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으응…….’
스칼라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조금씩 떴다.
무거운 눈꺼풀 때문에 잘 떠지지 않는 시야 사이로 침대를 짚고 있는 손이 보인다.
그녀는 멍한 정신 속에서 자연스레 손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팔이 짧아 닿지 못했으나, 손이 움직여 부드럽게 스칼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안 자냐?”
“…….”
“자는 거 같은데.”
스칼라가 조금 몸을 틀어 위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서 빛나는 무심한 눈동자.
얼핏 보면 차갑고 무감정해 보이는 눈빛이나.
색이 바랜 것에 비해, 확연한 빛을 품고 있고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으응….”
스칼라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볼로 가져다 댔다.
꺼끌꺼끌한 감촉이지만, 그녀는 이 감촉이 좋았다.
그녀가 노예로 잡히기 전.
움직이는 데에 제한이 있는 나무 할아버지 대신에 그녀를 키워준 재규어의 손바닥이 이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자네.”
라온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더 자.”
“으응….”
라온이 장난스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스칼라가 콧잔등이 살짝 찡그리자 작게 웃으며 콧잔등을 쿡쿡 찌른다.
그녀는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면서도, 행복감을 느꼈다.
‘편해…….’
몸이 푹 빠져들 정도로 부드러운 이불도 그랬지만.
아무리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라온의 마력의 영향이 제일 컸다.
스칼라는 아직 어린 만큼, 마력을 흡수하는 본능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다.
덕분에 노예로 잡혀있을 때도, 의도치 않게 마력으로 발동되는 구속구를 부수어 탈출하려 했다고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선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라온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은 스칼라가 아무리 먹어도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한 감각은 그녀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었으니.
“으응…….”
“…얘가 왜 이래.”
꾸물꾸물 움직이던 스칼라는 아예 라온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순간 라온은 당황한 듯해 보였지만, 그녀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잡아준다.
덕분에 편하게 누울 수 있던 스칼라는 처음으로 ‘어리광’이라는 행동을 배웠다.
-이 할애비한테 어리광을 피워보지 않겠느냐?
-까칠…까칠해… 아…파…
-…….
예전에 나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길 바랐지만.
나무껍질이 너무 까칠한지라 하지 못했던 행동.
부모가 버렸기에 하지 못한 어리광을 잔뜩 피우던 스칼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어리광은 보통 부모님에게 하는 거란다. 그러니까 얼른 이 할애비에게도 해주렴.
‘그럼… 이 사람은… 내… 부모…?’
그녀에게 있어서 부모란 자신을 버린 원수였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한들.
그녀에게 있어서 부모라는 단어는 듬직하고 의지 되는 존재가 아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존재들이었다.
‘그건 싫은데….’
그럼 이 사람은 나한테 뭐지?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라온을 모시는 하녀인 아벨라는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라온이 그녀를 하녀로 받아들였다고 했으니 자신도……?
아니면 다르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점점 눈이 감긴다.
그녀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손을 뻗어 라온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마치 소중한 걸 잡듯이, 손가락을 품으로 끌어들인 스칼라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새액…… 새액…….
스칼라가 고른 숨을 내뱉기 시작하자.
조용히 손가락과 무릎을 빌려주고 있던 라온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조심스레 손가락을 빼내고 머리를 바쳐 베개 위에 올려주었다.
‘갑자기 애가 왜 이래.’
아직 인간에 대한 적의가 쌓이지 않아서일까.
원래라면, 눈치가 있어 낮에는 날 적대하거나 경계하지는 않지만.
눈치가 흐려지고 잠에 취했을 때인 지금 즈음에는 타인에 불가한 나를 경계하곤 했다.
그게 풀리려면 최소한 몇 달은 기다렸어야 하는데…….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라온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칼라의 옆자리에 잠든 아벨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둘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침묵 마법을 걸고 방에 넣어둔 보따리를 어깨에 걸친 채 나왔다.
밑으로 내려가자 새벽임에도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흐아아암-”
“어이.”
라온은 그에게 다가가 100이라는 숫자가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100이 새겨진 금화.
금화가 100개 있는 것과 같은 가치였다.
“마당을 완전히 빌리고 싶은데.”
“아, 아!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금화를 받은 직원은 소중히 금화를 품에 끌어안고, 라온을 마당으로 안내했다.
원래라면 공용으로 써야 하는 곳이지만.
고급 여관이고 치안이 안 좋은 걸 감안해서, 아예 마당을 통째로 빌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편히 이용하십시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휴대용 아궁이 하나.”
“마른 나뭇가지를 가득 채워드릴까요?”
“그래.”
눈치껏 라온이 뭘 하려고 한 지 알아차린 직원이 금세 라온이 원하는 걸 가져와 주었고.
이내 두꺼운 결계가 펼쳐지며, 마당과 바깥의 세상을 구분했다.
이제 죽일 수 있다.
라온은 보따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 * *
“끄윽!”
보따리 안에 박혀 있던 엘프가 구르며 밖으로 튕겨 나왔다.
“헉, 헉, 헉, 헉…….”
“아까 내가 죽여주지 못해서 미안해.”
난 그녀에게 친절히 웃어 보이며 다가갔다.
“이번엔 확실히 죽여줄게.”
“자, 잠시만!”
엘프가 급히 몸을 구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내가 왜?”
“다, 당신을 공격한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안 궁금해.”
처음에는 ‘왜 공격한 거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금방 답을 배출해낼 수 있었다.
“올해의 계약 내용인 ‘강자 공급’ 때문이겠지.”
“……!”
“분명히 네 계약에 대해서 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날 속이려 드는 거지? 정말 이해가 안 돼. 나를 병신 머저리로 보는 건가?”
물론 처음엔 알지 못했다.
현재 내가 여기에 온 건 게임 시점으로 2년이나 일찍 온 것이고.
그 당시에는, 암왕이 신세대에 밀려 강한 힘을 원했기에 영약 같은 물건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암왕은 최강의 자리에 있고 강자와의 싸움을 즐긴다는 걸 생각하면.
왜 그녀가 날 공격했는지 정도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아, 아닙니다…….”
“그러면 더 할 말 없지?”
혹시 내가 모르는 정보가 있을까 싶어 도발해봤지만.
“자, 잠깐! 제가 죽으면 암왕이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역시나 개소리를 내뱉을 뿐이다.
암왕은 그녀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겨우 이런 놈에게 강자를 붙잡아오라는 소리를 안 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몇십 번이고 그녀를 죽여봤지만.
암왕이 찾아오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난 단검을 꺼내어 역수로 쥐었다.
엘프가 더 무어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푹!
그 전에 단검을 목에 박아넣었다.
“그르으으윽! 제, 제발 살려……!”
푸화아아악!
단칼에 목을 잘라버리고 싶지만 내가 가진 힘은 그게 부족했다.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단검으로 거세게 쑤셔 넣고 내리그었다.
칼로 살을 베어내는 감각은 너무나 생생하게 내 뇌리에 틀어박혔다.
잘린 목 단면에서 피 분수가 뿜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아…….”
이리 죽이는 건 처음이다.
언제나 죽이는 건 목을 부러트려 죽이거나, 쇠사슬을 이용해서 죽이는 거였는데.
이번엔 직접 칼을 꽂아 넣어 죽였다.
왜냐고 물으면…….
‘마무리 때문인가.’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된 이상.
그녀는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보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는 뜻이며.
마지막인 만큼, 처음으로 내게 충격을 안겨준 죽음으로 끝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사슬로 죽이는 건, 잔인하긴 해도, 내가 원했던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손등으로 볼에 묻은 피를 닦았다. 피로 얼룩진 옷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다 물들었네.”
이건 못 쓰겠다. 시체 태울 때 같이 태워버려야지.
난 혀를 차면서 로브 안에 있던 짐들을 모두 빼놓아 옆에 두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통과 몸뚱아리를 들어 올려 아궁이 안에 집어 던졌다.
입고 있던 로브까지 안에 집어 던지고.
아궁이 밑에 설치된 발화 아티팩트를 발동시키자,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체와 옷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난 사라지는 살인 흔적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건 기억에 남으려나?’
내가 떠나고 라온이 다시 이 몸으로 돌아왔을 때.
과연 지금의 내 기억들이 모두 라온에게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넘어가게 된다면, 이 순간도 남게 될까?
이왕이면 남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쓰레기이고 미래에 죄를 저지르는 놈이라고 한들, 누군가를 죽이는 기억이 남아있는 건 좋지 않을 테니까.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날 건드리는 놈들은 싸그리 죽인다고.
난 그런 놈이 아닌데 말이지.
난 피식 웃으며 불의 강도를 더 높였다.
화르륵!
불이 더 거세게 타오르며 시체와 옷들을 집어삼켰다.
불은 아궁이를 넘쳐흘러, 아궁이마저 집어삼켰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리에 남은 건, 새까맣게 타버린 재뿐이었다.
“….”
펄럭.
나는 미리 꺼내어둔 여분의 로브를 걸치고 짐들을 모두 챙겼다.
이제 이 악연은 평생 볼 일 없게 되었건만.
왠지, 시원하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계 밖으로 나와,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아벨라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분명히 잠든 걸 확인했는데?
잠든 걸 연기한 건 아닌 듯, 그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작게 눈곱이 껴 있다.
보이기 싫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비빈 탓에 눈까지 벌겋게 변해있었다.
잠시간 날 빤히 바라보던 아벨라가 입을 열었다.
“고민이… 있어요….”
“무슨 고민.”
말하기가 꺼려지는 듯.
잠시간 망설이던 아벨라는 내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도련님한테 도움이 될지….”
“…갑자기?”
“…네. 어제… 알았어요. 스칼라, 그 아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도련님은 그 재능을 알아차리고 데려오신 거죠?”
“…….”
어떻게 알았지?
아니. 아니지. 모르는 게 이상한 건가.
대놓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개방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저런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내 침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도련님은 앞으로 위험한 곳에 다닐 거라는 걸. 필수적으로 무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저 없어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시다는 거….”
“…….”
“그래서… 제가 도련님한테… 쓸모가 있을까… 싶어서….”
설마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결국 내가 아는 정보는 모두 게임 내에서 얻은 정보로 한정되어있었고.
지금 아벨라는 게임에서 항상 보던 캐릭터와 별개의 인물이라 봐도 무방했다.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게임 캐릭터가 아닌.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성장하는 인간.
“틀린 말은 아니야.”
“….”
나중에 가면 인프라가 전혀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 야영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지금이야 돈을 주고 여관에서 지내면 그만이다.
청소나 요리, 하녀가 해야 하는 일은 모두 여관에서 돈을 주면 해주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하녀인 그녀의 역할이 불필요한 건 맞았다.
“다만.”
하지만 난 그런 잡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난 너한테서 그런 종류의 쓸모를 바란 게 아니야.”
“…?”
“내가 네게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내 옆에만 있어.”
내가 처음으로 이야기의 뒤틀림을 감수하고, 아벨라라는 캐릭터에게 손을 뻗은 이유는.
오로지, 그녀가 스트레스로 정신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내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온에겐 언제나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벨라는, 누구보다 그 역할에 제격이었다.
“…….”
아벨라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완전히 불안감을 지우진 못했다.
아벨라 같은 사람은 많이 봐왔다.
편하게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게 불편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더 불안해하는 법이다.
“정 아니면 다른 걸 배우던가.”
“…다른 거?”
“네가 하고 싶은 거. 그걸로 나한테 도움을 주면 되잖아.”
암살만 아니면 된다, 암살만.
내 말에 살짝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작게 입을 달싹였다.
“…도움이 될 거.”
“그리고 지금이야 여관에서 지낼 거지만. 나중에 가면 달라질 거야.”
난 그녀의 앞에 서며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잘 생각해봐.”
주머니 안에 미리 따로 보관해놓은 아티팩트를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
그냥 시장에서 볼 법한 흔한 디자인의 머리끈.
보석처럼 보이는 장신구가 달린 걸 제외하면 별 특이한 게 없는 아티팩트지만.
실제로는, 저장해둔 마력만큼 위기 상황에 보호막을 만들어주는 아티팩트였다.
“내 옆에만 있으면 알아서 충전되는 거야. 언제 다칠지 모르니까 항상 가지고 있어.”
“……지, 진짜로 저 주시는 거예요?”
“어. 누가 널 습격하면, 널 죽이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줄 거야.”
홀린 듯, 내가 내민 머리끈을 바라보던 아벨라가 소중히 머리끈을 받았다.
소중히 품 안으로 끌어들인 아벨라가 날 올려다보았다.
“……저.”
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은 아벨라가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하지만 울먹거림과 별개로,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목소리는 굳센 결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의 굳겐 결심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자러 가자.”
“…네.”
아벨라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