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흐음…….”
콧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내 턱선을 훑는다.
이어 내 목을 쓱 내리긋고, 로브 안으로 손을 넣어 쇄골을 만졌다.
마치 뱀이 기어 다니는 기분에 이가 악물렸다.
당장이라도 떨쳐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죽을 게 뻔하니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내 무능함에 이가 악물렸다.
언제나 느끼던 감정이지만, 목숨까지 걸려있는 상황이다 보니 더욱 이가 갈렸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 아니라는 거지.’
그의 눈빛도 그렇고 반응도 그렇고, 나를 마르간의 부하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것 같진 않다.
하기야 마르간의 부하가 한 명도 아니고, 예전에 봤던 얼굴이랑 다르다고 해서 바로 나를 사칭범으로 의심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거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었고.
물론 내가 사칭범인 게 들통났다면 다르겠지만….
“…이, 이번에 새로 마르간 님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래? 꽤 강하나 보네?”
“아, 아닙니다…….”
“그보다 마력이 참 아깝다야. 대체 어디로 마력이 빠져나가는 거니? 응? 마력을 소중히 써야지.”
그의 눈이 내 몸을 훑었다. 그러다 내 다리 부근에 툭 튀어나온 쇠사슬을 보고 눈을 살짝 빛냈다.
“아하. 그 요상한 쇠사슬 때문이구나? 참 요물이네. 그걸 왜… 아하!”
질문하던 그는 알아서 이해하더니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너, 마르간한테 까불다가 당했구나? 그래서 묶인 거고!”
“…하, 하하.”
“네가 쓸모 있긴 한가 보다~ 죽이지 않고 살려놓고, 또 그리 아끼던 놈을 죽이고.”
그는 지하실에 있는 시체를 알아차린 듯, 지하실 쪽을 보곤 혀를 찼다.
“쯧쯧쯧. 총애받더니 결국 거슬려서 죽었나 보네. 목숨이 아까운 줄 알았어야지. 그치?”
“하, 하하….”
“흐음… 너, 좀 탐나는데? 그 병신이 마음에 들어 저놈을 처리할 정도라면 네가 얼마나 뛰어날까?”
‘이건 좀 위험한데.’
적대를 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나를 탐내서 데려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흐음….”
“모르폰님. 이 여자들도 잡을까요?”
이미 나를 데려갈 거라 생각한 건지, 어느새 나타난 모르폰의 수하들이 아벨라와 스칼라를 보며 물었다.
눈빛에 담긴 탐욕과 욕망, 더러운 감정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만일 이들이 손을 뻗는다면…….
‘싹 다 죽이는 건 불가능해도.’
나중에 치료한다는 생각으로 팔이나 다리 한 짝을 날리면, 도망칠 순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방법을 쓰던가.
난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미리 숨겨둔 사슬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바로…….
“아니? 여자는 관심 없어. 그보다 너희들은 좀 꺼져줄래? 너희들의 더러운 목소리보다, 이 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신경을 쓰고 싶거든.”
“예!”
“말하지 말라니까?”
푸확!
모르폰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열정적으로 대답한 수하의 목이 날아갔다.
목을 잃은 몸이 피를 내뿜으며 뒤로 엎어졌다.
“하아아- 또 마력을 낭비했잖아.”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쉰 그는 긴 손톱으로 뺨에 묻은 피를 긁어냈다.
긴 혀를 내뻗어 입술을 훑은 그가 말했다.
“이제 내 부하 하나가 없어져 버렸는데, 어때?”
“네?”
그는 내게 다가와 친근하게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내 것이 되지 않을래? 난 네가 참 마음에 들어.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아도, 이 턱선이나 이 목… 그리고, 네 체구까지. 작아서 들고 박기 최고야.”
미친년.
위험한 눈빛에 속으로 마음을 먹었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탈출한다.
다시 붙이는 데에 돈은 많이 들겠지만, 돈이야 썩어 넘친다.
‘스토리가 꼬이더라도…….’
내가 그리 다짐을 한 순간.
“…뭐, 그래.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는 내 어깨에 올렸던 팔을 내렸다.
“원래라면 억지로 납치해서라도 데려가겠지만, 이번엔 참아줄게. 마르간 그 새끼랑 또 투닥거리고 싶진 않거든.”
“….”
그는 붉은 입술을 휘어 웃으며 내 뺨을 톡톡 두들겼다.
“애기야. 그럼 다음에 보자?”
“…….”
살았다. 근데 이걸 웃어야 하나?
난 경직된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짜증이 치밀어올라 로브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진짜 안에 단검이라도 있으면 바로 휘둘렀을 텐데…….
‘어?’
단검 대신에 뭔가가 손에 잡힌다.
아주 익숙한 감촉이다.
분명히 보따리 안에 넣어뒀었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삐죽 튀어나온 모양.
잠만.
이거라면…….
“……그, 선물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응? 선물? 뭔데 뭔데?”
“이거입니다.”
난 손에 잡혔던 물건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흑색의 반지.
단순해 보이지만, 묘하게 반짝이는 재질이라 그런지, 꽤 이쁜 반지였다.
“반지?!”
“…네.”
“너도 이런 쪽에 취향이 있었구나?”
시발. 존나 싫다 진짜.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짜증이 날 정도로 수줍게 반지를 받은 그가 말했다.
“그래. 소중하게 잘 착용 할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나중에 또 봐!”
보긴 지랄이. 죽어도 안 봐.
난 속으로 뻐큐를 날리고, 아벨라와 스칼라를 데리고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내가 방금까지 저 미친년이랑 대화해서 그런지,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다.
안전지대에서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
살았다.
시발, 목숨도 위험했지만, 남자로서도 위험했다…… 아, 그냥 존나 싫다.
차라리 그냥 싸우게 해줘.
‘후우….’
“도련님. 괜찮으세요?”
“땀… 엄청 흘렸어….”
아벨라와 스칼라가 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 이마와 손등을 닦아주었다.
그제야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진짜 많이 긴장하긴 했나 보다.
‘만약 다음에 만난다면…….’
그땐 지금처럼 참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준비를 하여 반드시…….
‘죽인다.’
그러기 위해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현재 나는 필요한 아이템은 모두 얻었다.
전투를 보조해줄 도구도 얻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물약까지.
‘이제 남은 건, 천마갑주와 천마신검.’
물론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다.
마력 폭주 가능성이 낮춰진 것일 뿐, 마력이 폭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 만일 폭주하거나 한다고 해도 몸이 버틸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신수들을 찾아야겠지.’
그리고 또 전투를 함께 할 동료까지 영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 사막까지 찾아온 것이었으니.
그리고…….
‘이 둘을… 키워야겠어.’
난 스칼라와 아벨라를 바라보았다.
이번에야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운이 좋아 아벨라와 스칼라, 모두 살아남았지만.
두 번이나 기적이 찾아오리라는 법은 없다.
‘최소한 도망칠 수단이 필요해.’
다행인 점이라면, 스칼라는 도망치는 것이라고 해도 무언갈 배우는 데에 특화되어있고.
아벨라는 암살 재능만큼은 굉장히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암살 재능이라고 해서 딱 ‘이거다!’할 만한 건 없지만.
아벨라 같은 경우엔 암살자가 가질 만한 재능은 모두 갖춘 완전한 육각형 스타일.
그러니, 어디에 숨거나 빠르게 도망가거나 하는 데에 재능도 충분했다.
‘이제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다.
내가 기초 지식 정도는 가르칠 수 있지만, 그건 완벽한 게 아니었다.
가르칠 수 있는 건 기초일 뿐이지, 그 이상은 나도 가르칠 줄 몰랐으니까.
그러니 반드시 그녀의 능력을 살려줄 스승은 필수였다.
‘일단 내가 아는 양반들 중에선 없고.’
실력이야 다들 뛰어나지만, 인성이 문제다. 자칫하다간 기껏 피한 타락 루트를 다시 밟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실력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인성이 나은 사람을 구해야 했다.
어떻게 구하지?
‘…스칼라도 문제이긴 하네.’
스칼라는 본래 게임보다 훨씬 빠르게 마력을 개통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속성을 다룰 수가 없는 상태.
매일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어 연습하고 있지만, 불꽃이 피어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계속 속성을 다룰 수 없다면…….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해.’
그 계기가 어떻게 찾아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1차 각성 때 올 수도…….’
그건 너무 늦는데.
난 한숨을 푹 쉬었다.
마음 같아선 해결 방법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이 한가로이 고민에 빠져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게 아닌지라, 우선은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일단 천천히 구해봐야겠군.’
부탁한다, 미래의 나!
“저… 근데 도련님.”
“?”
이마에 묻은 땀을 모두 닦아준 아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한테 준 반지… 그거 뭐예요?”
아벨라의 질문에 스칼라가 퍼뜩 고개를 든다.
스칼라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어서 대답해달라는 눈빛에.
“그거?”
난 픽 웃으며 대답했다.
“발기부전의 반지.”
“…네?”
“오크의 것도 죽일 정도로 강한 거야. 왜냐하면 한 번에 죽이는 게 아니라, 아예 몸이 반응을 못하게 체질을 바꾸는 거거든. 일회용인 데다가 상위 기사 수준이 아니면 못 느껴. 상위 마법사라고 해도 그 허약한 몸뚱아리로는 아무것도 인지 못 할걸?”
난 엄지로 내 목을 그었다.
“나한테 까불면 이리되는 거야.”
“……도련님, 지금 엄청 무서운 거 알아요?”
“무서우라고 하는 거야.”
바로 뜻을 이해한 아벨라와 달리, 스칼라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멀뚱멀뚱 날 바라봤다.
“…발기부전이… 뭐야…?”
아, 이걸 모르겠구나.
“남자에게 가장 끔찍한 병.”
“…어엄청?”
“어. 어어어엄청.”
일부러 어를 두 개나 붙여줬다. 덕분에 제대로 이해한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따봉을 날렸다.
“오빠… 대단해…!”
“그치?”
“응… 나도… 그 사람… 싫었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난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다른 데로 가자.”
“이제 도시로 가는 거예요?”
아벨라가 희망을 담은 채 물었다.
아무래도 빨리 사막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니.”
아쉽게도 아직 할 일이 남았다.
“…그럼 어디로?”
“이 밑.”
“…네?”
난 손가락으로 지하를 가리켰고.
아벨라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 * *
인간들 사이에서도 피부에 따라 인종을 다르게 나누듯이, 엘프도 피부와 사는 지역에 따라 종을 나눴다.
흔히 우리가 아는 숲에 사는 나무 엘프부터 시작하여, 어둠의 정령이 사는 죽은 숲의 다크 엘프, 돌밖에 없는 척박한 지형에서 살아가는 스톤 엘프, 사막에서 사는 사막 엘프.
내가 찾으려는 건 엘프는 사막 엘프였다.
‘워낙에 사막이 넓다 보니, 찾기가 더럽게 힘들지.’
특히나 사막 엘프는 사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고 주기적으로 바꾸기 때문에 찾기가 유독 어려웠다.
규칙적이라면 모를까, 불규칙적인 점도 문제였고.
찾기 위해선, 반드시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엘프였던 그년… 내가 죽였던 그 여자의 정보가 반드시 필요했다.
‘크게 다쳐서 30일은 못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연락이 온 게 5일 전이니, 지금은 전혀 못 움직일 거예요!’
위치는 정확히 동쪽 바다 근처의 작은 피라미드의 지하.
다행히 찾기 쉬운 위치다.
거짓말일 가능성도 없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동족이란 영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기에, 동족을 대가로 얻어낸 정보인 만큼 나름 신뢰성은 높다.
‘아무리 멀어도 2일이면 가겠지.’
그 안에, 갑자기 치료가 되거나, 다른 놈이 찾거나 하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2년 뒤에도 멀쩡히 살아있긴 했지만,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정확히 몰랐으니까.
이왕이면 제정신일 때 만났으면 좋겠는데.
“헥, 헥, 헥….”
스칼라가 잔뜩 지친 듯, 혀를 내민 채 헐떡거렸다.
조금도 주체하고 싶지 않아 스칼라를 등에 업고 계속 걸었다.
스칼라와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준 아벨라가 물었다.
“저, 도련님.”
“왜.”
“혹시, 찾으시는 게 또 범죄자예요?”
내가 너무 범죄자만 찾아다녔나?
난 속으로 작은 머쓱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찾는 건 엘프야. 사막 엘프.”
“사막 엘프…? 그럼 그분은 착하신 분인가요?”
…착하냐고?
난 잠시 내가 기억하는 사막 엘프에 대해 떠올렸다.
어…….
“…아마?”
미치긴 했지만 못 되지는 않았으니 착한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