다나 그가 다루는 무기가 얼마나 독한지 아는 만큼.
절대 하루 이틀 쉬어서 회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회복하는 게 빠를 테니, 그걸 틈타 빠르게 죽인다면…….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
그녀는 갑판 위에서 들리면 안 될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검은 두건을 쓴 인영이 갑판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보며 썩은 웃음을 지었다.
“…하. 내가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와있네. 마치 개처럼.”
“죽고 싶나?”
스릉-
어느샌가 그들이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 내밀고 있었다.
서늘한 검의 감촉이 목에 닿는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베어낼 수 있도록 힘을 주면서 압박감을 주었다.
“지금 네 목이 누구에게 걸려있는지 모르나 보지?”
“내가 목숨 따위를 아까워할 거 같아? 죽일 거면 죽여. 하지만 명심해. 내가 죽으면 그보다 더한 지옥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복면의 남자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을 내던질 수 있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눈.
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그는 혀를 찼다.
“쯧.”
저런 눈을 가진 자는 죽어서도 탈이 났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이.
그가 칼을 거두자, 그녀의 목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원 자금. 부족하지 않아?”
“…뭐라?”
“내가 원하는 이들을 죽여줘. 그럼 네 신교에 보내는 지원금의 양을 늘려주지.”
그녀의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말은 어찌 되었든, 자신을 고용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감히 천마를 모시는 신도인 자신을…….
‘…하지만 금액이 너무 크다.’
일개 신도의 자신감을 부리기엔, 그녀가 약속하는 것이 너무 컸다.
만약 이걸 거절한다면?
‘위에서 내게 어떤 지시를 내릴지….’
그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을 읽은 그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신을 모시려면 최소한의 자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설마 신을 초라한 집에서나 모실 생각은 아니겠지?”
“……빌어먹을.”
“목표에 대한 건 30분 후에 정리해서 주지. 목을 잘라서 내게 가져와. 그럼 나, 아니 상단과 신교 사이의 거래는 성립되는 거야.”
성큼성큼 갑판으로 걸어 올라가는 그녀.
그는, 감히 신을 모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한 그녀를 베어내고 싶었지만.
일개 신도에 불가한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도 베어낼 수도 없었다.
30분 후. 복면의 남자는 그녀에게서 받은 정보로 천마 신교에 연락을 올렸다.
“제거 임무다. 목표는 넷. 두 명은 상급 기사 수준으로 보이니, 철저히 제거할 수 있는 실력자 둘을 보낼 것. 이 작전은 내가 리드한다.”
-알겠다, 30번. 내일 바로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인원을 당장 보내겠다.
“알겠다. 통신 종료.”
그는 통신에 사용한 수정구를 내려놓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로지 천마를 위해 갈고 닦아온 검을, 이런 데에 쓰는 게 너무나 치욕스러웠지만.
세상은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현실에 타협하기로 했다.
“모든 건, 천마를 위하여.”
이 억울함과 화는, 목적이 된 그들에게 풀면 그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